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생각보다 많이 늦네.’
수혁은 살짝 초조해진 기분으로 성준을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후, 짧았던 쉬는 시간이 끝나고 드디어 선생이 들어왔다.
‘같이 들어오겠지?’
수혁은 성준이 선생과 같이 들어올 것으로 예상하였지만 선생은 혼자였고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정상적으로 수업을 했다.
‘뭐지? 아직 면담 중인가?’
수혁은 그 후에도 성준을 계속 기다렸지만, 다음 수업시간 그리고 점심시간이 됐는데도 그는 보이지 않았다.
‘분명 전생에는 이러지 않았던 것 같은데?’
수혁은 급식실에서 밥을 먹으며 어떻게 된 일인지 곰곰이 생각했다. 그렇게 한참 식사하며 고민하던 그는 건너편 테이블에서 잊을 수 없는 얼굴을 발견했다.
‘조성준이잖아?’
고개를 숙인 채 식사를 하고 있어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수혁은 그의 얼굴을 단번에 알아 볼 수 있었다.
한참 성준을 지켜보고 있던 수혁은 그의 옆에 앉아 있는 아이들을 보고 의아해졌다.
‘김승원이 왜 조성준 옆에 앉아 있는 거지?’
승원은 종명과 친하게 지내는 다른 반 학생이었다. 그는 종종 종명을 보러 수혁의 반에 들렸기 때문에 수혁이 그의 얼굴을 알아보는 데에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밥맛이 괜찮지? 우리 학교 식당이 그래도 다른 학교에 비해서 급식 잘 나온다고 소문 많이 났어.”
승원은 성준의 눈치를 보며 비위를 맞추고 있었다.
‘역시나 다른 반에도 배종명 같은 애들은 꼭 한 둘 씩 있구나.’
수혁은 알랑대는 승원을 보며 생각했다.
“그냥 저냥 먹을 만하네.”
성준은 무미건조한 말투로 말했다.
“성준아, 좀 있다 밥 먹고 우리랑 매점도 같이 갈래? 같이 음료수 한 잔 하면서 이야기하자.”
“그래, 나도 마침 너희들한테 할 이야기가 있는데 잘됐네.”
수혁은 그들의 대화가 신경 쓰였지만 그냥 무시하기로 했다.
성준이 앞으로 학교에서 어떤 일을 벌일지 궁금하기는 했지만, 그에게는 더 신경 쓰이는 부분이 있었다.
‘아무래도 이상해. 분명 이전 생에는 우리 반으로 전학 왔었는데 어떻게 된 거지?
그는 당장 어플을 켜서 물어보고 싶었지만, 학교에는 보는 눈이 많았기 때문에 나중에 알아보기로 했다.
식사를 마치고 반에 돌아온 수혁은 책을 읽으며 쉬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한 여학생이 2반 근처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그녀는 누군가를 찾는 듯 보였다.
복도를 지나가는 남학생들이 그녀를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쟤 김유리 아니야? 이쪽으로는 온 적이 없었는데 어쩐 일이지? 근데 예쁘긴 되게 예쁘다.”
유리네 반은 수혁이 있는 2반과 층이 다른데다 수혁을 제외하곤 달리 만날 사람도 없었기 때문에 2반 근처에 올 일이 없었던 것이다.
문 앞을 서성이던 유리에게 한 학생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유리야, 웬일이야?”
“어, 정식아.”
“우리 반에 뭐 볼일이라도 있어?”
민정식은 일전에 영어시간에 문제를 풀었던 학생으로 집이 부유하고 공부도 잘했다. 정식은 반장이었는데 여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그는 학생들의 자발적인 추천에 의해 선출된 것이 아니라 단독 후보로 출마한 뒤 형식적인 투표로 뽑혔는데 이는 담임이 그를 강력하게 밀어줬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2반에 친구가 있어서 잠깐 보려고 들른 거야.”
“그래? 내가 우리반 여자애들이랑 다 친하거든. 누군데? 불러줄게.”
유리가 남자를 만나러 온 것을 예상하지 못한 정식은 그녀의 환심을 사기 위해 친절을 베풀려고 했다.
“혹시 수혁이 좀 불러줄 수 있어?”
“수혁이? 설마 강수혁?”
정식은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누군가가 수혁을 찾는 것도 놀라운 일이었지만 그 사람이 유리라는 사실이 정식에겐 더 충격적이었다. 유리는 공부도 잘하고 얼굴도 예뻐서 남학생들 사이에서 선망의 대상이었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종종 고백하는 학생들이 생기곤 했는데 그때마다 그녀는 공부나 다른 이유를 들며 철벽을 쳤었다.
“안에 있어. 잠시만 기다려.”
“응 고마워.”
정식은 처음과 달리 딱딱한 말투로 유리에게 말한 뒤 수혁에게 다가갔다.
“저, 수혁아.”
“응?”
수혁은 책을 읽다가 고개를 들었다. 정식은 평소 한마디도 말을 섞지 않은 사이였기에 그는 조금 의아스러웠다.
“밖에서 누가 너 찾는 것 같더라고.”
“누군데?”
“여자애던데.”
정식은 할 말만 하고 자리로 돌아갔다.
사실 그는 영어시간 이후 수혁에게 묘한 경쟁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자신보다 영어를 더 잘하고 부쩍 아이들의 관심을 받고 있는 수혁에게 질투를 느꼈다.
‘유리 같은 애가 왜 강수혁을 찾아온 거지?’
정식은 유리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었으나 주변에서 거절당하는 것을 몇 번 본 이후 마음을 드러낼 시도조차 못 했었다. 그런데 유리가 수혁을 찾자 기분이 많이 상한 것이었다.
“유리야, 우리 반에는 무슨 일이야?”
정식의 어색한 태도를 의식조차 안 한 수혁은 유리에게 말을 걸었다.
“꼭 일이 있어야 오나? 그냥 한 번 보러왔지.”
유리는 활짝 웃으며 수혁에게 이야기했다.
‘저 웃음을 보면 마음이 편해지네.’
수혁은 유리의 미소를 보며 생각했다.
“와줘서 고마워, 내가 찾아갔어야 했는데.”
“뭘 그런 걸 따져, 그냥 시간 되는 사람이 보러오면 되지. 수혁아 괜찮으면 학교 정원 좀 같이 걸을래?”
“그래. 아직 수업까지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까.”
수혁은 유리와 함께 학교 뒤편에 있는 정원을 걸었다.
수혁의 학교는 리모델링을 하면서 기존에 있던 정원을 확장해 교직원과 학생들에게 휴식공간을 만들어 주었다.
정원은 그리 크진 않지만, 나무와 꽃들이 우거져 있었고 중간 중간 앉아서 이야기할 수 있는 벤치가 있어 점심시간 이후 많은 학생들이 애용하는 장소였다.
“여기 좋지 않아? 난 가끔 공부하다가 지치면 쉬는 시간에 여기 와서 시간을 보내.”
“그래? 난 여기 처음 와보는데 괜찮다.”
수혁은 유리의 말에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학교에 이런 정원이 있는 게 정말 좋은 것 같아. 그건 그렇고 학교생활은 어때?”
“그냥 똑같지 뭐, 수업 듣고 피곤하면 좀 쉬고.”
“하긴 학교생활이 거기서 거기지. 근데 수혁아 너 전학생 온 거 들었어?”
“응, 들었어.”
수혁은 흠칫 놀랐으나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차분히 대답했다.
“참네, 무슨 연예인이라도 왔나? 반 남학생들 중에 나쁜 애들은 아니지만 허세 부리는 애들이 있는데.”
‘우리 반으로 치면 배종명 같은 애들 인가보군.’
그는 유리의 말을 들으며 생각했다.
“걔들이 허구한 날 옆 반으로 가서 전학생보고 오고 그러더라고.”
말을 듣고 있던 수혁은 잠시 고민을 하다가 조용히 말을 꺼내었다.
“유리야, 그 전학생 있잖아.”
“응.”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이렇게 말하기 좀 그런데.”
“왜? 뭔데?”
유리는 궁금하다는 듯 수혁을 쳐다보았다. 그는 궁금해 하는 유리를 보며 신중하게 이야기를 꺼냈다.
“전학생이 위험한 애일지도 모르니까 조금 조심했으면 해서.”
“왜? 걔가 뭐 잘못한 거라도 있어?”
유리는 뜬금없는 수혁의 말에 궁금증이 생겼다.
“아니, 막 잘못하고 그런 것은 모르겠는데. 그냥 나 믿고 조심해주면 좋겠어.”
“그래, 알겠어!”
“응? 이렇게나 빨리?”
수혁은 너무나 빠른 그녀의 반응에 놀랐다.
“네가 나한테 일부러 이런 이야기 할 사람도 아니고 또 친구가 이야기하는데 믿고 들어야지, 네 말대로 혹시 마주치거나 그러면 조심하도록 할게.”
수혁은 유리의 대답을 들으니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유리는 날 믿는 구나’
그들은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대화를 나누었고 점심시간이 지날즈음 각자 반으로 돌아갔다.
* * *
학교가 끝나자마자 수혁은 집으로 향했다. 그는 돌아오는 길에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이상해. 과거와 달리 반이 다른 것도 그렇고. 5반이면 심지어 층수도 달라서 마주칠 일도 거의 없을 거 아니야.’
집에 도착한 수혁은 곧장 도움말을 켰다. 그리고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 물어보았다.
“전생과 비교했을 때 사건이 바뀐 것 같은데 어떻게 된 거야?”
<어플 사용으로 인해 발생한 사용자의 변화는 과거에는 없었던 인연을 만나게 하거나 다른 사건들을 유발시킬 수 있습니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조성준의 반이 아예 바뀌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잖아. 이것은 내 의지랑 아무 상관이 없다고.”
도움말의 설명이 부족하다고 느낀 수혁은 마음이 답답해졌다.
<그 부분은 최근에 히든퀘스트를 완료하며 상승한 운과 관련이 있습니다.>
“운? 그래, 그런 일이 있었지. 그럼 내가 전생에서 조성준과 같은 반이 된 것은 내가 운이 없었기 때문 인거야?”
다소 황당한 설명이었지만 수혁은 자세한 것을 알아보기로 했다.
<그렇습니다. 과거 생에서 사용자는 운이 없었기 때문에 조성준과 같은 환경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조성준에게 선택되어 집중적으로 괴롭힘을 당하게 된 부분도 운과 연관이 있습니다.>’
“그래, 운의 영향이라고 치자, 그럼 일전의 히든퀘스트가 운이랑 어떻게 연관이 된 건데? 책을 찾고 난 후 운이 오르는 것에 대한 인과관계를 난 잘 모르겠는데?”
수혁은 설명을 들었지만 히든퀘스트와 운이 왜 연결 되는지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았다.
<운에 관련된 영역은 다른 스텟과 달리 사용자의 내밀한 영역이라서 저희도 설명하기 힘듭니다. 단지 알 수 있는 것은 히든퀘스트 수행 중 있었던 모종의 어떤 행동이나 사건들이 사용자의 운을 높이는데 기여했다는 것입니다.>
‘답답하네, 그러면 프로그램은 운 퀘스트를 어떻게 부여한다는 거야? 이치상 말이 안 되잖아.’
프로그램 특성상 스텟의 향상을 위해 사용자에게 퀘스트를 줄 때는 스텟 발전과 관련된 행위를 수혁에게 권해야 했다. 하지만 프로그램도 설명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어불성설이었다.
<다른 스텟과 달리 운은 프로그램에 의해 관련 퀘스트가 부여되지 않습니다.>
수혁의 생각을 읽은 도움말은 바로 대답을 했다.
“뭐라고?”
답변을 확인한 수혁은 퀘스트 창을 켠 뒤 운에 대한 항목을 누르려 시도했다. 그러나 다른 스텟들과 달리 운에 관련된 항목은 클릭이 되지 않았다.
‘신기하네. 전에도 느낀 적이 있지만 어플에는 일종의 제약이 있구나.’
<프로그램은 최선을 다해 사용자의 향상과 목적달성에 필요한 편의를 제공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법칙과 관련된 부분은 프로그램도 함부로 건들 수 없습니다.>
‘알 수 없는 이야기야. 계속 고민해봤자 답이 안 나오겠어. 그냥 이럴 시간에 수련을 하러가는게 낫겠다.’
어플의 설명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수혁은 체육관에 가서 훈련에 전념했다.
그는 평소처럼 가볍게 스파링을 한 뒤 종욱에게 기본동작에 대한 교육을 받으며 샌드백을 두드렸다.
“점점 나아지는데?”
종욱은 샌드백을 치는 수혁을 보며 말했다.
“아직 멀었어.”
수혁은 칭찬에 안주하지 않고 스스로를 더욱 몰아붙이며 훈련에 몰두했다.
* * *
다음 날이 되어 학교에 온 수혁은 촉각을 곤두세우며 무슨 일이 생길까 싶어 틈틈이 성준을 관찰 했지만 예상과는 달리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학교는 평화로웠고 전학생에 대한 이야기는 여전히 흘러나왔지만 이조차도 조금씩 잊혀져가는 것처럼 보였다.
‘과거가 변한 영향으로 그냥 별일 없이 지나가게 되는 건가?’
수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수혁은 방에 누워 고민을 했다.
‘뭔가 맥 빠지는 데? 전학 온 지 3일이 지났는데도 아무 일도 없잖아.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훈련은 계속해야겠어.’
수혁은 알 수 없는 답답함을 느꼈지만 방심하지 않고 수련을 계속했다.
훈련을 그만두고 사업을 준비해볼까 생각도 했지만, 성준이 학교에 있는 이상 안심하기는 힘들었다.
수혁의 예상대로 성준은 그저 조용히 있을 인물은 아니었다. 일주일 쯤 지난 어느 날 수혁은 반에서 수상한 대화를 엿들을 수 있었다.
“야, 오늘 수업 끝나고 승원이네랑 다른 반애들 전부 모일 것 같다.”
종명이 자기 친구들에게 이야기를 했다.
“아, 그래? 근데 나는 왜 안 부르지?”
무리 중 한명이 서운하다는 듯 말했다.
“나도 잘 모르겠어, 조성준이 승원이한테 이야기해서 몇 몇을 지목한 것 같아, 너만 그런 것은 아니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
종명은 서운해 하는 친구를 안심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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