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7
/혈룡전 6권 (147화)
6장 납치 (2)/
소 소저에게는 아무런 위해도 가하지 않을 것이다.
보름 후 정오, 동정호(洞庭湖) 군산(君山)으로 오거라.
일방적인 통보였다.
하지만 진운룡으로서는 놈의 요청에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소은설의 안전도 걱정이었으나, 당장에 놈을 추격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군산이라…….”
보름 후면 복면인의 정체, 혈신대법의 배후, 자신의 저주를 풀 방법 등 모든 것이 명확해질 것이다.
진운룡의 눈빛이 깊어졌다.
* * *
동정호 군산(君山).
순임금의 죽음을 슬퍼하던 두 비(妃)의 눈물 자국이 얼룩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는 반죽(斑竹)과 황제에게 진상되는 군산은침차(君山銀鍼茶)로 유명한 동정호 가운데 위치한 작은 섬.
수려한 풍광과 수많은 전설, 신화들이 얽혀 예로부터 내로라하는 시인, 묵객들의 단골 소재로 오르내리던 곳.
부슬부슬 비가 내리는 가운데 군산 외곽에 작은 배 한 척이 멈춰 섰다.
두 명의 사내가 배에서 내렸다.
아름다운 여인을 보는 듯한 수려한 외모의 사내와 그 조금 뒤쪽에서 따르고 있는 산발한 적발을 아무렇게나 늘어뜨린, 거칠어 보이는 사내였다.
그들의 정체는 바로 진운룡과 적산이었다.
어느새 복면인과의 약속 시간인 보름이 지나 이곳 군산에 도착한 것이다.
진운룡의 표정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적산 역시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소은설을 지켜내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얼굴이 무겁게 굳어 있었다.
군산은 동정호에서도 명소로 꼽히기에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하지만 오늘은 사람의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쥐죽은 듯 고요했다.
진운룡은 기감을 확장시켜 복면인과 소은설의 흔적을 찾았다.
파문을 그리며 퍼진 그의 기운이 고요한 군산도를 훑었다.
댓잎에 튀는 빗방울, 그 사이사이로 스쳐 지나가는 바람, 새와 작은 짐승들, 벌레들의 움직임 하나하나까지 놓치지 않고 살폈다.
하지만 소은설의 기척은 쉽게 잡히지 않았다.
아마도 복면인이 무슨 수를 쓴 듯하다.
‘어차피 이곳으로 날 불렀으니 곧 얼굴을 드러낼 터.’
진운룡은 조급하게 서두르지 않았다.
그를 이곳에 초대한 것은 복면인이었다.
준비된 함정이든, 아니면 복면인의 말대로 진실을 밝히기 위한 것이든, 결국 진운룡은 복면인과 얼굴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진운룡과 적산이 천천히 군산도 안쪽을 향해 걸어갔다.
“주군, 그 교활한 놈이 함정을 파놓고 기다릴 것이 분명하오.”
적산이 입술을 비죽거리며 말했다.
복면인을 향한 적의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복면인이 무슨 수를 써서 자신을 제압했는지 보지도 못했다.
그렇기에 복면인의 능력이 무섭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자가 함정까지 파고 기다린다면 아무리 대단한 진운룡이라 해도 승부를 장담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진운룡은 아무런 대답도 없이 묵묵히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설사 함정이 기다리고 있다 하더라도 진운룡으로서는 걸음을 늦출 수 없었다.
소은설을 구해내야 함은 물론이고, 혈신대법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해서라도 더더욱 놈을 만나야 했다.
두 사람이 용궁의 입구라고 전해져 내려오는 우물, 유의정을 막 지날 때였다.
―대나무 숲으로 오거라.
육합전성과 비슷한 울림이 군산도 전체를 흔들었다.
“놈이오!”
적산이 눈에 불을 켜며 소리쳤다.
동시에 진운룡의 발걸음도 빨라졌다.
두 사람은 곧장 대숲을 향했다.
이곳 군산에서 자라고 있는 대나무는 반죽(斑竹)이라 불리는데, 특이하게도 표면에 검은 얼룩이 있다.
전설에 의하면 신화의 시대인 요순시대에 순 임금의 두 비(妃)가 자신들의 지아비가 죽은 것을 알고 대나무를 붙들고 통곡을 하다가 결국 스스로 물속에 몸을 던졌는데, 그때 흘린 눈물 자국이 반죽 표면의 얼룩이 되었다 한다.
그러나 애잔한 전설을 품고 있는 대숲은 지금은 생기가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스산한 공간으로 변해 있었다.
대숲 앞에 걸음을 멈춘 진운룡이 적산을 멈춰 세웠다.
“무슨 일이오?”
적산이 긴장한 얼굴로 물었다.
진운룡이 아무 이유도 없이 자신을 멈춰 세웠을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복면인이 대숲에 무슨 수작을 펼쳐 놓았을 가능성이 높았다.
아니나 다를까.
“진법이다.”
진운룡이 나직이 말했다.
대나무 숲에는 진법이 펼쳐져 있었다.
복면인과 소은설의 기척을 느끼지 못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빌어먹을 놈!‘
적산이 이를 갈았다.
납치나 일삼는 놈이니, 결국 하는 짓은 기대를 벗어나지 않았다.
“어떻게 할 거요?”
진운룡은 말없이 대숲에 펼쳐진 진을 파악했다.
일단 이곳에 펼쳐진 진이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는지 확인해야 어떻게 할 것인지 대응책을 마련할 수 있었다.
물론 어지간한 진은 그냥 힘으로 부숴 버리는 진운룡이었으나, 혹여 진과 소은설이 연결되어 있다면 진에 충격이 가해질 경우 그녀가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진운룡은 조심스럽게 진을 향해 기운을 흘려보냈다.
하지만 진운룡의 기운은 마치 물과 기름처럼 진의 표면을 미끄러질 뿐, 안으로 파고들지 못했다.
억지로 밀어 넣으려면 그렇게 할 수 있었으나, 역시 그것은 위험했다.
일단 진은 외부의 기운을 차단하고 있고, 내부의 기운 또한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막고 있는 듯했다.
진운룡의 미간에 주름이 일었다.
이 상태라면 기운을 흘려 진의 상태를 확인하려던 계획도 의미가 없어진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몸으로 직접 확인해 보는 방법뿐이었다.
―그저 기운을 차단하는 진일 뿐이니라. 안으로 들어오너라.
그때 복면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또 놈이오!”
적산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잠시 대나무 숲을 응시하던 진운룡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저런 놈의 말을 믿는 거요? 주군?”
적산이 진운룡을 말렸다.
하지만 진운룡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진운룡이 느끼기에도 이곳에 펼쳐진 진은 그다지 위협적으로 보이진 않았다.
복면인이 수작을 부리려 했다면 이깟 진 따위가 아닌, 다른 술수를 썼을 것이다.
분신술까지 사용했던 그의 능력이라면 좀 더 강력한 진이나 술법을 펼칠 수 있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차피 지금으로선 복면인의 말을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진의 경계를 통과하는 순간, 마치 물속을 걷는 듯 육신의 무게가 사라졌다가 안쪽으로 발을 디딤과 동시에 다시 정상적인 감각이 돌아왔다.
낯선 감각에 적산이 눈살을 찌푸렸다.
복면인의 말대로 진은 두 사람에게 별다른 위해를 끼치지 않았다.
경계에 펼쳐진 진은 마치 얇은 막처럼 대나무 숲을 덮고 있고, 그 안쪽은 아무런 인위적 조작의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단지 그 안에서 세 개의 강력한 기운과 하나의 평범한 기운이 느껴졌다.
‘여령!’
진운룡은 평범한 기운이 소은설의 것임을 확인했다.
그녀의 기운을 그가 모를 리 없었다.
“주군, 강한 놈들이 있는 것 같소!”
적산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세 개의 강력한 기운을 적산도 느낀 것이다.
진운룡은 그것이 누구의 것인지 대충 짐작이 되었다.
은은하면서도 단단하며 모든 것을 삼킬 듯하지만, 고요하고 묘한 기운의 주인공은 복면인일 것이다.
‘나머지 두 사람은 남궁진천과 도중문인가?’
복면인이 그 두 사람을 납치했으니 아마도 지금 느껴지는 기운은 남궁진천과 도중문의 것일 터였다.
한데 그 기운이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져 있었다.
‘어떻게 된 것인가?’
진운룡의 눈에 의문이 어렸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대체 복면인이 그들에게 무슨 수작을 부린 것인지, 두 사람은 전과는 차원이 다른 기세를 뿜어내고 있었다.
‘어차피 이리로 오고 있군.’
모든 의문은 직접 확인해 보면 될 일이었다.
곧이어 대숲 사이로 네 인형이 모습을 드러냈다.
예상했던 대로 복면인과 남궁진천, 도중문이었다.
소은설은 의식을 잃은 채 복면인의 오른쪽에 서 있었다.
그녀의 발은 땅에서 한 치 정도 떠올라 있었는데, 아마도 복면인이 그녀를 허공에 띄운 상태인 듯했다.
진운룡은 먼저 소은설의 상태를 살폈다.
호흡이 고르고 몸에도 별다른 상처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복면인이 약속대로 아무런 위해도 가하지 않은 듯했다.
“반갑구나.”
복면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전과 같이 부드럽고 다정했다.
“허…… 지금 누가 반갑다는 것이냐?”
적산이 어이없는 얼굴로 반문했다.
도중문과 남궁진천을 구했고, 진운룡이 없는 틈을 타서 소은설까지 납치해 놓고 마치 친근한 친우나 가족을 대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는 복면인의 모습이 어이가 없었던 것이다.
“헛소리는 집어치우고 그 뻔뻔한 낯짝이나 까보거라!”
복면인의 시선이 적산을 향했다.
순간 한 줄기 서늘한 기운이 적산의 온몸을 옭아맸다.
그저 눈을 마주했을 뿐인데 적산은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고, 숨 쉬는 것조차도 힘들었다.
“어린놈이 입이 거칠구나.”
적산은 이를 악물고 복면인의 기운을 떨쳐내려 애썼다.
하지만 단단한 벽처럼 복면인의 기운은 적산의 사방을 둘러싼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때, 진운룡에게서 한 줄기 미풍이 일어 적산을 훑고 지나갔다.
동시에 적산을 옭아매던 복면인의 기운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허억……!”
그제야 적산이 막혔던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잠시 두 눈에 이채를 떠올린 복면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야 이제 내 정체를 밝힐 때가 되긴 했구나.”
복면인이 천천히 자신의 복면을 벗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