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밖에서 이러고 있는 거보다 서점에 가서 기다리는 게 낫겠어.’
수혁은 남는 시간 동안 칸타빌레에 가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그는 결정을 한 후 서점으로 향했다.
‘할아버지가 오신 거 같은데?’
수혁은 서점 불이 켜져 있는 것을 확인했다.
“할아버지, 계세요?”
“하하 학교가 벌써 끝났나 보구나. 잠시만 기다려라, 약속 전에 같이 저녁이나 먹자.”
“네, 할아버지.”
책장 이곳저곳을 움직이며 책을 정리하던 평우는 수혁을 보고는 활짝 웃었다.
그는 책을 꺼내어 책장을 깨끗이 닦고 있었다. 그리고 오래된 책들은 덮개를 씌워 손상을 방지하는 작업을 하는 중이었다.
“뭔가 되게 열심히 하시네요.”
한창 일에 열중하는 평우에게 수혁이 말을 걸었다.
“너한테 나중에 고서들을 물려주려면 깨끗이 책을 보관해야지. 곰팡이가 심하게 든 책들은 최근에 모두 약품처리를 했는데 쉽게 제거되지 않아 무지 애먹었다. 그리고 얼마 전에는 환풍기도 싹 갈았어. 관리를 안 하니 먼지가 끼고 작동도 엉망으로 되더구나.”
“고맙습니다. 그런데 이제 약속 시간이 많이 안 남았는데 가봐야 하지 않을까요?”
수혁은 시간을 확인하고는 말했다.
“그래, 조금만 기다려라. 이것만 하고 밥 먼저 먹으러 가자.”
평우는 마지막 책의 덮개를 씌우는 것을 끝으로 작업을 마무리했고 수혁을 데리고 근처 국밥집에 갔다.
서점 근처에 있는 국밥집은 허름한 곳이었는데 역사와 전통이 깃들어 보이는 곳이었다.
“여기 콩나물국밥 2개요. 수혁아 여기 국밥은 콩나물국밥이 제일이다. 주인 고향이 전주인데 고장의 맛을 그대로 살렸어.”
“기대되네요.”
평우가 주문하자 잠시 후 사장은 국밥을 가지고 왔고 둘은 먹기 시작했다.
수혁이 한참 국밥을 먹고 있는데 평우가 조그만 종이가방을 건넸다.
“이게 뭐에요?”
두 손으로 종이가방을 받은 그는 평우에게 물어보았다.
“열어보아라.”
수혁이 종이가방 속을 들여다보자 두꺼운 종이와 같은 재질로 포장된 핸드폰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포장을 뜯어 내용물을 확인했는데 과거라 그런지 핸드폰은 현대의 그것과 달리 길쭉하고 상당히 두꺼워보였다.
“이건 핸드폰이 잖아요.”
내용물을 확인한 수혁이 놀라 말했다.
“그래, 앞으로 무슨 일이 있으면 그걸로 연락해라. 그리고 핸드폰비도 다 내가 내는 것으로 했으니 부담 없이 사용해라.”
“할아버지 저는 받을 수 없어요, 저한테는 좀 과분한 것 같아요.”
뜻밖의 선물에 부담을 느낀 수혁이 손사래를 치며 거절을 하자 평우는 짐짓 엄한 표정을 지으며 이야기했다.
“할아버지가 손자 핸드폰 하나 장만해준 것이 뭐가 과분한 것이냐, 그냥 네가 앞으로 잘 사용하면 그걸로 족하다.”
“하지만.”
“됐다, 밥 먹자.”
수혁은 뭔가 말을 더 이어가려고 했으나 더 이상은 어떤 말도 평우에게 들리지 않을 것 깨닫고 핸드폰을 쓰기로 했다.
“다 먹었으니 그만 가볼까?”
평우는 먼저 나가 계산을 마쳤고 약속시간이 임박한 것을 확인하자 수혁을 데리고 베네치아로 갔다.
음식점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베네치아에 도착한 그들은 지체 없이 문을 열고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오셨어요, 어르신. 학생도 반가워요.”
“안녕하세요.”
손님이 없어 휴식을 취하고 있던 여주인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그들을 반겼다. 그러자 평우는 미리 예약한 자리에 대해 문의를 했다.
“좀 전에 연락해서 자리를 좀 마련해달라고 했는데.”
“네, 시간 맞춰서 자리 비워놨어요, 이쪽으로 오세요.”
그녀는 그들을 카페 안쪽 깊숙한 곳에 위치한 어떤 밀실로 안내했다.
밀실 안은 신발을 벗고 좌식으로 앉을 수 있게 되어있었고 분위기는 고요하고 아늑했다.
방은 과거 카페가 찻집으로 운영될 때 쓰던 곳을 그대로 남겨둔 공간이었다.
“괜찮군, 조금 있다가 사람 한 명이 오면 이쪽으로 안내해줘.”
평우는 방을 둘러보더니 흡족해하며 말했다.
“네 어르신, 잘 모셔올게요. 그리고 마실 것은 어떤 것으로 하시겠어요?”
사장은 주문을 받았다.
“혹시 차가 지금도 되나? 가을이 되니 국화차를 마시고 싶군.”
“국화차를 따로 팔지는 않지만, 저희 아버지가 즐겨 드시는 것이 조금 있습니다. 그걸로 갔다 드리겠습니다. 학생은?”
“저는 그냥 아메리카노로 할게요.”
“알겠습니다.”
주문을 받은 그녀는 문을 닫고 나갔다.
일행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기에 수혁과 평우는 대화를 나누었다.
“이번에 오는 친구가 수혁이 너에 대한 기대가 커.
내가 괜히 부담스러운 자리를 만든 것은 아닌가 걱정이 되는구나.”
평우는 염치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수혁에게 이야기했다.
“아니에요, 저도 할아버지가 말씀하셨던 그 고서가 어떤 것일까 많이 궁금했습니다.”
“그래, 그러면 다행이고.”
수혁은 평우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실제로도 그리스에서 건너온 고서의 정체에 대한 호기심이 강하게 들었다.
그들이 한참 대화를 나누고 있던 그때 카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고 사장이 누군가를 안내하는 소리가 들렸다.
“형님, 저 왔습니다.”
안내를 받고 방으로 들어온 남자는 평우에게 인사를 했다.
“그래, 왔는가. 이쪽은 예전에 내가 이야기했던 아이야 인사하게.”
중절모를 벗고 수혁에게 인사를 건네려던 노인은 갑자기 놀란 표정이 되었다.
“허허, 세상이 참 좁군, 내가 형님에게 귀한 인재가 있다고 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자네였군.”
수혁은 무슨 말인가 해서 노인을 바라보았다.
‘누구신데 날 알아보시는 거지? 그런데 어디서 뵌 분 같은데? 설마.’
노인의 얼굴은 낯이 익었고 수혁은 금방 그를 알아보았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노인의 정체는 예전에 도서관에서 수혁에게 많은 도움을 준 김우진이었다.
그는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내다 잠시 유럽으로 여행을 떠났었는데 그리스 시골의 어느 벼룩시장에서 우연히 고서를 발견했던 것이다.
“아니 동생, 수혁이를 알고 있던가?”
“예전에 인연이 돼서 도서관에서 서로 철학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곤 했습니다. 그때도 뭔가 범상치 않다고 느꼈었는데 형님이 말했던 사람이 이 학생인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우진은 미소를 지으며 평우에게 말했다.
“저번에 명함만 받고 연락을 못 드려서 죄송합니다.”
“아니야, 그것보다 이렇게 다시 보니 반갑네, 사람 인연은 정말 신기하네그려.”
다시 만난 수혁과 우진은 과거 도서관에서의 추억에 대해서 짧게 담소를 나누었다.
그리고 수혁은 우진에게 그가 평우와 어떻게 특별한 관계가 되었는지를 설명해주었다.
“하하, 형님을 통해 이렇게 다시 본 것을 보면 자네와 나는 만날 운명이었나 보구먼, 그것보다 고서들을 읽을 줄 안다면서? 형님에게 대충은 들었네만 진짜 대단하네.”
우진은 어느 정도 회포를 푼 듯하자 자신의 궁금증을 풀기 위해 질문을 했다.
“아닙니다. 그저 조그만 재주를 가진 것뿐입니다.”
수혁은 그의 칭찬에 차분한 반응을 보였다.
“조그만 재주라니 그러지 않네, 잠시만 기다려보게 내가 자네한테 보여주고 싶은 것이 있네.”
우진은 서류 가방 안에서 종이 다발을 꺼냈다. 수혁이 그것들을 살펴보니 종이 위에 쓰인 글자들은 난해하고 복잡해 보였다.
“내, 사실 형님과 자네를 믿긴 하지만 아무래도 검증이 좀 필요하지 않을까 해서 고대 그리스어로 쓰인 문건을 하나 가져왔네. 참고로 난 이 문건의 내용에 대해서는 이미 빠삭히 알고 있으니 검증에는 문제가 없을 걸세, 실례가 안 된다면 혹시 괜찮겠나?”
평소 신뢰하던 평우가 수혁의 능력을 보증했으나 우진은 중요한 고서를 번역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기에 조금 더 신중해지기로 마음을 먹었다.
“자네 무슨 검증을 한다고 그러는가? 내 말을 못 믿는가?”
“아닙니다. 형님 그런 것이 아니라.”
“저는 상관없습니다. 쉽게 믿기 힘들다는 것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 종이에 쓰인 언어를 해석하면 되는 건가요?”
평우는 우진의 검증행위에 대한 반감을 드러냈지만, 수혁은 망설임 없이 검증에 대한 제안을 승낙했다.
“미안하지만 부탁 좀 하겠네.”
“넵 알겠습니다.”
대답을 한 수혁은 여유로운 태도로 종이를 들고 면밀히 살펴보다가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이 종이에 적힌 언어는 고대 그리스어가 맞습니다.”
언어이해프로그램은 사용자에게 언어능력만 주는 것이 아니라 해석하는 문자와 언어의 정체도 알려주었기에 수혁은 종이에 적힌 글자가 무엇인지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럼 이제부터 내용에 관해 서술해 보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수혁은 언어의 국적을 파악한 것만으로는 우진의 신뢰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본격적으로 내용을 설명하고자 했다.
“알겠네. 천천히 읽어보게.”
우진은 관찰자의 자세로 지켜보았고 수혁은 15분 정도 원고를 읽었다. 그는 내용들을 머릿속으로 정리한 다음 입을 열었다.
“원고 분량이 작지 않으니 이 글의 초반 부분에 관해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
“좋네. 해보게.”
“원고의 초반부에는 법정의 재판관이 소크라테스가 이 재판정에 선 이유에 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죄목으로 열거된 사항들에 대해 하나하나 논리적인 이유를 들며 자신의 무죄를 항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제가 볼 때 이 책은 소크라테스에 관한 책이 아닌가 합니다.”
수혁의 유려한 설명을 들은 우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형님 말이 틀리지 않은 것 같구먼, 맞아 자네가 방금 읽었던 원고는 소크라테스의 제자였던 플라톤이 스승인 소크라테스가 아니스토와 멜리토스에게 고발을 당해 재판을 받고 감옥에서 생활하는 과정을 대화 형식으로 쓴 소크라테스의 변명이라는 책이라네.”
“아, 그럼 소크라테스가 쓴 책이 아니라 그 제자가 쓴 책이었군요.”
수혁은 책을 읽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저자가 누군지는 알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렇다네, 그리고 미안하지만, 검증을 위해서 조금 자세한 부분을 물어봐도 되겠는가?”
우진은 어느 정도 신뢰가 쌓였으나 중요한 고서를 작업할 것을 고려하여 검증을 확실히 하기로 했다.
“책의 첫 부분은 소크라테스가 자신을 사회에 유해한 인물로 보는 자들에 대해서 시민들에게 변론을 하는 부분이네. 지금부터 나는 변론의 내용들을 몇 개 집어 자네에게 물어보려고 하네.”
“알겠습니다.”
“시작하겠네. 대답을 위해서 원고를 참고해도 좋네.”
이미 책의 번역본을 수도 없이 읽어본 우진은 초반 부분에 서술된 유명한 대사를 몇 가지 물어봤다. 그때마다 수혁은 원고를 잠시 읽더니 교수가 기억하는 대사 그대로 정확히 번역하여 읽어 내었다.
“대단하네, 자네 정말 고대 그리스어를 해석할 수 있구먼.”
우진은 검증을 끝내고 확신에 찬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다.
“별거 아닌데 좋게 봐주시니 감사합니다.”
“허허 겸손이 과하네. 오늘 이 자리에 온 이유는 자네도 알겠지만 특별한 책을 감정하고 번역을 하기 위해서라네.”
“그래, 자네가 가져온 것을 한번 꺼내 봐. 나도 궁금하구먼.”
평우는 이전부터 궁금했던 터라 우진을 재촉했다. 그러자 그는 서류 가방을 뒤지더니 조심스럽게 책을 꺼냈다.
- 22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