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이 프로그램을 사용할 시 현재 사용자가 원하는 스텟의 향상에 있어서 디버프가 적용되게 됩니다. 예를 들면 현재 사용자가 가장 갈망하는 힘 스텟의 향상속도가 30퍼센트 감소하게 됩니다.>
‘지금은 힘을 키우는 것이 가장 시급한데 성장속도가 감소 된다고? 조금 가혹한 조건인데 이걸 어떻게 하지?’
수혁은 앞으로 닥칠 조성준과의 일을 고려하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자 도움말은 그에게 조언을 해주었다.
<저는 받는 불이익과 이 프로그램에서 비롯되는 이득을 비교해보았을 때 프로그램 사용을 적극 권장합니다.>
‘아무리 그래도 30퍼센트나 디버프 되는 것은 나한테 너무 손해잖아?’
<다른 퀘스트를 완료함으로서 추후에 디버프가 해제될 수 있으니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리고 언어이해 프로그램은 사용자가 평생 사용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메리트가 훨씬 크다고 판단됩니다.>
‘그래? 하긴 외국어를 만능으로 할 수 있게 된다면 적어도 취업걱정은 안 해도 되는 엄청난 능력이잖아, 번역가나 통역가로서 활동도 가능하니까 말이야. 프로그램을 실행해줘.’
<만능언어이해 프로그램을 실행하겠습니다.>
그 순간 도움말은 꺼지고 화면에는 커다란 바모양의 진행 표시가 떴다.
<다운이 15퍼센트까지 진행되었습니다.>
프로그램이 다운로드 됨에 따라 진행상황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20분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다운로드가 완료 되었다.
<프로그램 다운로드가 모두 완료되었습니다. 앞으로 힘 스텟 향상에는 30퍼센트 디버프가 적용 됩니다.>
어플의 안내를 확인한 수혁은 프로그램이 제대로 작동되는지 알기 위해서 한 헌책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수많은 원문도서와 한문책들이 즐비하였고 수혁은 책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이거 생각보다 대단하잖아.’
수혁은 프로그램의 기능에 감탄을 했다. 그가 외국어로 된 책을 읽자 마치 한글을 읽을 때와 같은 익숙함이 느껴졌고 내용들이 모두 이해가 되었다. 이는 외국어를 머릿속에서 한국어로 바꾸던 과거와는 차원이 다른 기능이었다.
‘내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유용하다.’
수혁은 만능언어이해 프로그램의 기능에 압도되었고 좋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이것 말고도 이와 비슷한 좋은 프로그램들이 더 있을 수 있어, 한 번 알아봐야겠어, 활성화.’
수혁은 어플을 켠 다음 도움말을 클릭했다.
‘언어이해 프로그램과 같이 사용자에게 크게 도움이 될 만한 것이 무엇이 있을까?’
<본 프로그램은 사용자의 욕망과 염원 그리고 퀘스트 진행에 맞추어 프로그램을 제안하는 기능만 있을 뿐 무슨 프로그램이 있는지 저도 알지 못합니다.>
‘무슨 소리야? 알지 못한다면 그런 프로그램이 있는 줄 어떻게 알고 나한테 추천했어?’
수혁은 도움말의 설명에 황당해하며 물어보았다.
<엄밀히 말씀드리면 어플에 모든 프로그램이 이미 깔려있는 형태가 아닙니다.>
‘그러면?’
<말씀드렸듯이 사용자가 수행하는 퀘스트와 마음을 살폈을 때 깊이 염원하고 있는 것을 고려하여 필요한 프로그램이 패널티와 함께 생성되는 것입니다.>
‘흠 그럼, 내가 생각하지 않고 필요하지 않다고 인식하면 아무리 유용한 것이라도 생성이 안 될 수 있는 거네?’
<그렇게 이해하셔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수혁은 설명을 충분히 이해하였고 다른 프로그램을 찾는 것을 포기했다. 그는 어플을 종료한 뒤 본격적으로 책을 찾아보기로 했다.
‘그럼 다시 시작해볼까? 지금 시간이 3시, 그런데 헌책방들은 대부분 7시까지 영업을 하니까 남은 시간동안 다시 책을 뒤져보자.’
수혁은 새로운 헌책방을 비롯하여 이전에 가보았던 헌책방에서 의미를 알지 못해 지나쳤던 책들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언어적인 부분이 해결이 되니 이전에 알지 못했던 여러 가지 책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역시, 그냥 지나간 것들이 있었어.’
수혁은 그리스 시대에 유행했던 고대무술인 판크라스에 관련된 책부터 시작하여 원어로 된 펜싱교본과 레슬링 교본들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어떤 책을 읽어도 어플은 신호를 보내지 않았다. 시간은 흘러 해는 점점 저물어갔고 헌책방들은 문을 닫기 시작했다.
‘내일 다시 와야겠다. 아직 돌아보지 않은 헌책방들이 많이 있으니 찾을 수 있을 거야.’
헌책방 거리를 빠져나온 수혁은 집에 돌아와 휴식을 취한 뒤 잠에 들었다. 다음 날이 되자 그는 어제와 같은 일상을 반복했다. 헌책방에 들어가 책들을 모두 찾아보았고 혹시나 해서 책방사장들에게 비매용 도서를 보관하고 있는지 물어봤다.
“사장님, 혹시 지금 판매하려고 내놓은 책들 말고 보관하는 책들도 있나요?”
“사무실 안에 그냥 소장용으로 갖고 있는 책들도 있지.”
“혹시 제가 살펴봐도 될까요? 제가 원가의 몇 배를 지불해서 라도 돈을 많이 드릴 테니까 구경만 이라도 하게 해주세요.”
“팔지 않는 것들인데 구경 정도는 괜찮겠지 들어오게.”
수혁은 이런 식으로 사장들을 설득을 해서 내놓지 않은 책들까지 다 뒤져보았지만 격투기에 관련된 책은 아예 없었다. 서점 주인들이 소장보관하고 있는 책들은 대부분 고서였는데 옛 선비들이 쓴 시나 글들을 모아 놓은 서책들이었다.
‘이제 안 가본 헌책방도 몇 개 안 남았는데 큰일이다.’
이틀 날도 별 수확 없이 하루를 보낸 수혁은 3일째 되는 날도 허탕을 쳤고 시간을 보니 벌써 오후 5시 30분이었다.
‘그냥, 히든 퀘스트는 포기하고 내가 봤던 것 중 가장 괜찮은 것들을 추려내서 그것들만이라도 익혀야겠어. 이대로 가다가는 개학날까지 아무 대비도 못 할 거야.’
수혁은 눈여겨봤으나 그냥 지나친 서적들을 구매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여러 책방들을 들려 ‘무에타이’, ‘공수도’, ‘주짓수’, ‘레슬링’, ‘절권도’, ‘복싱’에 관한 책들을 샀다.
‘이 정도면 괜찮은 것 같아, 이제 집에 가서 책들을 빨리 읽어야겠어.’
수혁은 구매한 책들이 들어 있는 종이가방을 손에 쥐고 집으로 가려던 찰나에 무언가를 발견하고 발걸음을 멈췄다. 오후 7시가 넘은 시간 거리의 헌책방들은 모두 문이 닫혀있었는데 오래된 건물의 출입구 전등에 불이 켜져 있었다. 수혁은 호기심이 들어 그곳을 바라보았다.
‘저기는 그 카페사장이 말했던 칸타빌레잖아.’
늦은 시간이었음에도 건물 앞 나무 입간판은 치워지지 않은 상태였다.
‘들어갈 수 있는 거 같은데?’
수혁은 지하로 내려가는 문이 열려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생각해보니 저기를 가보지 않았네? 눈에 띠지도 않고 워낙 헌책방이 많다보니 잊고 있었어.’
수혁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칸타빌레로 발걸음을 옮겼다.
수혁은 건물 앞에 당도하여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을 따라 내려갔다. 계단 양 옆에는 음식점 홍보 스티커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는데 주인이 제대로 관리하지 않은 흔적이 역력했다. 계단 끝에 도달하자 유리문이 하나 보였고 수혁은 문을 열고 들어갔다.
“혹시, 아직 영업하나요?”
수혁은 인기척이 없는 서점 안으로 걸어갔다.
‘문은 열려있는데 사람이 없나?’
서점 안 통로에는 책들이 무분별하게 쌓여있었기 때문에 간신히 한 사람이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좁았고 책들이 촘촘히 배치되어 있어서 사람이 있는지 확인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서점은 환기를 하지 않은 탓에 오래된 책에서 나는 곰팡이 냄새가 가득했고 책들은 습기를 머금고 있어서 공기 중에는 왠지 모를 텁텁함도 느껴졌다.
“누구야!”
수혁이 서점 안을 배회하고 있는데 그의 뒤에서 큰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깐 책 좀 보러왔는데요.”
수혁은 한 노인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것을 확인했지만 차분하게 대응했다.
“책? 어린놈의 자식이 여기까지 책을 보러 왔냐?”
카페사장에게 들은 대로 노인은 평범한 사람은 아닌듯했다. 수혁은 책을 둘러보고 싶었기에 일단 노인의 비위를 맞추기로 했다.
“칸타빌레가 이 거리에서 가장 유명하고 좋은 곳이라고 들어서 왔습니다.”
“미친놈.”
‘하 다짜고짜 욕이라니, 그래도 책을 찾아야 하니 별수 없지.’
수혁은 기분이 조금 상했으나 말을 이어나갔다.
“혹시 몇 시까지 영업하세요? 제가 책을 좀 둘러보고 싶은데요.”
“그거야 내 마음이지, 그냥 열고 싶으면 열고, 닫고 싶으면 닫고.”
역시 들은 대로였다. 노인은 자신이 원할 때 문을 열고 평소에는 서점을 개방하지 않는 것 같았다.
“좋은 책들이 많은 것 같은데 좀 보고 가도 되나요?”
“좋은 책? 네가 책을 볼 줄이나 아냐? 요즘 젊은 것들은 그냥 글자만 휘갈겨져 있으면 책 인줄 알던데. 허접 쓰레기 같은 책들은 취급 안하니까 그냥 가는 것이 시간 아끼고 좋을 거야.”
수혁은 아무리 공손하게 이야기해도 자신을 무시하는 발언을 계속하는 노인에게 점점 오기가 생겼다.
“사실 저도 다른 헌책방 다 둘러보고 왔는데 별 볼일 없는 거 같아서 여기까지 온 겁니다. 제가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나름대로 책을 보는 안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네가? 하하하 그래?”
수혁의 말에 노인은 눈이 커지며 가소롭다는 듯이 웃어 보였다.
“그래, 네가 찾는 책이 뭐냐, 내가 한 번 들어보자. 이곳에 책이 못해도 2만권 가까이 되는데 책 위치는 나 빼고는 찾기 힘들 거야.”
노인은 처음으로 수혁에게 관심을 보이며 물어보았다.
“무술에 관련된 책을 찾고 있습니다.”
수혁은 노인이 자신을 시험하는 것처럼 느껴졌는데 왠지 쓴 소리를 들을 거 같은 두려움이 몰려왔다. 소심해진 수혁은 조용하게 이야기를 꺼냈다.
“무술? 나 참 어린놈답게 그런 것을 찾는구나, 뭐 강해지고 싶다 그런 건가 본데 그런 책들이 있기는 해 그런데 네가 그 가치를 알 수 있을지 의문이야.”
수혁은 의외로 대화가 될 거 같다고 판단되자 용기를 내어 말했다.
“알 수 있을지 없을지는 보고 판단하시죠.”
“오냐, 그래 네 놈이 볼 수 있을지 보자, 내가 너를 시험해 볼 건데 합격을 못하면 네 놈은 바로 이 책방에서 나가야 되니 그리 알아라.”
노인은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수혁에게 손짓을 하며 따라오라는 표시를 했다. 그는 수혁을 책방 구석으로 안내하였고 어느 책장 앞에 당도했다. 책장은 온갖 고서들로 가득 차있었다. 노인은 망설임 없이 한 서책을 꺼내어 수혁에게 건네주었다.
“이 책의 가치를 알아보면 내 너에게 격투기든 무술이든 관련된 책들을 모두 소개해주마.”
“알겠습니다.”
책을 건네받은 수혁은 지체 없이 살펴보았다. 책은 제법 두꺼웠는데 정식으로 출판된 것이 아니라 누군가 종이에 붓글씨로 휘갈겨 쓴 것을 한데 모아 책으로 엮은 것이었다. 잠시 책을 읽은 수혁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 책은 청나라 시절 당대 최고의 권법가로 불렸던 이서문의 팔극권 수련법이군요.”
“네가 어떻게? 옛 한문을 읽을 줄 아느냐?”
노인은 눈이 휘둥그레지며 수혁을 쳐다보았다.
“네 저는 어렸을 때부터 이런 고서들에 관심이 많아서 청대 시절의 글뿐만 아니라 그 이전의 것들도 모두 읽을 줄 압니다.”
수혁은 이번 기회에 노인의 마음을 사기로 마음을 먹었다.
“거짓말 말아라, 네놈이 어찌 그것들을 알 수 있겠냐?”
노인은 의심 가득한 눈빛으로 수혁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러자 수혁은 차분하게 책을 읽어나갔다.
“서평을 보니 저자는 이 책이 조선에서 온 정진협에게 주는 선물이라고 하는 군요. 상해에 머물던 시절 경제적으로 곤궁하던 저자는 자신에게 아낌없이 베풀던 친구 정진협에게 은혜를 갚기 위하여 이 글을 쓴다고 말하고 있네요.”
“네가 그것을 어떻게? 정진협은 내 5대조 할아버지로 고서를 모으는 우리 가풍을 따라 중국에 가서 책을 모으셨고 그때 우연히 이서문을 만나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네 놈이 정말 고서를 해독할 수 있는 모양이구나? 잠깐만 기다려봐라.”
노인은 갑자기 신이 난 표정이 되더니 고서들을 뒤지기 시작하였고 책들을 잔뜩 들고 수혁의 앞에 나타났다.
- 10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