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8
/혈룡전 6권 (148화)
6장 납치 (3)/
“네, 네놈은!”
순간 적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복면인의 정체를 확인한 진운룡 역시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곽지량…….”
복면 안에 드러난 얼굴의 주인공은 바로 하오문주 곽지량이었기 때문이다.
그제야 그간 진운룡의 동선과 정확하게 맞물려 있던 복면인의 움직임이 이해가 되었다.
진운룡이 정보를 얻던 곳이 바로 하오문이었기에 곽지량은 진운룡이 언제, 어디로 움직이는지 가장 잘 알고 있는 자였다.
또한 일행이 머문 곳도 대부분 하오문에서 마련해 준 곳이기에, 그간 곽지량의 손바닥 안에서 놀아난 셈이었다.
“놀랐느냐?”
곽지량이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를 띠운 채 물었다.
그의 모습은 하오문에서 보았던 그것과 같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전혀 달라져 있었다.
먼저 조금 가볍고 노회한 상인 같던 목소리는 나직하면서도 굵고 위엄이 깃들어 있어 목소리만 듣고는 곽지량임을 전혀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바뀌어 있었다.
얼굴 모습도 그러했다.
이목구비는 같은 사람임이 분명함에도 느껴지는 분위기와 기세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어차피 생김새라는 것은 나에게 무의미하다만, 네가 알아보기 쉽도록 하기 위해 하오문주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했다.”
곽지량의 말투에서 묘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하오문주의 모습을 유지했다는 말은 곧 하오문주가 본인의 진짜 정체가 아니라는 뜻도 내포하고 있었다.
“애초부터 하오문을 장악했던 것인가? 아니면 하오문주의 껍데기를 뒤집어 쓴 것인가?”
진운룡이 물었다.
“허허, 그게 뭐 그리 중요하더냐? 하오문 따위야 내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손에 쥐고 흔들 수 있는 곳이거늘. 하지만 곽지량이 내 본명임은 분명하다.”
이야기하는 것을 보아 아마도 처음부터 하오문을 장악해 하오문주가 된 듯했다.
하기야 남궁진천과 도중문을 배후에서 조종하며 음모를 꾸미려면 정보가 중요했을 것이다.
세상의 정보를 얻기 위해서는 하오문만 한 곳이 없었다.
진운룡은 곽지량의 목소리와 몸에서 풍겨 나오는 기도에서 그 끝을 알 수 없는 세월의 흔적을 느꼈다.
아마도 곽지량은 진운룡 자신보다 훨씬 오랜 세월을 살아온 듯했다.
곽지량에게서는 궁극의 깨달음을 얻은 자에게서만 찾을 수 있는, 모든 것을 가라앉히는 심연 같은 고요를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잔물결 하나도 일지 않는 호수의 표면과 같이, 곽지량은 잔잔하면서도 그 깊이를 측량할 수 없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곽지량을 응시하던 진운룡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소은설은?”
물론 그는 소은설이 지금 곽지량의 옆에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묻고 있는 것은 소은설의 정확한 상태와 복면인이 그녀를 이곳으로 데려온 목적이었다.
“이 아이는 안전하다.”
“그녀를 보내라.”
“안타깝지만 아직은 안 되느니라. 이 아이는 오늘 만남의 아주 중요한 열쇠이기 때문이다.”
복면인의 말을 들은 진운룡의 머릿속에 한 가지 기억이 떠올랐다.
‘열쇠……!’
소은설의 기억 속에 있던, 자신의 혼을 이승으로 불러온 자가 했던 말. 그자 역시 소은설―제갈여령이 새로운 세상의 중요한 열쇠라고 했었다.
“여령의 혼을 이승에 불러온 것이 너였군.”
곽지량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일었다.
“그렇다. 내가 이 아이를 다시 이 세상으로 데려왔지. 너는 오히려 내게 고마워해야 하지 않느냐?”
진운룡의 눈썹이 꿈틀했다.
“이미 저승에서 평안을 얻었어야 할 혼령을 함부로 이승에 붙잡아 둔 것은 하늘의 이치를 거스르는 일이거늘, 인간이 어찌 하늘을 거스르려 하는가?”
진운룡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인간? 너는 내가 인간으로 보이느냐?”
곽지량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짙어졌다.
진운룡은 차갑게 곽지량을 노려볼 뿐,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이미 수백 년 전에 인간의 굴레를 벗었느니라. 너도 마찬가지이지 않느냐?”
진운룡과 곽지량의 시선이 마주쳤다.
차갑게 얼어붙은 진운룡의 시선과 달리 곽지량의 눈빛은 그 안에서 한 줄기 작은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진운룡은 자신의 예상이 맞았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복면인은 궁극의 깨달음을 얻은 자다.
본래는 이미 등선을 해야 했지만, 무슨 이유인지 진운룡처럼 아직 세상에 남아 있는 것이다.
“그녀를 잡아둔 목적이 무엇인가?”
“흠…….”
곽지량이 무언가를 정리하는 듯, 턱을 어루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무척 긴 이야기가 되겠군. 하지만 어차피 오늘 너와 여기 이 두 아이에게 진실을 알게 해줄 생각이었으니, 조금 시간이 걸리더라도 모두 이야기하도록 하마.”
그때까지도 남궁진천과 도중문은 별다른 움직임 없이 우두커니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그렇다고 곽지량이 특별히 금제를 가한 것 같지는 않았다.
곽지량이 말을 이었다.
“나 역시 오래전부터 신선의 길을 걸었다. 그리고 결국 그 끝에 이르렀지.”
이것까지는 진운룡의 예상과 같았다.
“네가 알지 모르겠으나, 마지막 등선의 순간이 되면 온 세상을 관조할 수 있게 된다.”
등선이란 곧 인간의 껍질을 벗고 신이 되는 것이다.
신은 세상만사(世上萬事) 우주만물(宇宙萬物)을 관조할 수 있다.
때문에 등선의 순간에 곽지량은 세상 모든 것을 심안(心眼)을 통해 관조할 수 있었다.
모든 인간들의 삶과 죽음, 생로병사(生老病死), 희로애락(喜怒哀樂)이 그의 심안에 들어왔다.
그 안에서 느껴지는 기쁨, 행복, 사랑, 쾌락, 분노, 슬픔, 고통, 두려움, 악의, 탐욕의 정제되지 않은 날것 같은 감정들이 그의 혼을 관통했다.
그 순간 곽지량의 마음속에 한 줄기 의문이 일었다.
이미 인간의 틀을 벗어나 속세의 오욕칠정을 벗어난 그였지만, 그 의문을 쉽게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그것은 바로 왜 모든 인간이 나와 같이 깨달음을 얻고 신이 될 수 없는 것인가였다. 아니, 왜 굳이 수십 년의 수도를 통해 깨달음을 얻은 극소수의 인간만이 신이 되는가다.”
어찌 보면 조금은 황당한 의문일 수도 있었다.
모든 인간이 신이 되다니, 누군가 이 이야기를 들었다면 곽지량은 분명 큰 웃음거리가 되었을 것이다.
“세상 모든 이가 신이 된다면 오욕칠정에 휘둘려 서로 죽고 죽이고, 남의 것을 빼앗고,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짓밟는 일도 없을 것이며, 전쟁이나 질병, 굶어죽는 이도 없을 것이다. 극락이나 무릉도원에 가지 않아도 이 세상이 곧 극락이고 무릉도원이 될 것이 아니겠느냐?”
곽지량이 두 눈을 빛내며 말했다.
“한데 왜 모든 인간은 진흙탕 같은 속세에서 뒹구는, 의미 없는 삶을 반복하는 것일까? 왜 나와 너처럼 신의 길에 도달하는 자들이 고금을 통틀어 열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적은 것일까?”
진운룡을 바라보며 질문을 던진 곽지량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말을 이었다.
“아무리 선도에 평생 몸을 담은 자라 해도 그중 최종 극의에 이르는 자는 극소수에 불과하지. 하니 모든 인간들이 도를 닦고, 수도를 한다 해도 결국 대부분의 인간들은 그 길의 끝을 볼 수 없을 것이다.”
물론 모든 이가 도를 닦거나 수련을 한다면 세상이 제대로 돌아갈 리도 없었다.
“어찌 보면 결국 대부분의 인간은 애초에 신이 될 수 없다는 이야기나 마찬가지지.”
조금은 괴변으로 들리는 곽지량의 말을 진운룡은 묵묵히 들었다. 그 끝에 진실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곽지량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다른 사람들은 아마도 이렇게 생각하겠지. 아무나 신이 된다면 어찌 신이라 하겠느냐. 그만큼 노력하고, 기연을 얻고, 수행을 하고, 덕을 쌓아 깨달음을 얻어야만 신이 될 자격이 있다고.”
곽지량의 눈썹이 위로 치켜 올라갔다.
“하지만, 그게 왜 안 되는 것이더냐? 아무나 신이 될 수 있으면 어때서? 그것이야 말로 세상을 낙원으로 만들 궁극의 방법이 아니더냐? 평생 도를 닦지 않아도, 오욕칠정을 버리고 속세와 담을 쌓지 않아도, 스스로를 자학하고 고통 속에 빠뜨리지 않아도 모든 이가 신이 될 수 있는 세상!”
곽지량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그것이야 말로 완전한 세상이고, 낙원이며, 무릉도원이 아니더냐!”
대숲을 쩌렁쩌렁 물리며 곽지량의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잠시 석상처럼 우뚝 서서 진운룡을 응시하던 곽지량의 표정이 다시 부드러워졌다.
“해서, 나는 이 가련한 운명에 얽매인 인간들을 구하고 싶었다. 모두에게 신이 되는 길을 가르쳐 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 순간 끊임없이 참오하고 해답을 구하려 애썼다. 찰나의 시간이 영겁처럼 느껴지던 그때, 나는 결국 해답을 얻어냈다.”
곽지량의 두 눈이 깊게 침잠했다.
순간, 그와 그 주변은 절대적인 고요가 찾아왔다.
적산도, 남궁진천과 도중문도 곽지량의 목소리에 홀린 듯 집중하고 있었다.
그것은 자신의 의지와 다른, 마치 신의 의지를 받아들이는 신도의 자세와 같은 것이었다.
그들의 눈빛은 무언가에 취한 듯 몽롱해져 있었다.
그 순간만큼은 곽지량이 바로 신이었고, 절대자였다.
그 속에서 오로지 진운룡만이 색채를 지닌 유일한 존재인 듯 오롯이 서 있었다.
진운룡이 적산의 앞을 막아서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적산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털어냈다.
“너는 밖에서 기다리거라.”
진운룡이 공력이 어린 목소리로 적산에게 말했다.
무어라 반발하려던 적산은 진운룡의 두 눈을 마주한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진운룡의 눈빛에는 적산이 감히 거스를 수 없는 위엄이 담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금 상황에서 그가 남아 있으면 진운룡에게 오히려 짐이 된다는 사실을 적산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아쉽고 분하지만 진운룡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이를 악문 채 곽지량을 한 번 노려본 적산이 그대로 몸을 돌려 숲을 빠져나갔다.
곽지량은 적산이 숲을 빠져나가는 것을 무심하게 바라봤다.
마치 적산 정도는 관심을 둘 가치조차 없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적산의 모습이 사라지자 곽지량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인간이 신이 될 수 없는 이유가 인간이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인간 자체가 애초에 잘못되어 있었던 것이다. 처음부터 그 그릇이 간장 종지처럼 작게 만들어진 것이다.”
그래서 곽지량이 생각해낸 방법은 바로 인간 자체의 개조였다.
“불완전한 인간을 개조해 완전한 존재로 만든다면, 모든 인간이 신에 도달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렇다면 이 세상이 곧 낙원이 되고 극락이 되지 않겠느냐?”
“그래서 만든 게 혈신대법인가?”
진운룡이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하니라.”
곽지량이 마치 스스로의 업적이 자랑스럽다는 듯 만족스로운 웃음을 가득 머금은 채 대답했다.
“불로불사의 완전한 인간을, 아니 새로운 종을 만들어 내는 것이 바로 혈신대법이지. 생명의 비밀을 품고 있는 피야말로 가장 성스럽고 완전한 존재. 나는 인간의 피에서 생명의 열쇠를 찾아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신이 되는 방법을 만들었다!”
그것이 바로 혈신대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