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다음 날이 되자 수혁은 아침을 먹고 바로 마당에 가서 수련에 매진했다.
‘복싱 동작들도 섞어서 해봐야겠다.’
수혁은 무에타이 동작들로 연습을 하다가 팔꿈치와 정강이에 통증이 강하게 느껴지면 주먹으로 복싱스킬들을 연습했다.
복싱은 기본 동작들이 단순하여 어젯밤에 읽은 것으로 충분히 익힐 수 있었고 그는 하루 종일 훈련에 몰두했다. 그렇게 이틀이 지났다.
‘이제 개학인가?’
개학과 상관없이 훈련으로 온몸을 혹사시킨 수혁은 늦은 밤이 되어서야 방에 들어와 내일부터 입게 될 교복을 책상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그는 상처부위에 흰진교를 바른 뒤 깊은 잠에 빠졌다.
드디어 개학 날이 왔다.
수혁은 새벽5시에 일어나 샤워를 한 뒤 자신의 스텟을 점검했다.
수련의 결과는 놀라웠다. 불과 이틀 동안 힘 스텟은 4가 증가해 15가 되었다. 거기에 정신력, 매력, 체력의 수치도 모두 2씩 향상되었다.
‘역시 육체와 관련된 훈련이 힘 외에도 추가적으로 다른 스텟을 증가시켜주는군. 당분간 힘 퀘스트에만 집중을 해야겠다. 개학 후 조성준의 전학까지 시간이 좀 남았으니까 학교 마치고 돌아오면 무조건 훈련이다.’
고서를 통해 훈련의 효율을 높인 덕분에 디버프가 적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힘 스텟은 빠르게 상승하고 있었다.
“수혁아 아침 먹어라!”
“네, 엄마.”
혜정의 부름에 가족이 한 상에 모여 아침을 먹기 시작했다. 수혁의 부모는 식사를 하였지만 표정이 어두웠다. 선웅은 밥을 먹으며 수혁의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레 물어봤다.
“아들, 혹시 기분은 괜찮아?”
밥을 먹다가 뜬금없는 질문을 받아 당황한 수혁은 선웅을 바라보았다.
“기분이요? 그냥 그런데요?”
“그래. 막 불안하거나 스트레스가 조절되지 않거나 그런 것은 없어?”
‘아 왜 그러시는지 알겠다.’
수혁은 선웅의 말을 듣고 나서야 그의 행동이 이해가 갔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내성적인 성격으로 인해 학교에 가는 것을 싫어했다.
그러다 보니 방학을 하고 개학할 때면 항상 침울해진 상태가 되었고 현장학습과 같은 단체 활동을 하러 갈 때도 심한 우울함을 느끼곤 했었다.
‘어렸을 때는 왜 그렇게 학교를 가기가 싫었는지. 참’
수혁은 지난날을 떠올리며 쓴 웃음을 짓다 이내 얼굴을 밝게 하고 부모에게 이야기를 했다.
“어제 잠이 잘 안 오긴 하더라고요.”
“그래? 또 잠을 못 잤나보구나.”
선웅은 역시나 하는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쉬었다.
“어제 오랜만에 학교를 갈 생각을 하니까 설레어서 잠을 잘 못 잤어요.”
“그래?”
선웅은 예상 밖의 반응에 놀란 표정으로 수혁을 바라보았다.
“네, 오랜만에 다시 학교를 돌아갈 생각하니 앞으로 일어날 여러 일들에 대해서 기대도 되고 그렇더라고요.”
수혁에게는 20년 만에 다시 학교를 가는 것이기 때문에 실제로 마음속에 기대감도 존재했다. 그러자 처음에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던 선웅은 호탕하게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 그래, 학교 가서 친구들도 많이 사귀고 즐겁게 학교 생활해라. 공부 못해도 좋으니까 항상 그렇게 긍정적인 자세로 뭐든 한 번 해봐!”
수혁의 뜻밖의 반응에 아침식사 자리는 화기애애해졌다. 혜정은 식사를 하다가 수혁에게 물어보았다.
“아침에 옥상을 보니까 무슨 풀을 잔뜩 깔아놨던데 그거 네가 해놓은 거니?”
“네, 저한테 좀 필요해서요, 며칠 있다가 다시 걷어서 제 방에다 놓을 테니까 신경 안 쓰셔도 되요.”
“그래, 하고 싶은 것은 다 해 보거라.”
수혁이 무언가 목표를 가지고 몰두하는 그 모습 자체만으로도 혜정은 수혁에게 긍정적인 변화를 느끼고 있었다.
부모님이 먼저 출근을 하자 수혁도 방에 돌아가 가방을 챙긴 다음 등굣길을 서둘렀다.
‘오랜만의 등굣길이네.’
수혁은 집을 나와 학교로 향했다. 학교까지 가는 길은 제법 거리가 있었다.
동네를 벗어나 시내로 먼저 가야 했고, 시내에서 좀 더 가면 새로 개발된 아파트 단지 들이 잔뜩 모여 있는 곳 근처에 선민고등학교가 위치하고 있었다.
‘옛날 생각난다.’
수혁은 그와 같은 교복을 입은 학생들을 보며 생각했다.
학생들은 혼자 등교를 하거나 친구와 삼삼오오 모여 수다를 떨며 등교를 하는 중이었다.
“후, 아침에 피는 담배가 얼마만이냐?”
“그러게, 방학 때는 집에 많이 있으니까 냄새 때문에 잘 못 피겠더라고.”
가는 길 골목에는 친구들과 담배를 피우며 낄낄대는 애들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생각해보니 우리학교는 타 학교에 비해 규율이 약한 편이었지.’
새로 개발된 구역에는 큰 부자들은 아니나 신흥 부유층들이 많이 유입되었다.
선민고등학교는 사립이었는데 이사장은 잘사는 집안의 자제들을 유인하기 위해 규율을 느슨하게 만들었다.
사실 상류층의 부모들은 교육에만 집중할 수 있게 엄한 분위기의 고등학교를 선호했으나 느슨한 분위기를 선호하는 학생들은 고집을 피워 선민고등학교로 많이 진학했다.
‘잘사는 애들이 많다보니, 우리 동네 학생들은 오히려 선민고등학교를 1지망에 쓰지 않곤 했지, 나는 그런 사정도 모르고 그냥 집에서 가장 가깝다고 이 학교를 온 거고.’
수혁은 옛 생각에 잠겨 걷다가 어느새 학교 정문에 도착했다.
교문 앞에는 고급 승용차를 타고 등교하는 학생들의 모습도 종종 볼 수 있었다.
교문에는 명목적으로 선도부들이 있긴 했지만, 친구들과 잡담하느라 바빠 보였다.
‘시설 하나는 깔끔하니 괜찮네.’
수혁은 최근에 리모델링을 마쳐 세련된 외관을 자랑하는 학교 건물들을 구경했다.
이사장은 2년 전부터 학교의 외관과 내부 인테리어 공사를 계획했었다. 공사 승인 절차가 까다로워 시일이 오래 걸릴 거라고 예상했으나 다행히 지역구 국회의원이 도와준 덕분에 일사천리로 승인을 받아 공사를 빠르게 마칠 수 있었다.
‘내가 2학년 2반 이었던가?’
선민고등학교는 복도부터 대학교 강의동과 같은 깔끔한 시멘트 종류의 바닥으로 되어 있어 아직 여름임에도 불구하고 청량감이 느껴졌다.
수혁은 복도를 지나서 반으로 들어갔다. 반은 간만에 만난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는 학생들 때문에 다소 시끄러웠다.
“야, 이번 월드컵 봤어? 우리나라 완전히 망했잖아.”
“난 멕시코전 보고 그냥 월드컵 기대 접었어.”
“야? 너 시계 새로 샀냐?”
“이번에 아빠가 외국 출장 갔다 오면서 하나 사주셨어, 이거 외국 브랜드 명품이야 못해도 100만원은 넘을 걸?”
‘생각해보니 98년에 월드컵 했었지, 수련 하느라 월드컵 생각은 하지도 못했네. 역시 전생이나 지금이나 자랑 좋아하는 애들이 있는 것은 똑같구나.’
수혁은 자리에 앉아 떠드는 학생들을 보면서 멍하니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학생의 재량을 존중해주는 학교의 방침 때문이지 짧은 머리를 하는 학생은 보이지 않았고 남학생과 여학생들은 한 반에서 같이 생활을 하고 있었다.
“잘 지냈어? 나 이번 방학 때 일본 다녀왔는데 진짜 재밌었어.”
“진짜?”
반 여학생들은 한데 모여 방학 동안 지냈던 일들에 대해서 잡담을 나누던 중이었다.
“야, 근데 혹시 지금 저기 앉은 애 누군지 알아?”
“모르겠어, 누군지 잘 모르겠는데?”
“저 자리, 강수혁 자리 아니야?”
“강수혁? 설마.”
몇 몇 여자애들은 수혁의 변화를 감지하고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사실 그들의 입장에서는 놀랄 만 했다.
방학동안 키가 계속 자랐던 수혁은 어느새 173에 달하였고 방학 전에 비해 살이 확 빠진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운동으로 다져진 탄탄한 몸도 교복 밖으로 드러났다.
방학 내내 머리를 자르지 않아 앞머리는 눈을 많이 가리고 산발의 형태였으나 좋아진 피부상태만으로도 이전에 비해서 환골탈태라 할 수 있었다.
“뭔가 분위기 달라졌어.”
“그러게? 이전에는 있는지도 모르고 그랬는데,”
“너무해, 그래도 같은 반인데, 그리고 사실 보고 있으면 조금 마음이 그렇잖아.”
수혁은 여자애들의 반응에 뭔가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두 번째 여자애가 하는 말이 마음에 걸렸다.
‘뭐지? 그냥 존재감 없이 지냈던 게 아니었나? 조성준 일 말고 뭐 있었나?’
복잡한 생각이 들자 피로감을 느낀 수혁은 책상에 엎드려 잠깐 눈을 붙이기로 했다.
‘일단, 좀 쉬자. 조성준 일도 일이지만 삶을 바꾸기 위해서는 학교에서 내가 어땠는지를 떠올려야 한다. 생각해보자.’
수혁은 커다란 상처가 되었던 굵직한 사건에 대한 기억은 떨치지 못 했지만, 고등학교에서 어떻게 생활했는지에 대한 기억은 이미 희미해진 상황이었다.
사실 자신이 어떻게 보일지에 대한 생각자체를 하지 않고 학창시절을 보낸 터라 감조차 잡히지 않고 있었다.
‘생활하다 보면 천천히 알게 되겠지.’
천천히 알아보기로 결정한 수혁은 엎드려 쉬고 있었다. 평화롭게 흘러가는 것처럼 보이는 반의 분위기, 그러나 반 한쪽에서는 수혁을 노려보고 있는 무리가 있었다.
“야 쟤 뭐냐?”
무리 중 덩치 큰 남자가 친구들에게 물어봤다.
그의 이름은 배종명으로 원체 센척하는 것을 좋아해서 수혁을 많이 무시했던 아이였다.
“나도 처음에 누군지 못 알아봤거든? 근데 알고 보니까 달동네 사는 찐따 더라고.‘
“누구? 강수혁?”
친구의 말을 대번에 알아들은 종명은 믿기지 않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응, 쟤 봐봐 앉은 자리도 그 자식 자리잖아.”
“짜증나네, 그러면 지금 여자애들이 강수혁 가지고 수군거리는 거야?”
“근데 놀랄 만은 하잖아, 저 녀석 방학동안 머리 하나가 더 커가지고 왔어. 살도 엄청 빠지고, 뭔가 분위기도 변했고.”
“그래봤자 찐따는 찐따야, 새끼 괜히 재수 없네.”
여자애들의 관심을 받는 수혁이 싫었던 종명은 자리에서 일어나 쉬고 있는 수혁에게 접근했다. 그리고 손바닥으로 뒤통수를 냅다 후려 갈겼다.
“야 일어나.”
반은 순식간에 그들에게 이목이 집중되었다.
“야, 또 강수혁 괴롭히려나보다.”
“불쌍하다, 근데 쟤도 보면 한마디도 못하잖아.”
아무 생각 없이 자고 있던 수혁은 난데없는 충격으로 인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일어나서 앞을 보니 낯익은 남자가 그의 앞에 있는 것을 발견했다.
비대한 몸, 촌스러운 안경, 그리고 풀러 헤친 교복을 입은 남자를 보니 문득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다.
‘뭔가 기억이 난다. 2학년 내내 나를 사람들 앞에서 망신 주고 무시하던 놈, 이름까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군.’
그 시절 수혁은 괴롭힘을 당해왔다. 심한 폭행까지 이어진 것은 아니었으나 충분히 기분 나쁠 수 있는 괴롭힘은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웬만한 것으로는 기분 상할 일인지 판단이 되지 않을 정도로 소심하고 위축된 상태였기 때문에 수혁의 머릿속에 크게 남지 않았던 것이다.
“야, 엎어져 자지 말고 가서 우유나 가져와.”
아침 당번은 우유급식을 위해 우유를 가져와야 했다.
수혁은 칠판에 써진 오늘의 당번을 보았고 자신이 당번이 아님을 확인했다.
“당번도 아닌데 내가 왜?”
“뭐? 왜?”
종명은 아이들이 보고 있는 상황을 의식했는지 과장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우리 반 우유담당 너 인거 몰라? 내가 1학기에 정해줬잖아. 너 재교육 받아야 되겠는데?”
종명은 허세가 가득한 인물로 자신보다 약자를 괴롭혀 스스로의 입지를 다지는데 많은 신경을 썼다.
공부를 못했던 종명은 시험을 망칠 때나 애들과의 축구시합에서 진 것과 같이 자존감이 떨어지는 것을 느낄 때면 약자를 깔아뭉개 자신을 위로하곤 했다.
“뭐? 재교육? 아무래도 내가 널 교육시켜줘야 될 것 같은데?”
수혁은 눈을 치켜뜨고 종명을 바라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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