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어디에서 모이기로 했어?”
“학교 끝나고 선도부실에서 보기로 했어. 성준이가 선도 부장한테 직접 이야기해서 빌렸나봐.”
종명이 말했다.
“역시 사람은 능력이 있고 봐야 한다니까.”
‘조성준, 역시 가만히 있을 사람은 아니지. 뭔가 꾸미고 있는 것이 분명해. 그런데 나랑 무슨 상관이 있지?’
수혁은 그들의 대화를 듣고 생각했다.
그러나 처음에는 신경을 곤두세우고 그들의 말을 들었던 거와 달리 성준에 대한 관심은 점점 식어갔다.
‘내가 왜 이런 것들을 신경 써야 되지? 이 학교 선생들부터 시작해서 학생들까지 누구 하나 내가 힘들 때 도와준 적이 있었나?’
수혁은 성준이 뭔가 일을 벌일 것을 직감하였으나 반도 달라지고 괴롭힘을 당할 일이 없다는 판단이 서자 차가운 마음이 들었다. 그는 과거 자신이 힘들고 괴로울 때 냉담했던 아이들에 대한 기억이 떠오르자 유리를 제외한 어느 누구에게도 정을 붙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 조성준이 뭘 하든 내 알바 아니지. 마음이 내키지 않아. 어쩌면 나는 별 일없이 지나갈지도 몰라. 대비는 하되 남는 시간은 이제 사업을 준비하는 데 쓰자.’
수혁은 그렇게 마음을 정리하고 성준에 대해서는 신경을 꺼버렸다. 수혁은 학교가 끝나자 바로 체육관으로 향했다.
‘오늘까지는 훈련을 하고 내일은 오랜만에 칸타빌레에 가서 내가 준비할 수 있는 것이 뭔지 알아봐야겠어.’
그는 사업을 하는데 필요한 단서를 찾기 위해 유용한 자료들이 많은 서점에 들르기로 마음 먹었다.
그날 오후 선도부실
“종명아, 왔어?”
“응.”
선도부실에는 열다섯 명의 학생들이 한데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야, 근데 생각보다 별로 안 모였다. 총 열반인데 겨우 열다섯 명 뿐이네?”
“대부분 한 반에서 한 명만 호출됐고 두 명인 곳은 몇 반 안 돼.”
“야, 그런데 성준이는 왜 이런 자리를 만들었지?”
“중요한 이야기가 있는 것 같기는 한데.”
학생들은 저마다 이야기하며 오늘 모임의 목적에 대해 추측하고 있었다.
“어쩌면 중앙회에 관련된 이야기를 하려고 우리를 부른 걸 수도 있지.”
종명은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웃고 있었다.
“너무 앞서가는 거 아니야? 우리가 뭐라고 중앙회를 들어가냐?”
“그래도 혹시 모르지.”
아이들은 제각기 종명이 꺼낸 화제를 두고 자신의 의견을 이야기했다.
“야, 승원아. 넌 같은 반이니까 뭐 들은 거 없어? 성준이가 왜 모이라고 했는지?”
무리 중 누군가가 물었다.
“그래. 너는 뭐 들은 거라도 있을 것 아냐?”
다른 아이들ᆢ도 이를 거들었다.
“나도 성준이가 왜 우릴 불렀는지는 모르겠어. 그러나 한 가지 짐작할 수 있는 건 이 모임을 예전부터 계획하고 있었다는 거야.”
“그럼 그렇지, 일주일이나 지나서 갑자기 부른다는 것이 조금 이상하긴 했어.”
종명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척을 했다. 그렇게 저마다 설왕설래하며 대화를 나누고 있는 와중에 성준은 약속시간보다 20분이 더 지나서야 선도부실에 들어왔다.
“야, 애들 다 모였냐?”
“응, 성준아. 네가 따로 부르라고 했던 애들 다 모였어.”
성준이 물어보자 승원은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대답을 했다. 그는 대꾸하지 않았고 선도부실에 있는 책상에 앉았다.
“우선 잘 왔어, 내가 이 자리를 만든 건 너희들과 같이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야.”
성준은 교복 앞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어 불을 붙이면서 말했다.
“그래, 우리도 네가 왜 불렀는지 궁금하던 차였어. 우리랑 뭘 같이 하고 싶은데?”
종명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어보았다. 그러자 성준의 얼굴이 싸늘하게 변했다.
“야, 너 이름이 뭐야?”
성준은 담배를 피우며 종명에게 물었다.
“나? 배종명.”
“종명아. 말 끊지 말자. 그러다가 죽는다.”
“…….”
종명은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깨닫고 성준의 눈치를 살폈다.
”저 돼지새끼도 그렇고 궁금한 애들이 많은 것 같아서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자. 내가 앞으로 상납금을 좀 걷을까 하는데, 걷는 방법과 너희들의 역할을 알려 줄게.”
성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선도부실 안에 소란이 일기 시작했다.
“상납금?”
“설마, 애들한테 돈을 걷겠다는 거야?”
“이 새끼들이, 야!”
성준은 짜증이 났는지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러자 웅성대던 아이들은 금세 조용해졌고 성준의 말에 집중했다.
“궁금한 거 있으면 내 말 끝나고 물어봐, 알았어?”
“저, 성준아 진짜 미안한데… 상납금을 걷는 건 우리학교에서 쉽지 않을 것 같아.”
으름장을 놓는 성준 앞에서 승원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성준은 승원이 말을 듣지 않아 화가 났지만 같은 반이기도 하고 앞으로 이용할 일이 많을 것 같아 꾹 참고 말했다.
“말해봐. 왜 안 되는데?”
“그게…… 너도 알다시피 우리학교에 잘사는 애들이 많이 다니거든, 너 정도는 아니어도 나름 괜찮은 집 애들이 많아서 잘못 건들면 일이 커질지도 몰라.”
승원은 최대한 성준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식은땀을 흘리며 말했다. 그러자 성준은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멍청한 새끼야! 내가 그 정도 생각도 못 할 줄 아냐?”
성준은 자신이 갖고 온 쇼핑백에서 프린트된 종이 다발을 꺼내며 말했다.
“학교에 내 말을 잘 듣는 꼰대 한 명 있거든? 내가 그 사람에게 부탁해서 2학년 학생들 성적과 인적사항, 그리고 생활 기록부를 체크하고 상납명단을 뽑았어.”
성준은 서류들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고 아이들은 종이를 하나씩 집어 읽어보았다.
명단에는 각 반 별로 몇 몇 학생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한 반에 대략 열 댓명 정도의 아이들이 선정되어 있었는데 이름 옆에는 걷고자 하는 상납금의 액수가 적혀 있었다.
“뭐야? 여기에 내 이름도 있는데?”
“어? 나도 그러네? 거기다 내야하는 돈도 다른 애들 2배야.”
명단에 자신의 이름이 적힌 것을 확인한 아이들은 다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성준은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치며 소리를 질렀다.
“이 새끼들이 진짜, 다들 주둥이 찢어버리기 전에 조용히 해라.”
성준의 살벌한 엄포에 선도부 실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그는 다시 담배를 하나 꺼내 입에 물고는 느긋하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궁금할 만 해. 같이 일하는데 왜 2배로 돈을 내야 되는지, 어떤 면에서는 좀 황당하기도 하겠지. 하지만 내 설명을 들으면 금방 이해가 될 거야, 그러니까 다들 깝치지 말고 내 말부터 들어.”
아이들은 성준이 의외로 설명을 해줄 것처럼 보이자 그에게서 어떤 말이 나올지 초조하게 기다렸다.
“먼저 상납자 선정 기준을 알려주지. 나는 먼저 인적사항을 확인해서 건드렸을 때 좀 시끄러워 질 것 같은 애들은 뺏어, 공부 좀 하는 애들도 마찬가지고. 왜냐하면, 걔네들은 학교의 중요자산이라 특별 관리되고 있거든. 그러면 남은 애들은 누구일까?”
성준은 목이 탔는지 냉장고에서 음료수를 하나 꺼내 벌컥벌컥 마신 후 말을 이어갔다.
“남은 애들은 상납금을 걷어도 문제가 없는 애들이야. 너희들도 그런 애들이라서 내가 명단에 올린 거고.”
“우리 집이 너희 집 정도는 아니지만, 우리 부모님한테 이야기하면 날 건들진 못할 걸?”
자존심이 상한 한 학생이 소심하게 이야기 했다. 그러자 성준이 그를 비웃으며 말했다.
“재밌는 새끼네 이거, 응? 너 정도는 내가 어떻게 해도 아무도 신경 안 쓸걸? 너 이 학교 이사진이랑 교장을 포함한 선생들까지 누구편인지 감이 안 오지?”
성준은 자리에서 일어나 앞서 말한 아이에게 다가서며 말했다.
그는 두려움에 떨며 바닥만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 아버지랑 경찰 서장이 친한 선후배 사이인 건 몰랐지? 너 같은 놈은 내가 반쯤 죽여 놔도 그냥 넘어갈 거야. 너, 내가 무슨 짓을 저지르고 이 학교 오게 됐는지 모르지? 그리고 나 열 받게 하면 학교생활 무사히 마칠 수 있을 것 같아?”
이야기를 들은 아이들은 반박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충격에 휩싸였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명단에 적힌 학생들은 무슨 짓을 당해도 성준에게 대항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야, 다들 멍 때리지 말고 지금부터 집중해. 아주 중요한 이야기니까.”
성준은 충격에 빠진 아이들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너희는 2배씩 내잖아, 그래서 내가 보상을 좀 해주려고. 첫 번째는 다른 학교 애들이 못 건들게 해줄게. 사실 이건 모두에게 해당하는 메리트니까 돈을 걷는 명분으로 너희가 활용해도 괜찮을 거야.”
선민고등학교 학생들은 종종 다른 학교 불량배들에게 삥을 뜯기곤 했는데 성준은 그것을 근절해준다고 약속한 것이었다.
“저, 그 성준아.”
“아이씨 진짜.”
성준은 승원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그, 그게 명단에 보면 걷을 돈은 없고 별표만 쳐져있는 애는 뭔가 해서…….”
“아, 난 또 뭐라고. 그건 마지막에 이야기해줄게, 좀 기다려.”
승원의 질문이 마음에 들었는지 성준은 금세 표정을 풀었다.
“명단에 있는 10만원으로 표시된 애들이 너희가 직접 상납금을 걷어야 되는 애들이야, 돈을 걷을 때 반항하거나 내는 것을 거부하면 날 얼마든지 팔아도 돼. 그래도 튕기는 자식들이 있으면 나한테 연락주면 해결해 주지. 하나 팁을 주자면 아까 내가 너희들한테 했던 방식으로 애들을 다루면 어지간해서는 말들을 들을 거다.”
아이들은 성준이 자신의 배경을 근거로 협박했던 것을 떠올렸다.
“그리고 돈 내는 애들을 잘 관리하면 상납금의 20퍼센트는 너희들이 가져도 좋아, 애들만 잘 관리하면 너희 돈으로 상납금 낼 필요가 없을 뿐만 아니라, 너희 용돈도 챙길 수 있는 거지. 그리고 내가 너희들 뒤를 봐줄 테니까 자부심을 가져.”
상납금의 20퍼센트를 주겠다는 성준의 말은 승원을 비롯한 아이들이 그의 말을 따르도록 하는데 필요한 미끼나 다름없었다.
“그럼, 넌 하는 일이 뭐야?”
종명이 이야기를 듣다가 궁금해서 물어보았다. 그러자 성준은 그를 매섭게 노려봤다.
“이 새끼가 감히, 휴. 기분이 더럽지만 알려주지, 난 너희들이 돈을 잘 걷는지, 헛짓거리는 안 하는지 관리할 거야. 그러니까 딴생각 말고 그냥 일만 제대로 하라고. 내가 너희들한테 주는 특권을 즐겨. 너무 설치지는 말고.”
“그래, 알았어.”
종명은 이해를 한 듯 고개를 끄덕이다가 가장 궁금했던 점을 물어보기로 했다.
“대충 어떤 계획인지는 알겠어, 그럼 마지막으로 아까 했던 질문인데 우리 반 같은 경우는 강수혁이 별표가 쳐져 있는데 이런 건 어떤 경우인거야?”
그러자 성준이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대답을 했다.
“별표 쳐져 있는 애들은 그냥 거지들이야, 상납금을 받을 거란 기대를 할 수 없는 애들. 그런 애들은 그냥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면 돼, 셔틀이나 뭐 그런 거 있잖아. 이것도 내가 너희에게 주는 일종의 선물이야.”
‘아, 강수혁은 장난감이구나.’
종명은 속으로 웃음을 지으며 생각했다.
그는 명단을 살펴보다가 친한 친구의 이름이 적혀있는 것을 발견했다.
“미안한데, 얘는 집이 어느 정도 사는데 왜 이 명단에 있는 거야?”
명단을 잠시 살펴보던 성준은 웃으며 말했다.
“하하, 얘가 네 친구야? 걔네 아버지가 제법 괜찮은 회사를 가지고 있던 건 맞는데 알고 보니 IMF 때문에 망했더라고. 그런 놈은 인생에 도움이 안 되니까 빨리 버리는 게 좋을 거야. 자, 이제 진짜 마지막 질문 받는다.”
그러자 아이들 중 한 명이 정말 조심스럽게 손을 들며 말했다.
“상납금은 그냥 낼 테니까 애들한테 돈 걷는 일은 안 할 수 없을까? 난 그냥 가벼운 마음으로 왔는데 상납금을 걷는 건 내가 감당하기에 너무 버거운 것 같아.”
그 말을 듣자 성준의 얼굴이 무섭게 변했다.
“하……새끼 감당할 자신 있으면 마음대로 해.”
“아니야, 할게. 안 한다는 의미로까지 말한 거는 아니었어.”
질문을 했던 아이는 성준이 자신을 죽일 듯이 노려보자 당황한 기색으로 손을 내저으며 이야기했고, 성준은 그 대답을 듣자 씩 웃으며 이야기를 했다.
“새끼, 그럴 줄 알았다. 그럼 내일부터 명단에 있는 애들한테 돈 준비하라고 말해놔. 상납금은 2주 후에 걷는다. 다음 모임은 2주 뒤고 상납금 걷은 후 매달 한 번씩 모일거야. 그만 해산해라.”
말을 마친 성준은 의자에 앉아 담배를 피웠고 아이들은 밖으로 나갔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투덜대며 학교를 빠져 나갔지만 종명은 달랐다.
‘일이 쉽진 않겠지만 잘만하면 성준이가 중앙회에 들어오라고 할 수도 있어. 이건 기회야.’
종명은 망상에 빠져 스스로를 위로하며 집으로 돌아갔다.
- 20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