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4
/혈룡전 6권 (144화)
5장 돌아온 남궁진천 (3)/
“으음…….”
도중문은 어둠 속에서 눈을 떴다.
그는 불빛 하나 없는 공간에 자신이 누워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는 암흑 속에서도 사물을 분간할 수 있을 정도의 고수였다.
정신을 집중하고 감각을 끌어올리자 주변의 풍경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곳은 사방 십여 장 정도에 이르는 원형의 석실이었다.
석실에는 진한 피 냄새가 배어 있었다.
“일어났느냐?”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도중문은 깜짝 놀라 자신도 모르게 헛바람을 들이켰다.
분명 석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의 감각에 느껴지는 사람은 없었다.
한데 목소리가 바로 자신의 옆에서 들려온 것이다.
그것은 상대가 귀신이거나, 아니면 자신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고수라는 이야기였다.
그의 머릿속에 한 인물이 떠올랐다.
“복면인?”
진운룡에게 중상을 입은 자신을 구했던 정체불명의 복면인.
그의 어깨에 얹혀 가는 동안 의식을 잃었다.
아마도 그가 자신을 이곳으로 데려왔을 것이다.
“다, 당신은 왜 나를 구한 것인가?”
자기도 모르게 조심스러운 말투가 나왔다.
어느새 복면인의 기운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단지 존재감을 드러냈을 뿐인데 그것만으로도 도중문의 심령을 뒤흔들고 있었다.
“아직은 네가 죽을 때가 아니기 때문이니라.”
복면인은 순순히 도중문의 물음에 답해줬다.
하지만 그의 대답은 너무 모호했다.
“대체 당신은 누구인가?”
그는 복면인이 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진하게 느껴지는 존재감과는 달리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것이 더욱 도중문을 두렵게 했다.
“너에게 혈신대법을 알려준 사람이지.”
도중문의 인상이 구겨졌다.
“무슨 헛소리!”
혈신대법을 알려주다니 말도 되지 않는 소리였다.
혈신대법은 누구에게 배운 것이 아니라 자신이 우연히 비급을 발견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본디 도중문은 선문의 도인이었다.
선문의 도사들은 세상과 단절한 채, 신선이 되기 위해 수도정진을 하기에 이 세상에는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
그렇기에 주로 인적이 닿지 않는 깊은 산중에서 수련을 하는데, 도중문 역시 하남에 있는 천중산 깊은 동굴에서 수련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 도중문은 벽곡단 재료를 채집하기 위해 거처를 나섰다가 갑자기 내려앉은 지반에 의해 생긴 구덩이에 떨어지고 말았다.
한데 그곳엔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석굴이 있었고, 그 한 가운데 놓인 석탁(石托)위의 목함 속에 혈신대법 비급이 놓여 있던 것이다.
도를 추구하는 그로서는 처음 혈신대법 비급을 접했을 때 당연하게도 거부감을 가졌다.
그런데 그 내용을 읽은 순간, 자신도 모르게 빠져들고 말았다.
그 안에는 그가 그동안 막혀 있던 벽을 허물 열쇠가 들어 있었다.
불로불사, 영생에 이르는 도에 대한 모든 것.
인간을 제물로 바쳐야 한다는 사실이 걸리긴 했으나, 그것을 제외한다면 혈신대법은 마도가 아닌 선도의 비서였다.
한마디로 등선을 하지 않고, 살아서 신선에 이르는 길을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세상 모든 사람이 이 길을 따른다면, 곧 이곳 중원 땅이 무릉도원이 될 터였다.
도중문은 자신도 모르게 혈신대법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혼자 비급을 익히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혼신의 힘을 다한 연구와 수많은 실험 끝에 셀 수 없이 죽을 고비를 넘기며 지금에 이른 것이다.
한데 복면인은 지금 그것을 자신이 알려줬다고 하고 있었다.
“말도 되지 않는 소리다!”
도중문이 코웃음을 쳤다.
“네가 비급을 얻은 것이 진정 우연이라고 보느냐?”
복면인의 말에 도중문이 멈칫했다.
“분명 우연이었다! 내가 벽곡단을 찾으러 나섰다가 우연히 그 구덩이에 떨어지지 않았다면…….”
도중문의 말을 끊으며 복면인이 말했다.
“나는 오랫동안 너를 지켜보았느니라. 과연 네가 혈신대법을 얻을 자격이 되는지 십 년이 넘게 너를 관찰했지. 선문의 도사였던 네가 천중산 그 동굴에 있는 동안 쭉 지켜보았단 말이다.”
도중문의 동공이 팽창했다.
복면인이 어떻게 자신의 출신을 알고 있단 말인가.
게다가 그가 어디서 수련을 했는지까지 알고 있었다.
“십 년을 지켜본 끝에 나는 네가 혈신대법을 익히기에 적합한 성정과 자질을 지녔음을 확신했다. 그리고 우연을 가장해 네 손에 비급이 가도록 했지.”
도중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기에 강한 거부감이 들었지만, 그는 복면인의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도중문을 관찰하고 선택해서 혈신대법의 비급을 전해준 자…….
도중문의 머릿속에 한 인물이 떠올랐다.
강호에 처음 혈신대법이 나타난 오래전 전설이 된 마두.
혈교를 창설하고 강호를 자신의 발아래 두었던 인물.
“그렇다면 당신은 혈마인가?”
혈마는 어느 날 갑자기 실종되었다고 전해진다.
만일 혈마가 혈신대법을 완성해 진정한 혈신의 경지에 이르렀다면.
그는 불사의 존재가 되었을 것이고, 지금 눈앞의 복면인이 혈마라 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그 강력한 힘과 위압감, 혈신대법을 알고 있는 점, 복면인이 혈마라면 모든 것이 설명되었다.
“나는 혈마가 아니다.”
하지만 복면인은 도중문의 추측을 부인했다.
동시에 석실 안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절로 고개가 숙여질 만큼 엄숙하고 경건한 무게감 속에서 복면인의 목소리가 조용히 들려왔다.
“내가 바로 혈신대법을 창조하고 너희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준 존재이니라.”
* * *
진운룡 일행은 아직 무한에 머무르고 있었다.
하오문도 도중문의 소재를 파악해 내지 못했고, 복면인의 정체는 더욱 오리무중이었다.
당장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기에 복면인이 연락해 오기만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일행은 하오문에서 운영하는 무풍객잔에서 머물고 있는데, 혹여 복면인에 대한 소식이나 도중문의 흔적을 발견하게 되면 바로 움직일 수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진운룡과 소은설은 대부분의 시간을 혈신대법을 연구하는데 집중했다.
소은설―제갈여령은 예전에도 진운룡과 함께 반 년 가까이 혈신대법을 연구 했기에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그녀는 천재들이 많다는 제갈세가에서도 가장 뛰어난 머리를 가지고 있었다.
진운룡이 알지 못했던 사실을 발견해낸 것도 그녀였다.
물론 별다른 자료가 없는 지금으로서는 새로운 것을 알아낼 가능성은 적으나, 아무것도 안하고 무작정 복면인만 기다리고 있는 것보다는 나았다.
두 사람이 한창 혈신대법에 대한 정보들을 정리하고 있는데, 갑자기 구학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 공자님!”
진운룡과 소은설이 무슨 일인가 하여 의아한 얼굴로 방문을 열었다.
“무슨 일이냐?”
급히 달려왔는지 구학이 잠시 숨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
“황보가주님과 화산 장문 무진자 어르신이 공자님을 뵈러 찾아왔습니다.”
“그들이 무슨 일로?”
진운룡이 귀찮다는 듯 물었다.
황보혁군과는 그럭저럭 괜찮은 관계였기에 마냥 무시할 수는 없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한데 표정이 심상치 않아 보였습니다.”
아무래도 결국 만나봐야 용건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가자.”
진운룡은 구학을 앞세우고 앞마당 쪽에 있는 접객실로 향했다.
그곳에는 황보혁군과 무진자가 불안한 표정으로 의자에 앉지도 않은 채 서성이고 있었다.
“진 공자!”
진운룡이 들어서자 황보혁군의 얼굴이 밝아졌다.
“오랜만이오.”
진운룡은 전처럼 굳이 말을 높이지 않았다.
이미 자신의 정체가 어느 정도 알려진 상태였기에 더는 귀찮음을 감수하며 다른 이들을 신경 쓸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반갑소이다. 화산의 새로운 장문 무진자라 하오.”
무진자가 자신을 소개했다.
“진운룡이오.”
덤덤하게 무진자의 인사를 받은 진운룡이 황보혁군을 응시했다.
“그래, 무슨 일로 나를 찾아온 것이오?”
황보혁군이 잠시 머뭇거렸다.
무림맹주 남궁진천이 진운룡에게 저지른 일들을 생각하면 염치없는 부탁을 하는 셈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염치를 따질 상황이 아니었기에 심호흡을 한 번 내쉰 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실은…… 진 공자께 염치 불구하고 부탁을 좀 드리러 왔소이다.”
황보혁군의 태도에 진운룡은 그들이 자신에게 도움을 청하려 한다는 것을 눈치챘다.
‘동창을 상대해 달라는 것인가?’
당장에 생각나는 것은 그것밖에 없었다.
황제의 칙령으로 벼랑 끝에 몰린 정도 무림으로서는 도중문을 무릎 꿇린 진운룡을 앞세워 동창을 압박하는 방법이야말로 최고의 선택이었다.
한데 황보혁군의 입에서 나온 말은 진운룡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남궁진천, 그자가 나타났소이다.”
진운룡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놈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렇소이다. 게다가 그자가 아무래도 혈교의 마공을 익힌 것 같소이다.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져서 돌아왔소.”
그것은 이미 구천엽의 시신을 보고 예상했던 바다.
아마도 숨어 있는 동안 혈신대법을 또 시도했을 테고, 그만큼 강해졌을 것이다.
“그자가 지금 황제에게 죄를 묻겠다고 날뛰고 있소이다! 게다가 자신을 따르지 않는 문파들을 모두 몰살시키겠다 하고 있소! 만일 그자를 그냥 놔둔다면 강호 무림뿐 아니라 이 나라 전체가 혈겁에 빠질 것이오!”
무진자가 격분해서 목소리를 높였다.
“부탁드리오. 진 공자가 그자를 막지 않으면 현재 누구도 그자를 막을 수 있는 이가 없소.”
황보혁군이 간절한 표정으로 진운룡을 바라봤다.
진운룡이 생각에 잠겼다.
정도 무림에 도움을 주는 것은 그다지 내키지 않았으나 복면인만 기다리던 그에게 남궁진천의 등장은 새로운 실마리를 찾을 기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