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저 사람은?’
반에 들어온 선생은 수혁의 1학년 때 담임이었던 송명철이었다. 머리가 반쯤 벗겨지고 항상 지휘봉을 들고 다니는 것이 그의 특징이었다.
“아, 영어 시간이다.”
“그 선생님 맨 날 우리한테 문제 풀어보라고 시키잖아.”
아이들은 대체적 으로 영어시간을 싫어했다.
왜냐하면, 항상 수업 말미에 문제를 학생들에게 풀어보게 하는데 잘못 푸는 아이한테는 공개적으로 모욕을 주는 것을 일삼기 때문이었다.
“뭘 그렇게 시끄럽게 떠들어, 책들 펴.”
명철은 아이들을 조용히 시키고 수업을 시작했다. 수업은 간단한 문법과 문장을 해석하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수업이 20분 정도 남았을까, 명철은 예상대로 부교재를 펴게 했다. 부교재는 교과서가 아닌 수능에 대비할 수 있는 모의고사 문제집이었다.
“모두 38페이지를 펴기 바란다. 여기에 보면 두 문제가 있다. 7분 줄 테니 문제를 풀어라.”
수혁은 언이이해 프로그램 덕분에 이미 원어민 수준의 영어를 구사할 수 있었기에 얼마 안 되서 문제를 모두 풀어내었다.
7분의 시간이 지나자 명철은 지휘봉으로 교탁을 두드리며 말했다.
“자, 이제 내가 지목하는 사람은 나와서 문제를 풀고 답의 근거를 설명해라. 너 나와서 풀어봐.”
명철은 앞자리에 있는 남학생을 지목했다. 안경을 쓴 학생이었는데 그는 반에서도 최상위권의 성적을 기록하고 있었다.
그는 앞으로 나가 일단 답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문제를 푸는데 도움을 주었던 문법적 지식과 문제 푸는 스킬들을 설명해주었다.
“선지를 먼저 읽어서 답이 될 수 있는 부분을 좁히고 지문도 그에 맞춰서 선별적으로 읽었습니다. 그리고 여러 문법적 사항을 고려해봤을 때 답은 3번입니다.”
예상대로 문제를 쉽게 풀어내었고 깔끔한 설명까지 덧붙였다. 명철은 흐뭇한 미소를 짓다가 갑자기 수혁을 흘겨보며 말했다.
“잘했다. 역시 기대대로야, 자 다음은 강수혁, 네가 나와서 풀어봐라.”
명철이 수혁을 호명하자 반 분위기가 어수선해지기 시작했다.
종명과 그의 친구들은 신이 나서 자기들끼리 떠들기 시작했다.
“흐흐흐, 또 시작하셨구나.”
“강수혁, 아까는 모르겠지만 완전히 개망신 당하겠는데.”
종명은 비열하게 웃으며 수혁을 바라봤다. 명철은 1학년 때 촌지를 주지 않았던 수혁을 괘씸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종종 이런 자리를 만들어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곤 했었다.
첫 문제를 공부를 잘하는 학생에게 해결하게 한 것도 수혁에게 수치심을 주기 위한 명철의 포석 이었다.
“네.”
수혁은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는 명철을 무시하고 교단 앞으로 나갔다.
“수혁이 넌 먼저 영어지문을 읽고 문제를 풀어라.”
“푸하하하하”
명철의 말을 들은 종명과 그 무리가 참지 못하고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왜냐하면 소심한 성격의 수혁은 영어를 읽을 때마다 항상 다 죽어가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읽었고 발음도 엉망인데다 영어 실력도 떨어져 중간 중간 막혔기 때문이다.
“조용, 조용. 강수혁 시작해라.”
명철은 속으로 웃음을 삼키며 반을 조용히 시키고 수혁에게 지시했다.
그러자 곧 놀랄 만한 일이 벌어졌다. 수혁이 영어를 읽기 시작하는데 원어민과 같은 유창한 발음으로 영어 문장을 읽었기 때문이다.
“뭐야 재, 발음이 왜 이렇게 좋아?”
“어렸을 때 유학 다녀왔나?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완전 네이티브 수준인데?”
자신의 예상과 다른 전개가 펼쳐지자 명철은 당황하며 말했다.
“뭐, 뭐야 너. 이건 아닌데?”
“뭐가 아닙니까?”
명철이 자기도 모르게 속마음을 드러내자 수혁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크흠, 시끄럽고 어떻게 풀었는지 설명을 해봐.”
“네, 답은 3번이고 문제를 푸는 방식은 그저 해석을 잘하면 된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뭐라고?”
명철은 황당한 표정으로 수혁을 바라봤다.
문제의 지문은 상당히 길었고 주어진 시간은 짧았기에 평범한 학생이라면 지문을 완벽히 해석해서 문제를 푸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그 상황에서 수혁이 단순히 해석만 잘하면 된다고 하니 놀란 것이다.
“해석을 잘하면 된다고 했습니다. 안 믿으시는 것 같으니 지금부터 보여 드리겠습니다.”
수혁은 얼빠진 표정이 된 명철 앞에서 지문의 중심문장과 세부적인 내용을 간략이 설명한 뒤 각 선지마다 왜 정답이 되고 안 되는지, 지문의 내용을 근거로 설명했다.
이는 빠른 속독능력과 영어해석에 대한 절대적 실력이 담보되어야 했기 때문에 앞선 학생보다 월등한 방법이었다.
“어떻게 된 거야? 이 멍청한 녀석이.”
명철은 수혁의 설명을 듣다가 자기도 모르게 조용히 혼잣말을 했다.
수혁은 그 말을 듣고 냉정하게 말했다.
“수업으로는 도무지 감이 안 잡혔는데 방학 때 혼자 공부하니 실력이 금방 늘더군요.”
“뭐, 뭐야?”
명철은 수혁이 자신을 두고 조롱하는 것을 느끼자 목소리가 커졌다.
“저는 문제 다 풀었으니 들어가겠습니다.”
수혁은 황당해하는 명철을 뒤로하고 당당히 자리에 돌아왔다.
‘저 자식 분명 날 두고 하는 말이야.’
명철은 수혁을 노려보며 생각을 했다.
그러나 표면적으로 꼬투리를 잡기 애매했기 때문에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한심한 사람, 예나 지금이나 치졸한 건 똑같네.’
수혁은 자리에 돌아와 명철을 보며 생각했다.
마지막 수업이 끝나고 아이들은 저마다 영어 시간의 일을 두고 설왕설래하였다.
“오늘 봤어? 영어를 엄청 잘하던데?”
“나도 놀랐잖아, 방학 때 공부도 열심히 했나봐.”
반 아이들은 수업이 끝난 후 수혁에 대해 더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개학 첫 수업을 잘 마친 수혁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저녁을 먹고 바로 수련을 하러 마당으로 갔다.
“학교를 다니니 확실히 수련시간이 짧다, 저녁을 먹으면 6시, 대략 5시간 정도 수련을 할 수 있다. 하루도 거르지 말자.”
개학 전날 이전의 퀘스트는 마무리가 되었고 새로운 퀘스트가 부여되었는데 내용은 구해온 책들을 토대로 지금 하는 훈련을 성실히 하는 것이었다.
수혁은 특별한 변화를 주기보다는 현재 자신이 세워 논 훈련계획을 성실히 이행 하는데 집중했다. 그리고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벌써 한 주가 지났네. 그런데 뭔가 미흡한 것 같아.’
한 주 동안 수혁은 여러 스텟이 성장했다. 힘은 2가 올라 17이 되었고.
매력, 정신력, 체력이 각각 1씩 증가했다.
‘지금 훈련 방식으로는 조금 부족해 성장 속도도 느리고 샌드백으로 훈련하는 것만으로는 실전에 대비하기는 힘들어.’
수혁은 기존의 방식을 탈피하여 좀 더 실질적인 훈련을 하고 싶었다.
그는 동네에서 나와 시내로 향했다.
‘근처에 있는 체육관에 가서 실전감각을 키우는 훈련을 해야겠어.’
시내를 돌며 체육관을 찾았지만, 무에타이 도장은 찾을 수가 없었다. 시내에는 조그마한 복싱 체육관이 하나 있을 뿐이었다.
‘흠, 아무래도 무에타이는 대중적인 스포츠가 아니다 보니 찾기가 어렵네, 복싱도 어차피 실전성이 강하니 저곳에 가서 문의를 해봐야겠다.’
수혁은 노가다를 해서 번 돈이 아직 남아 있었고 평소에 복싱 교본을 틈틈이 보며 동작들을 연습하였기에 복싱 체육관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는 허름한 건물 2층에 위치한 복싱 체육관에 들어갔다.
“야, 자세 똑바로 해, 훅을 할 때는 어깨를 잘 사용하라고 했잖아!”
체육관에 들어간 수혁은 관장으로 보이는 사람이 교육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안녕하세요.”
수혁은 관장한테 인사를 했다.
“처음이신 것 같은데 어떻게 오셨어요?”
관장은 지도를 하던 남자에게 샌드백을 치라고 지시를 내린 뒤 수혁과 대화를 나누었다.
“복싱을 잠깐 배우려고 찾아왔습니다. 나름대로 훈련은 하였는데 아무래도 혼자 하다 보니 실전 감각이 부족한 것 같아서요.”
“학생인 것 같은데 복싱을 해봤다고?”
“네.”
관장은 수혁의 앳된 외모를 확인하자 말을 놓고 이야기를 했다. 수혁은 마당에서 복싱 스텝과 여러 동작들을 익혔다.
그는 높아진 스텟과 어플의 도움으로 복싱에 대한 기초는 닦인 상태였다.
“실전감각이라 그거는 스파링을 통해서 키우는 것이 최고지.”
“그러면 스파링을 시켜주세요.”
수혁은 관장의 말을 듣고 바로 스파링을 시켜줄 것을 요구했다.
“뭐? 사람 잡을 일 있어? 기본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바로 스파링을 해?”
관장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다쳐도 스스로 선택한 거니까 제가 책임질게요. 부탁드립니다.”
“하, 가끔가다 꼭 있어. 자기 힘 과시해보려고 스파링 하러 오는 사람들 말이야, 이봐, 이 학생이 스파링하고 싶다는데 한 판 뛰어봐.”
관장은 내키지 않았지만, 이번 기회에 수혁의 버릇을 고쳐줄 심산으로 관원 중 한 명을 불러 준비를 시켰다.
“넵 관장님.”
관장의 지시를 받은 남자는 가볍게 몸을 푼 뒤 두꺼운 글러브를 끼고 링 위에 올라갔다.
수혁도 글러브를 끼고 올라가려 했으나 관장이 제지했다.
“손에 테이핑은 하고 가야지, 그러다 손목 다쳐.”
관장은 붕대를 가져와 수혁의 주먹과 손목에 테이핑을 해주었다.
“자, 이제 올라가 봐, 심판은 내가 본다.”
수혁은 링 위에 올라가 헤드기어를 쓴 뒤 상대방과 마주섰다.
“내가 그만하라고 하면 바로 멈춰야 된다. 시간은 3분, 룰은 설명 안 해도 알지?”
관장이 말하자 수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시작해라.”
관장은 링에서 내려와 스파링을 지켜보았다.
수혁은 가드를 올린 뒤 상대방의 움직임을 살피며 스텝을 밟았다.
남자는 팔을 돌리며 여유 있게 수혁을 쳐다보다가 가벼운 잽을 날리기 시작했다.
“살살해, 완전 초보니까 맛만 보여주라고.”
관장은 걱정스런 표정을 지으며 남자에게 말했다.
하지만 수혁은 의외로 능숙하게 잽들을 막더니 강한 잽을 날렸다.
‘뭐야? 생각보다 주먹이 묵직하잖아?’
수혁의 주먹을 막은 남자의 가드 위로 큰 충격음이 들리자 관장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생각했다.
‘확실히 혼자 샌드백을 치며 연습할 때랑 많이 다르네.’
수혁은 바쁘게 움직이는 상대를 보며 연습했던 동작들을 시현해보았다. 주먹이 빗나가거나 막히는 경우가 많았지만 그는 상대방과 대등하게 스파링을 할 수 있었다.
“자, 그만.”
관장은 시간이 다 되자 시합을 멈췄고 수혁은 헤드기어를 벗으며 링에서 내려왔다.
“더 할 수 있을 거 같은데 좀 더 해보면 안 되나요?”
수혁은 아쉬운 감정을 드러내며 말했다.
“복싱 안 배웠다는데 사실이야? 그런 것 치고는 제법 잘하던데? 스텝과 주먹을 쓰는 자세가 나쁘지 않았어.”
관장은 비록 고수는 아니었지만, 복싱을 체계적으로 6개월 정도 배운 사람과 대등하게 스파링을 한 수혁이 놀라웠다. 그런데 그 때 체육관 문이 열리더니 수혁과 비슷한 연령으로 보이는 남자가 들어왔다.
“저 왔습니다.”
남자는 수혁과 관장이 있는 쪽으로 와서 인사를 했다.
“그래, 종욱아. 시간 맞춰서 잘 왔다. 이번에 민상이가 시합이 있는데 네가 잘 좀 도와줘라.”
“걱정 마세요. 저는 바로 준비할게요.”
체육관에 들어온 사람은 김종욱이었다. 그는 수혁과 동갑이었는데 국내에서 이름이 알려진 유망주였다. 고1 때 이미 전국체전에서 메달을 딴 종욱은 웬만한 프로들도 이길 수 있는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누구지?’
수혁은 한 눈에 보아도 강해보이는 종욱을 보며 생각했다. 그는 종욱에게 호기심이 생겨 스파링을 관찰해보기로 했다.
- 15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