# 140
/혈룡전 6권 (140화)
4장 새로운 적 (2)/
“으음…….”
오른팔을 들어 올린 소은설이 나직한 신음을 흘렸다.
“몇 번을 해도 이 느낌은 적응이 되지 않네요.”
“예전에도 그대의 피를 나에게 줬었지.”
진운룡이 아련한 눈으로 소은설을 바라봤다.
“그런데 광기를 없애는 효과가 있다는 것은 놀랍군요. 예전에는 그런 것이 전혀 없었는데…….”
소은설이 호기심 어린 얼굴로 자신의 손목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약간의 핏자국이 남아 있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요? 흐릿한 기억 속에서 봤던 석실의 그자가 무언가를 한 걸까요?”
제갈여령의 혼을 다시 세상으로 불러온 자.
그자는 분명 제갈여령이 무언가의 중요한 열쇠라고 했다.
그렇다면 소은설의 피가 마성과 광기를 잠재우는 효과가 있는 것도 그자와 연관이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고 보니…….”
진운룡이 무언가 생각하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복면인이 떠오른 것이다.
그가 분신술을 사용한 것을 볼 때, 그자는 무공뿐 아니라 술법에도 능한 자임이 틀림없었다.
“공자님이 만났다는 그 복면인을 의심하시는 건가요?”
소은설이 진운룡의 생각을 눈치 채고 물었다.
“그렇소. 아무래도 그자가 의심스럽소……. 아마도 혈신대법 역시 그자가 원흉일 가능성이 크오. 혈신대법과 분신술을 쓸 정도로 술법에 능한 자라면, 그대를 세상에 다시 불러왔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지.”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이유가 뭘까요? 게다가 두 달 후에 모든 것을 알게 될 것이라니…….”
소은설이 미간을 찌푸렸다.
복면인의 말을 종합해 볼수록 그자가 모든 일의 원흉임이 거의 확실했다.
도중문이 그자를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는 것이 조금 걸리기는 했으나, 어찌됐든 도중문을 구했다는 것은 두 사람 사이에 무언가 연계점이 있다는 이야기였다.
도중문과 관계가 없다 하더라도 최소한 혈신대법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니 진운룡의 의문에 대해 두 달 후에 모두 답해주겠다 자신했을 것이다.
한데 굳이 두 달이라는 기간을 둔 이유는 무엇일까.
그간 무슨 일을 꾸미려는 것일 수도, 아니면 함정을 파고 기다리려는 것일 수도 있었다.
한 가지 의문점은 복면인이 진운룡을 적대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암기를 날리기는 했으나, 그것은 도중문을 구해내기 위한 수였을 뿐이다.
전체적인 행동과 느낌이 진운룡을 적대하기 보다는 오히려 친근하게 대하는 모습이었다.
“하오문에 의뢰를 할 수도 없고…….”
진운룡이 눈살을 찌푸렸다.
진운룡조차 따라잡지 못한 자다. 그가 종적을 숨기려 마음먹었다면 하오문이라 해도 찾지 못할 것이다.
“일단 동창을 주시하면서 두 달 동안 기다리는 수밖에 없나요?”
만일 그자가 도중문과 연계된 자라면 동창과 연락을 할 가능성도 있었다.
그때 꼬리를 잡는다면, 복면인의 정체를 쫓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황제의 직속 기관을 함부로 염탐할 수도 없을뿐더러, 만일 감시를 한다고 해도 동창 전체를 감시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동창 제독 육환을 만나봐야겠소.”
잠시 생각하던 진운룡이 말했다.
“그자가 알고 있는 게 있을까요?”
“제령안을 써서 그자의 머릿속을 들여다보면 복면인과의 관계를 알 수 있을 거요.”
동창에서 복면인의 정체를 파악하고 있는지, 아니면 동창조차 모르는 존재인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소은설을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으로서는 그것이 최선의 방법이었다.
황궁도 제집처럼 드나들 수 있는 진운룡이라면 육환을 은밀히 제압하는 것은 그야말로 식은 죽 먹기일 터.
“일단 하오문에 육환의 소재를 알아봐야겠소.”
“직접 가실 필요 없이 구학에게 부탁하면 될 듯해요.”
고개를 끄덕인 진운룡이 구학을 불러 하오문에 보냈다.
* * *
안휘 남궁세가.
남궁진천이 망우에 의해 추포되고, 개방 방주 구천엽을 죽이고 탈출했다는 혐의까지 받으며 남궁세가는 크게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무림에 내려진 황제의 칙령까지 그들을 압박했다.
남궁진천으로 인해 무림의 공분을 사고 있는데, 조정의 봉문 요구까지 있다 보니 그들로서는 세가의 존폐를 걱정해야할 처지였다.
얼마 전 확실한 진위는 알 수 없으나 진운룡이 도중문을 물리쳤다는 소문이 돌아 조정의 압박이 멈춘 상태인 것이 그나마 다행이긴 했다.
하지만 남궁세가는 진운룡과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렇기에 무언가 사정이 나아질 것이라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오히려 도중문마저 물리친 진운룡이 남궁세가에게로 화살을 돌릴까 걱정을 해야 할 판이었다.
이런 이유들로 인해 세가의 분위기는 고요하고 무겁게 가라 앉아 있었다.
되도록 출입을 자제하고 있는데다가 찾아오는 손님조차 없어 안휘를 호령하던 남궁세가의 활기차던 모습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삼경이 넘은 야심한 시각.
정문을 지키는 위사마저 없애고 굳게 문을 걸어 잠근 남궁세가의 담장을 한 인영이 유령처럼 타고 넘었다.
인형은 고요한 세가의 건물들을 바람처럼 타고 넘으며 가주전으로 향했다.
현재 남궁세가의 가주는 남궁진천의 첫째 아들 남궁명이었다.
아직 침소에 들지 않았는지, 가주전은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인영은 열린 창문으로 조심스럽게 가주전 안쪽을 살폈다.
열 평 정도 크기의 가주전은 고풍스러운 가구와 도자기, 병풍이 사방을 채우고 있었다.
그 한쪽에 자단목으로 된 고급스러운 책상에 남궁명이 앉아 있었다.
그의 앞에는 업무에 관련된 종이 두루마리들이 수북이 쌓여 있는데, 남궁명은 두루마리에는 신경을 쓰지 않고 멍하니 허공만 응시하고 있었다.
“휴…….”
한동안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던 남궁명이 근심 어린 얼굴로 한숨을 쏟아냈다.
“남궁세가가 어쩌다 이리되었단 말인가…….”
그가 탄식을 쏟아냈을 때였다.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갑작스럽게 들려온 목소리에 남궁명이 급히 공력을 끌어올렸다.
아무리 남궁세가의 성세가 예전만 못하다지만, 어찌 세가 가장 깊은 곳인 가주전에 침입자가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들어올 수 있단 말인가. 더군다나 남궁명조차 침입자의 기색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것은 곧 침입자가 그의 수준을 월등히 뛰어넘는 초극의 고수라는 말.
“누구냐!”
“나다! 명아!”
침입자의 정체를 확인한 남궁명이 두 눈을 부릅떴다.
그의 앞에 서 있는 사람은 지금의 사태를 만든 자신의 아버지 남궁진천이었던 것이다.
“아, 아버지!”
남궁명이 흔들리는 눈동자로 남궁진천을 바라봤다.
그의 두 눈에 원망과 반가움이 교차했다.
비록 세가가 여기까지 내려앉게 된 원인을 제공한 남궁진천이었으나, 남궁세가를 최고의 위치에 끌어올린 사람 역시 그였다.
또한, 지금 같은 위기 상황에서 남궁세가의 식솔들이 가장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 역시 남궁진천이었다.
“대체 어떻게 되신 겁니까?”
남궁명의 목소리는 나직하면서도 조심스러웠다.
아무리 세가 안이라지만 혹여 남궁진천이 이곳에 있다는 사실이 새어나가기라도 한다면, 그때는 정말 무림의 공적이 될 가능성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간 고생이 많았겠구나…….”
남궁진천의 말에 남궁명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나이 오십이 넘은 그였지만, 남궁진천 앞에서는 아직도 치기 어린 청년이 되는 듯했다.
남궁진천이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안도가 되었고, 그간 어깨 위를 누르던 무거운 짐들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저, 정말 아버지께서 구천엽을 죽이신 것입니까? 그리고 혈교와 관계가 있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잠시 재회의 기쁨을 나누던 남궁명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남궁진천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걸렸다.
“명아, 너는 이 아비를 믿느냐?”
“물론입니다!”
남궁명이 정색을 했다.
세상이 뭐래도 남궁세가서는 남궁진천이 신과 같은 존재였다.
그를 믿지 못하면 누구를 믿겠는가.
잠시 남궁명을 지긋이 바라보던 남궁진천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번에 이 아비가 전정한 힘을 얻었느니라.”
남궁명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남궁진천은 자신의 질문을 부정하지 않았다.
게다가 진정한 힘을 얻었다는 말이 왠지 불안했다.
“서, 설마 아버지께서 진정 혈교와…….”
“아니, 혈교 따위와는 상관이 없다!”
남궁진천의 입가에 미소가 짙어졌다.
“혈교 나부랭이들은 그저 이 힘을 제대로 쓰지 못했던 어리석은 버러지들일 뿐이다.”
안도의 한숨을 쉬던 남궁명의 얼굴이 다시 딱딱하게 굳었다.
“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내가 얻은 힘은 세상을 새롭게 바꿀 힘이다.”
남궁진천의 두 눈이 빛을 발했다.
하지만 남궁명의 마음은 더욱 불안해졌다.
‘세상을 새롭게 바꿀 힘이라니…….’
자칫 지금의 명나라를 지우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겠다는 소리로 들릴 수도 있는 위험한 이야기였다.
‘대체 아버님은 무슨 생각을 하시는 것인가?’
“후후후, 그리 불안해하지 말거라. 우리 세가가 이 힘을 얻게 되면 그 누구도 건드릴 수 없을 것이다!”
남궁진천의 두 눈에 혈광이 어렸다.
서늘한 기운이 가주전을 가득 채웠다.
“서, 설마 그 힘이라는 것이 흡혈마공을 말씀하시는 것은 아니겠지요?”
남궁명의 표정이 얼어붙었다.
남궁진천에게 느껴지는 기운이 사이했기 때문이다.
“쯧쯧, 흡혈마공이라는 것은 어리석은 정파 인사들이 만들어 낸 정체불명의 술법이다. 내가 얻은 힘은 혈신대법이라는 것이다. 이 대법은 불완전한 인간을 신으로 만들어 주는 그야말로 놀라운 신술(神術)이니라.”
남궁명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어졌다.
혈신대법이란 이름만 들어도 그것이 결코 정도의 것이 아니란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들 남궁린이 혈교와 연계되어 가문에 심대한 타격을 입힌 것도 모자라 이젠 아버지인 남궁진천마저 마공에 손을 대다니, 남궁명은 도무지 지금 이 상황을 믿을 수 없었다.
자신의 눈앞에 있는 이가 진정 아버지 남궁진천이 맞는지 의심이 될 정도였다.
남궁진천이 비록 성정이 패도적이고 야망이 큰 이였으나, 사마(邪魔)의 무리를 척결하는 데는 항상 먼저 앞장서고, 결코 용서가 없던 인물이었다.
한데 그랬던 남궁진천이 갑자기 마공에 손을 대다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버지, 린이가 마공에 손을 댄 일로 가문이 강호의 큰 지탄을 받지 않았습니까? 한데, 어찌 또 세가에 마공을 끌어들인단 말씀이십니까?”
“쯧쯧.”
남궁진천이 다시 한 번 혀를 찼다.
“어리석은 녀석. 무엇이 마공이란 말이냐? 혈신대법이야 말로 천하의 신공이니라. 아니, 마공이라 한들 어떻단 말이냐? 지금 세가의 상황이 찬밥 더운밥 가릴 때더냐? 어차피 남궁세가는 더 내려갈 곳이 없지 않더냐? 무인들은 손가락질 하고, 황실은 봉문하라 압박하지. 게다가 진운룡이라는 강적이 언제 세가를 노릴지 모르는 상황이다. 이것저것 따지다가는 세가는 풍비박산이 나서 가솔들은 모두 죽거나 뿔뿔이 흩어지고 말 것이다!”
남궁진천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한데, 네놈은 겨우 마공이네, 정도네 들먹여 가며 손에 들어온 강력한 힘을 내팽개치려는 것이냐? 그러고도 네놈이 세가의 가주라 할 수 있느냐!”
남궁명은 갈등에 빠졌다.
남궁진천의 말을 따를 것인가 말 것인가의 갈등이 아니었다.
아무리 남궁세가가 더는 떨어질 곳이 없을 만큼 추락했다 하나, 세가를 처음 세운 이후로 대대로 협의를 추구해온 정도의 대표 가문이었다.
결코 사마와 타협할 수는 없는 것이다.
대체 왜 자신의 아버지가 이렇게 변했고, 세가가 여기까지 내려앉게 되었는지 답답하고 참담했다.
이제 남궁진천과 세가를 어떻게 처리해야 한단 말인가.
남궁진천의 입가에 조소가 일었다.
남궁명의 표정에서 자신의 말에 대한 반발을 읽을 수 있었다.
“고집스러운 놈.”
남궁진천의 목소리에 서늘한 살기가 어렸다.
“아, 아버지…….”
남궁명이 놀란 눈으로 남궁진천을 바라봤다.
어느새 남궁진천의 오른손이 남궁명의 왼쪽 가슴을 꿰뚫고 있었다.
“그냥 내 말에 따랐으면 좀 더 쉬웠을 것을, 일을 복잡하게 만드는구나.”
씨익 웃는 남궁진천의 두 눈에서 혈광이 가득 뿜어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