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고서는 크기가 상당히 커 보였는데, 누군가 두루마기 형태로 보존되어 있던 텍스트를 한 권의 책으로 묶어놓은 것처럼 보였다.
“내가 조금 살펴보니, 이 책은 고대그리스어로 쓰여 있는 듯하네. 고대그리스어는 현대 유럽 언어의 원류가 되는 언어인데 매우 복잡해서 이를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아. 특히 우리나라에는 거의 전무하다고 보면 될 거야.”
우진의 설명을 들으며 책을 건네받은 수혁은 표지를 꼼꼼히 살펴보았다.
‘양을 보니 번역하는데 시간이 제법 걸리겠는데?’
책은 현대의 백과사전 정도 되는 두께였다.
“제가 한 번 읽어봐도 될까요?”
수혁은 우진을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그럼, 그러려고 자네한테 이 책을 보여준 거 아니겠는가?”
허락을 받은 수혁은 책을 펼쳐 20분 정도 조용히 정독했다. 두 노인은 그가 독서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자신들이 주문한 차와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양이 방대해 세부적인 내용은 다 파악하지는 못했지만, 대충 어떤 책인지는 알아냈습니다.”
“뭔가, 알아낸 내용이 있으면 어서 말해주게.”
우진이 기대에 가득 찬 눈빛을 보내자 수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후 책을 설명해나갔다.
“이 책은 기원전 4세기경에 그리스의 한 학자가 무수히 난립하던 소피스트들의 사상과 이론을 한데 모아 정리해둔 책입니다.”
수혁은 천천히 책을 펼친 다음 목차 부분을 우진에게 보여줬다.
“이 부분은 책을 정리한 사람이 수사학, 논리학, 정치학, 전쟁 전술 등, 그 당시 유행했던 학문 분야를 목차로 만들었습니다. 그런 다음, 소피스트들이 주장했던 사상들을 목차에 따라 정리한 걸로 보입니다.”
“이거, 정말 대단하구먼.”
가만히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평우가 한마디 하자 우진도 그 말에 동의했다.
“그렇습니다. 자료가 거의 남지 않은 소피스트들의 이론이라니요.”
소피스트들은 기원전 5세기부터 기원전 4세기까지 그리스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철학사상가이자 교사들이었다. 이들은 그리스 젊은이들에게 출세에 도움이 되는 학문을 가르쳐 돈을 번 사람들이었다.
소피스트의 특징은 진리를 상대적으로 보았기에 특정 분야에 대한 그들의 견해는 굉장히 다양했다고 한다.
“소크라테스나 플라톤과 달리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소피스트들의 사상은 상대적으로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 그들의 사상을 모아 편찬한 책이라니, 정말 어마어마하군.”
우진은 감격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네, 교수님이 아무래도 보물을 찾으신 것 같습니다.”
“이런 책들은 실용성 여부를 떠나서 역사적 가치만으로도 엄청난 의미를 가지고 있지. 혹자들은 소피스트들이 경박하고 수준이 낮다고 하나 이 자료를 통해 고대 그리스에서 유행했던 이론과 사상을 알 수 있게 되는 것만으로도 큰 수확이야.”
평우는 수혁의 말을 거들며 고서를 극찬했다. 고서가 상상 이상으로 귀한 것임을 깨달은 수혁과 일행들이 흥분하여 대화를 나누고 있던 그때, 갑자기 화면이 뜨면서 퀘스트 창이 활성화 되었다.
우진을 만나 고서를 해석한 행위가 퀘스트를 유발시킨 것이다.
<히든 퀘스트가 발생했습니다. 우진과 대화를 잘 마치고 그의 부탁을 들어주십시오.>
‘응, 알겠어.’
히든퀘스트가 뜨면 거절하는 법이 없던 수혁은 마음속으로 수락했다.
“자네, 도대체 이 글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는 건가? 내가 정말 궁금해서 그러네.”
감격에 젖은 우진은 고서를 거침없이 해석하는 수혁의 능력에 호기심이 생겼다.
그러자 평우가 대답을 자처하고 나섰다.
“그건, 내가 대신 답해주지. 수혁이는 어렸을 때부터 언어에 대한 관심이 대단해서 닥치는 대로 외국 서적을 읽었지. 그러다보니 나중에는 남들에게 없는 특별한 언어적 감각이 생겨 전혀 배우지 않은 외국어를 보아도 그 뜻이 유추가 된다고 했었네.”
“그러면 글자의 모양을 보고 일련의 규칙성을 파악하여 뜻을 알아낸다는 겁니까? 수혁군, 이건 정말 놀라운 능력일세.”
‘교수님도 별 의심 안하네?’
평우와 마찬가지로 너무나 쉽게 수혁의 능력을 납득한 우진은 말을 이어갔다.
“자네가 모양의 규칙성을 파악해 의미를 파악한다는 것을 솔직히 믿기 힘드네, 그러나 믿어야겠지.”
“나도 믿기 힘들었기 때문에 자네 마음이 이해가 가네. 그러나 수혁이가 어떤 언어로 쓰였든 간에 그것을 해석할 수 있다는 것만은 틀림없어.”
평우는 다시 한 번 되묻는 우진에게 말했다.
그러나 우진은 이미 평우의 말은 안중에도 없었다.
“자네는 정말 귀한 능력을 가졌어. 현재 고서 수집가들을 비롯한 많은 학자들이 고서들을 소장하고 있지만, 그 내용을 알지 못해 방치하고 있는 것들이 많네.”
“그렇습니까?”
들뜬 감정을 감추지 못하는 우진과 달리 수혁은 평온해 보였다.
“만약, 자네가 우리들의 연구에 도움을 줄 수 있다면 그 가치는 액수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대단한 것이 될 거야.”
“네?”
우중은 수혁의 능력이 학계에 미칠 영향을 생각하며 다양한 가능성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그 이야기를 듣는 수혁의 심정은 복잡해졌다.
‘이거, 단순하게 볼 게 아닌데? 교수님 말씀을 듣고 보니 엄청 대단한 능력이잖아.’
복잡하고 시끄러운 것을 싫어하는 수혁은 간단하게 생각했던 일이 커질 수도 있다는 예감이 들어 조심스러워졌다.
“형님, 수혁군의 능력은 아주 귀중한 것입니다. 이것은 학계에 커다란 파장을 불러올 수 있을 정도입니다.”
우진이 들뜬 목소리로 이야기하자, 평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날이 선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 혹시나 수혁이를 어떻게 이용해볼 생각은 추호도 하지 말게. 저 아이의 인생은 어디까지나 스스로가 선택해야 해. 그리고 수혁이가 원치 않으면 이 일을 외부에 절대 발설해서는 안 될 걸세. 만약 어길 시에 자네와 나의 관계는 끝나는 거야.”
평우가 엄한 표정을 지으며 말하자 우진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를 안심시켰다.
“형님 저도 이 일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수혁군의 의견을 따를 생각입니다. 제가 어찌 저의 학문적 욕심으로 사람을 이용하겠습니까?”
“내 자네를 믿지만, 오늘 했던 말을 가볍게 여기지는 말게.”
우진의 해명을 들은 평우는 좀 전에 비해 표정이 많이 풀어졌다.
“우선 교수님께 도움이 되셨다니 기쁩니다. 저 또한 과거에 도서관에서 도움을 받았으니 이렇게라도 보답을 할 수 있게 되어서 다행입니다.”
수혁은 그들의 대화를 듣다가 천천히 입을 떼며 말했다.
“아니야, 자네가 오늘 나에게 보여준 것은 내가 한 것에 비하면 태양과 반딧불의 차이 정도로 볼 수 있지.”
“과찬의 말씀입니다.”
“허허, 아닐세. 자네가 가진 이 능력은 너무나 귀해서 이대로 두기에는 아깝다는 생각이 드네. 그래서 말인데, 혹시 나를 도와줄 수 있겠는가?”
칭찬일색이던 우진은 갑자기 진지한 어조로 수혁에게 물었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수혁은 퀘스트를 받았을 때 그가 자신에게 부탁을 할 거라는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무슨 부탁인지는 모르지만, 퀘스트를 위해서 일단 수락해야겠다.’
잠시 고민에 빠졌던 수혁은 생각을 정리한 뒤 입을 열었다.
“예, 도와드리겠습니다. 단 도와드리는 일로 인해 제가 번거로워질 일은 발생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 부분은 걱정 안 해도 되네. 자네의 신원을 최대한 숨길 테니. 거두절미 하고 이야기하지. 자네가 이 책을 좀 번역해줄 수 있겠나? 그리고 나는 이 책을 내가 속해있는 대한지식인협회에 발표를 하려고 하네.”
수혁이 제안을 받아들일 것처럼 보이자 우진은 적극적으로 말했다.
그러나 수혁은 신상이 알려지지 않는 것에 대한 확답을 들어야 했기 때문에 대답을 보류하고 그에게 질문했다.
“책 번역은 문제없습니다. 하지만 제 신원은 어떻게 비밀로 하실 겁니까?”
“가장 좋은 방법은 내가 번역했다고 하는 거지. 그러나 학자적 양심 때문에 그럴 순 없고, 가명이나 필명을 만들어서 책을 발표하면 어떨까?”
질문을 예상하고 있던 우진은 지체없이 방법을 제시했다.
‘필명을 뭘로 하면 좋을까?’
생각에 잠긴 수혁은 딱히 떠오르는 필명이 없어 생각나는 대로 말했다.
“네, 그럼 제가 번역해드린 고서들을 월명이라는 필명으로 발표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그거 좋구먼, 사람들이 물어보면 실명은 밝힐 수 없다 말하면 되고 월명은 그 사람의 호라고 설명하면 되지 않겠나?”
평우는 수혁의 의견에 자신의 생각을 덧붙였다.
“그거 좋네요, 아, 그리고 이번 책 이후에도 내가 다른 자료들 번역을 부탁해도 될까?”
“예 문제없습니다. 제 신원만 밝혀지지 않으면요.”
‘다른 자료들도 주시겠다고? 흠, 해야 할 것이 많은데, 퀘스트라 거절할 수도 없고 난감하군.’
수혁은 퀘스트 때문에 승낙했으나 조금 귀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맙네. 정말 고마워. 이런 귀한 일을 하는 사람을 무임으로 부려먹을 수는 없지, 내 협회에 가면 원로로서 자네에 대한 금전적 보상을 논의할 걸세. 이번 고서 작업은 확실히 보상받게 할 거고 더 나아가 협회에 공로가 컸을 때 제공하는 상금이나 연금 혜택 등도 받을 수 있는지 알아보겠네.”
‘뭐야? 그러면 돈을 벌 수 있다는 거야?’
성인이 되면 사업을 하기 위한 자금이 필요했던 수혁은 우진의 말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안전하게 돈을 받을 방법이 필요하겠구먼, 그 부분은 내가 해결하지, 며칠 안으로 문제없는 계좌를 하나 만들어 자네에게 알려주겠네.”
‘대한지식인협회’는 국내의 많은 학자들이 가입한 협회였다.
협회에서는 매달 한 번씩 각 분야의 저명한 학자들이 모여 자신의 성과를 발표하고 사회 발전에 크게 기여한 학자를 선정해 매달 상금을 수여 및 연구비 지원 등을 아끼지 않는 곳이었다. 그리고 협회 영구회원으로 선정될 시에는 매달 지속적인 격려금까지 받을 수 있었다.
“할아버지 감사합니다. 교수님, 그럼 제게 연구에 도움이 될 만한 자료들을 보내주시면 최대한 돕겠습니다.”
수혁은 돈을 벌 수 있는 길이 마련되자 흔쾌히 고서 번역을 도맡아서 하기로 했다.
‘고서를 번역해서 매달 정기적으로 돈을 벌 수 있으면 나중에 사업을 하는데 큰 도움이 될 거야, 게다가 할아버지께서 계좌까지 만들어주신다고 하니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돼.’
그는 번역작업을 통해 사업의 밑바탕을 마련하기로 했다.
“하하, 정말 고맙네. 그럼 이 고서는 작업을 해야 하니까 자네에게 맡기는 게 좋겠군. 번역이 완료되면 편할 때 나에게 연락을 주게. 아, 그리고 시간이 좀 늦었지만 조금 더 이 책에 관해 물어봐도 괜찮겠나?”
“얼마든지요, 제가 아는 선에서 최대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거 참, 든든하구먼.”
시원스러운 답변에 우진은 기분이 좋아졌다.
“당연히 해드릴 수 있는 건데요, 뭘.”
수혁은 은인들을 돕는 것도 좋았지만 돈을 벌 수 있다는 생각에 더욱 강한 의욕이 생겼다.
이들은 카페 영업이 끝날 때까지 책에 관한 담소를 나누었고 카페가 문을 닫자, 급기야 칸타빌레로 자리를 옮겨 다른 고서들을 살펴보며 늦은 새벽까지 시간을 보냈다.
“이제 그만 들어가지, 수혁이는 내일 학교를 가야 해.”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군요. 그러면 일어나시죠.”
새벽 3시가 되어서야 둘은 서점을 떠났고 수혁은 그날 밤 사무실에서 잠을 잤다.
- 23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