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종욱아, 민상이 시합 나가야 되니까 너무 세게 하지는 말아라.”
관장은 상대를 앞에 두고 긴장한 표정을 짓는 민상이 걱정되어 종욱에게 말했다.
그리고 잠시 후 종이 울림과 동시에 스파링은 시작되었고 종욱은 스텝을 밟으며 다가갔다.
‘정말 대단하다.’
수혁은 상대를 농락하는 종욱의 움직임을 보면서 감탄했다.
그는 상대방이 주먹을 날리는 것을 경쾌한 스텝으로 피해낸 다음 카운터 펀치를 여러 차례 적중시켰다.
민상은 어떻게든 종욱을 맞춰보려 했지만 결국 스파링 끝날 때까지 제대로 된 타격을 적중시키지 못했다.
“됐다. 이제 링에서 내려와라.”
관장은 스파링을 멈췄다. 민상은 고개를 숙이며 링에서 내려왔고 종욱은 여유 있는 표정을 지으며 정수기 앞으로 가서 물을 마셨다.
“민상이가 그래도 자기 체급에서 랭킹 6위인데 아직 프로 데뷔도 안 한 애한테 이 지경이 되다니. 쯧쯧.”
관장은 스파링 결과가 허무한 지 혀를 차며 말했다.
“관장님, 저는 나중에 챔피언이 될 사람이에요. 너무 그렇게 말씀하지 마세요.”
종욱은 관장의 말에 넉살을 떨었다. 그런데 그 때 수혁이 종욱에게 와서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좀전에 스파링 되게 인상적으로 봤습니다.”
“누구세요?”
종욱은 갑자기 말을 건네는 수혁을 쳐다보았다.
“오늘 처음 체육관어 온 친구야, 너랑 동갑이니까 서로 친구처럼 지내라.”
관장은 종욱에게 넌지시 말했다.
“아, 너도 아직 학생이구나. 말 편하게 하자. 나는 김종욱이야.”
“난 강수혁이야.”
둘은 서로 마주보며 짧게 악수를 나눴다.
“방금 보니까 무척 강한 것 같은데 혹시 나도 너랑 스파링을 할 수 있을까?”
수혁은 종욱과 스파링을 겨뤄보고 싶은 마음에 다짜고짜 용건을 말했다.
“훗, 나랑 붙어보고 싶다고?”
종욱은 입에 실소를 머금었다. 그런데 그 때 관장이 수혁을 만류하기 시작했다.
“절대 안 된다. 지금 실력으로는 게임이 안 돼. 기본을 더 다지고 나서 생각해 봐라.”
“아니에요, 실력을 한 번 확인 해 보고 결정하죠. 너, 네가 아는 기술들로 샌드백을 한 번 쳐봐.”
종욱은 저돌적인 수혁에게 호기심을 느끼고 그를 테스트해보기로 했다. 수혁은 말없이 샌드백 앞으로 가서 마당에서 수련했던 동작들을 종욱에게 보여주었다. 돌 샌드백과 흰진교의 도움으로 신체를 단련한 수혁이 주먹으로 샌드백을 치자 호쾌한 타격 음이 체육관을 울렸다.
“파워는 나쁘지 않은데 아직은 많이 부족하고, 동작들을 보니 조금 연습한 흔적은 보이지만 갈 길이 멀었어. 아무래도 스파링은 안되겠다.”
종욱은 수혁을 바라보며 냉정하게 말했다.
“그럼 나한테 복싱의 기본을 알려줘.”
수혁은 냉철한 종욱의 판단에 바로 수긍을 한 뒤 그에게 복싱을 배우기로 마음을 먹었다.
“야, 관장님도 있는데 어떻게 그래. 그리고 난 이 체육관 소속도 아니란 말이야.”
종욱이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때 관장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우리 체육관에 스파링 하러 올 때 한 번씩 자세만 봐줘라. 어차피 나도 민상이랑 다른 애들 대회 준비시키느라 많이 바빠서 네가 도와주면 좋을 것 같은데?”
“네? 그게 말이 되나요? 저는 누굴 가르쳐본 적이 없다고요.”
“야, 내가 스파링 수당도 두둑이 챙겨주는데 그것도 못 하냐?”
관장은 실망스럽다는 듯 종욱을 쳐다봤다.
“하, 알겠어요, 그러면 스파링 올 때마다 잠깐씩 자세만 조금 봐줄게요.”
“고마워. 잘 부탁할게.”
종욱의 말을 들은 수혁은 고마움을 표시했다.
“샌드백 다시 한 번 쳐봐, 내가 보고 조금씩 알려줄게.”
“응, 알았어.”
수혁은 종욱의 지시에 따라 샌드백을 쳤고 그 때마다 종욱은 친절하게 여러 동작들을 교정해주었다.
“안녕히 계세요.”
종욱은 레슨이 끝나자 관장에게 인사를 하고 나가려고 했다. 그에게 할 말이 있던 수혁은 관장에게 한 달분의 관비를 주고 종욱을 따라 체육관 밖으로 나왔다. 관비는 생각보다 저렴하여 크게 부담되는 수준이 아니었다.
“오늘 고마웠어.”
수혁은 건물 밖으로 나온 뒤 종욱에게 말했다.
“아까 지도 해 보면서 느낀 건데 넌 제법 센스가 있어. 열심히 해서 네 말대로 나중에 스파링 한 번 해보자.”
종욱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 열심히 해서 금방 따라 잡을게.”
“큭, 쉽지 않을 거다.”
수혁은 귀찮은 내색 없이 자신을 가르쳐 준 종욱이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종욱도 훈련에 진지하게 임하는 수혁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
“잘 가라. 연습 게을리 하지 말고.”
“알겠어.”
수혁은 종욱과 짧은 대화를 나눈 뒤 헤어졌다. 그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마당으로 가 체육관에서 배웠던 동작들을 복습했다.
‘체육관에 가서 배우니 확실히 뭔가 다른 것 같아.’
그날 수혁은 밤이 늦도록 훈련에 매진했다.
* * *
또 한 주의 시간이 쏜살같이 흘러갔다.
수혁은 수업이 끝나면 매일 체육관에 가서 간단히 스파링을 하고 가끔씩 종욱에게 지도를 받는 것으로 하루를 보냈다.
그리고 틈틈이 옥상에서의 훈련도 게을리 하지 않았기 때문에 전 주에 비해서 스텟은 더 빨리 상승할 수 있었다.
‘열심히 한 보람이 있는데?’
이 기간 동안 수혁은 힘을 20까지 올릴 수 있었고 매력, 정신력, 체력도 각각 2씩 상승했다.
‘학교생활도 예전과는 달라지는 것 같아.’
수혁은 단순히 스텟만 변한 것은 아니었다.
2주간의 학교생활에서 그는 친밀한 교우관계를 맺은 사람은 없었지만 무슨 일이 있으면 확실히 자신의 의사표현을 하게 되었고 반 아이들 중 수혁을 만만하게 보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그리고 가장 큰 차이는 수혁에게 조금씩 말을 걸어오는 아이들이 생겼다는 것이다.
“영어 잘하는 거 같은데 혹시 이 문제 좀 가르쳐줄 수 있어?”
몇 몇 여자애들은 체육관에서의 훈련으로 향상된 매력 덕분에 더 잘생겨진 외모와 뛰어난 영어실력을 갖춘 수혁에게 문제를 물어보는 경우가 종종 발생했다.
그러나 수혁은 이러한 것들이 단지 자신의 외적 변화에 의한 것임을 잘 알았기에 크게 의미를 두지 않았다.
‘마음을 놓아서는 안돼.’
순탄하게만 흘러가는 학교생활 안에서도 수혁은 성준이 곧 온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는 계속해서 훈련에 몰두했고, 시간이 지나 개학 2주차 토요일이 되었다.
“주말이라고 너무 놀지 말고 공부해라.”
“네.”
담임은 토요일 수업이 끝나자 종례를 했고 수혁은 학교가 끝나자마자 곧장 집으로 향했다.
‘오전 수업만 하니까 시간이 많이 남네? 주말에 훈련을 몰아서 해야겠군.’
수혁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길을 가다 예전에 갔었던 동네 청과점이 시끌시끌한 것을 발견했다.
‘무슨 일이지?’
수혁은 소란이 벌어지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청과점에는 동네 아주머니들 모여 지난 밤 있었던 일에 대해 떠들고 있었다.
“어휴, 며칠 전에 김씨 할아버지가 크게 다쳤다면서요?”
“다른 동네 어린 것들이 우리 동네 폐가에서 담배 피우고 술 마시는 것을 김씨 할아버지가 목격했었나봐.”
“근데 글쎄 하지 말라고 몇 번을 이야기해도 틈만 나면 술 마시고 담배 피고 그러니까 며칠 전에 참지 못하고 한마디 했는데 교복 입은 학생들이 그냥 할아버지를 밀치고 겁박하고 그랬다지 뭐야, 다행히 크게 다치진 않으셨지만, 자리에 누워서 잘 못 움직이시나봐.”
“병원이라도 가보시지.”
“병원가면 다 돈인데 우리 처지에 그럴 수 있나.”
“요즘 학생들은 무서워, 위아래가 없어, 거칠고.”
동네 아주머니들은 혀를 차며 최근 동네에서 있었던 불량배들의 횡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동네에 무슨 일이 있는 모양이네. 어라, 뭐지?’
동네 아주머니들을 보던 수혁은 갑자기 눈앞에 퀘스트창이 뜬 것을 확인했다. 그는 사람들이 없는 구석진 곳으로 가 퀘스트를 확인했다.
<히든퀘스트가 발동 되었습니다. 김씨 할아버지를 찾아서 사정을 듣고 마을의 문제를 해결해주세요.>
‘히든퀘스트는 해서 나쁠 것이 없지.’
수혁은 퀘스트를 수락했다.
‘먼저 김씨 할아버지를 찾아서 말씀을 들어봐야겠다. 그러려면 어디 사시는지 먼저 알아야 될 텐데.’
수혁은 단서를 물으러 아주머니들에게 접근했다.
“안녕하세요.”
“어, 수혁이구나.”
수혁은 동네 주민들을 만날 때마다 인사를 했기에 이제 그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잠깐 들었는데, 김씨 할아버지께서 다치셨다면서요.”
“말도 마라. 어린 것들이 어찌나 거친지, 쯧쯧... 지금 어르신은 거동이 불편하셔서 거의 누워서 지내시는 것 같더라.”
한 아주머니가 말했다.
“제가 할아버지께 병문안을 가고 싶은데 혹시 댁이 어딘지 알 수 있을까요?”
“어유, 기특하네. 김씨 할아버지 댁은 여기서 금방이야, 저기 우측골목으로 쭉 들어가면 파란색 지붕이 있는 오래된 집이 있을 건데, 바로 그 집이야.”
“감사합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어떻게든 잘 되겠죠.”
“그러게 학생도 조심해, 밤에 너무 늦게 돌아다니지 말고, 여기는 경찰이 순찰도 안돌고 cctv같은 것은 아예 없으니까.”
“넵, 알겠습니다.”
대화를 마무리 한 수혁은 청과점에서 우측으로 뻗어 있는 골목길로 걸어 갔다.
곧 파란색 지붕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집 앞에 도착한 수혁은 초인종이 없는 대문을 두드려 사람을 불렀다.
“계십니까?”
수혁은 안에 있는 사람을 불러보았지만, 대답이 없었다.
“저기요, 혹시 누구 계세요?”
“누구요?”
힘없는 노인의 목소리가 안에서 들렸고 이윽고 문이 열리며 김씨 할아버지가 문을 열고 수혁을 맞았다.
김 노인은 주민들의 말과 달리 거동은 가능했으나 허리가 불편한지 한 손으로 허리를 매만지며 천천히 걸어 나왔다.
“수혁이 아니냐? 여기는 어쩐 일이야?”
“할아버지께서 불미스러운 사고로 누워계신다는 말을 듣고 걱정이 돼서 와봤습니다.”
“어휴, 뭣 하러 여기까지 와서, 그래도 고맙네. 어여 들어와.”
김 노인은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수혁을 방으로 안내했다.
“이쪽으로 좀 앉게.”
방 안에는 이불이 펼쳐져있었다. 상황을 보니 수혁이 부르기 전까지 노인은 아파서 계속 누워있었던것처럼 보였다.
“몸은 좀 괜찮으세요?”
“이까짓 것 쯤이야 2,3일 푹 쉬면 금방 나으니까, 걱정하지 마.”
“그런데 무슨 일로 이렇게 다치신거예요?”
수혁은 퀘스트 해결을 위한 단서를 찾기 위해 질문을 했다.
“말도 마라, 우리 동네에 주인 없는 폐가가 몇 채 있잖아.”
“저도 알아요.”
예전에 흰진교를 말리기 위해 폐가에서 돌을 구한 적이 있던 수혁은 김씨 할아버지께서 이야기하는 곳이 어딘지 대번에 알아들었다.
“그곳에 언제부턴가 누가 자꾸 쓰레기들을 버리는거야. 그래서 어느 날 가보니까 고등학생들이 말이지, 담배피고 술 마시고 그러고 있더라고.”
노인은 생각하면 괘씸한지 얼굴이 빨개지며 말했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그래서 내가 처음에는 무시하려고 했어. 나이도 있고 요즘 젊은 사람들 무서우니까. 근데 시끄럽게 떠들고 쓰레기를 막 버리고 하니 내가 조금 조용히 해줬으면 좋겠다고 하니까 막 대들더라고. 그래서 훈계를 좀 했더니 그놈들 중 한 녀석이 와서 나를 밀치더라고.”
“저런, 속상하셨겠네요.”
수혁은 노인의 말을 들으며 공감해주었다.
“속상하지, 내가 다친 거는 그렇다고 해도 어린 학생들이 동네에서 행패를 부리는 꼴을 어떻게 할 수가 없으니,”
“그런 문제라면 제가 어떻게 해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노인의 말을 들은 수혁은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발 벗고 나섰다. 물론 이와 같은 결정의 배경에 퀘스트를 수행하기 위한 의도가 있음은 두 말 할 필요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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