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없는 회귀-23화 (23/316)

23화

새벽까지 대화를 나누느라 쪽잠을 잔 수혁은 학교에 가기 위해 일어났다.

그는 고서 번역을 할 계획을 짜며 샤워를 했다.

‘일단 당분간 번역작업에 집중해야겠어. 그리고 번역은 서점에서 해야겠다. 들고 다니기도 부담스럽고 집에서 작업하기도 용이치 않으니까.’

수혁은 막상 고서 번역에 힘쓰기로 결정하자 성준이 조금 신경이 쓰였다.

그러나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당분간 훈련은 쉽지 않겠어. 하지만 미래를 생각하면 돈 버는 것이 더 중요할지도 몰라. 현재 조성준이 날 건드리지 않고 있고 스텟도 그사이 올랐으니 무슨 일이 있어도 괜찮을 거야.’

짧은 기간이었지만 체육관과 마당에서 열심히 수련한 수혁의 스텟은 꾸준히 올라가고 있었다.

힘은 2가 상승하여 22가 되었고 매력, 체력, 정신력도 각각 1씩 상승했다. 샤워를 마친 수혁은 가방을 챙기고 등교를 했다.

‘아 맞다. 이번학기 심화 반 인원을 뽑을 때 참고한다고 오늘 모의고사를 본다고 했는데.’

수혁은 반에 도착해서야 이날 모의고사를 실시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학교는 2학년 수준에 맞는 모의고사를 유명학원에 미리 의뢰를 해놨기 때문에 문제 수급에는 지장이 없었다.

아침 8시 20분이 되자 담임은 두꺼운 봉투를 들고 반으로 들어왔고 학생들에게 책상 간격을 띄게 했다.

“옆 사람이 시험지 못 보게 책상 잘 띄어라. 오늘은 알다시피, 새 학기 들어서 보는 첫 시험이다.학기 초에 보는 의례적인 시험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너희들을 돌아볼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다.최선을 다해서 시험을 치러라.”

담임은 시간을 확인하더니 문제지를 나누어 주었다. 1교시 언어시험을 앞둔 수혁은 시험을 위한 어떤 준비도 하지 않았지만 마음은 굉장히 평온했다.

‘어차피 제대로 공부하지 않았으니까, 큰 의미 두지 말고 최선만 다하자.’

9시 정각이 되자 시험이 시작되었고 학생들은 열심히 문제를 풀었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고 어느새 마지막 교시가 되었다.

‘벌써 끝이군.’

수혁은 마지막 답안지를 제출했다. 첫 모의고사를 마친 그는 의외로 여유로워 보였다.

‘생각보단 잘 본 거 같아.’

수혁은 높아진 지능 수치와 언어프로그램으로 향상된 언어 감각으로 1교시는 무사히 마쳤고 4교시 외국어 영역은 말할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99년 수능부터 도입되는 제2외국어도 완벽히 치러냈다. 2,3교시 수리, 탐구영역은 조금 애먹었으나 예전에 비해서 막히는 느낌은 아니었다.

“왜 하필 우리 때부터 제2외국어를 보냐고.”

“야, 어차피 대학 가는 데 크게 지장 없으니까 신경 쓰지 마.”

학생들은 시험이 끝난 후 하교 길에 삼삼오오 모여 시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다들 오늘은 시험이 끝났다고 쉬겠지만, 난 그럴 수 없지. 빨리 고서 번역을 하러 가야겠다.’

수혁은 헌책방 거리로 가기 위한 걸음을 서둘렀다.

칸타빌레에 도착한 그는 사무실로가 우진이 준 고서를 꺼냈다. 그리고 사무실에 있는 컴퓨터를 켜 번역작업에 들어갔다.

‘최대한 빨리해야겠다.’

무명인 그리스 학자의 인사말, 목차 그리고 본격적인 내용까지 모두 훑어본 수혁은 번역에 몰두 하다 보니 어느새 시계는 10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네, 갈아입을 옷도 안 갖고 와서 이틀 연속 이곳에서 자는 거는 어렵겠군, 오늘은 집에 가고 내일부터는 아예 갈아입을 옷을 다 가지고 여기에 와야겠다.’

수혁은 책을 서랍 안에 넣고 문단속을 한 뒤 서점 밖으로 나왔다.

‘가을 냄새가 나네.’

가을이 제법 진행되어서일까, 수혁은 밤공기에서 가을에 나는 묘한 향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헌책방 거리를 빠져나와 동네로 가는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그런데 누군가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수혁아!”

수혁은 낯익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 뒤를 돌아보았다.

“어? 유리구나.”

목소리의 주인공은 유리였다.

그녀는 진이 빠진 표정으로 수혁의 뒤에서 계단을 올라오고 있었다.

“수혁아, 왜 이렇게 빨라, 같이 가자.”

“응.”

그는 유리를 기다렸고 둘은 발을 맞춰 같이 계단을 걸었다.

“오늘 시험은 어땠어?”

유리가 먼저 수혁에게 말을 걸었다.

“아, 그냥 평소보다는 조금 더 잘 봤던 거 같아.”

“그래? 잘됐다. 나는 이번 시험에서 외국어가 어려웠던 거 같아. 자신 있던 과목인데 오늘은 조금 틀렸더라고.”

“그렇구나. 그래도 평소 너라면 잘 봤을 거 같은데?”

수혁은 유리가 공부를 잘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답안지로 채점해봤는데 전하고 비슷하게 나왔어, 그런데 몇 문제를 어이없이 틀렸어, 설마 외국어에서 내가 모르는 개념이 나올 줄이야.”

유리는 분한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시간도 늦었는데, 지금은 어디서 오는 거야?”

그녀의 기분이 씁쓸해 보이자 수혁은 대화 소재를 바꾸었다.

“시험 끝나고 애들 다 하교하는데 집에 가면 뭐하나 싶더라고. 그래서 난 그냥 학교에 남아 오답 정리하고 몰랐던 개념들을 공부했어. 넌 뭐하다 이제 오는 거야?”

“나? 난 잠깐 바람 좀 쐬고 왔어.”

수혁은 굳이 자신이 하는 일을 밝히고 싶지 않았기에 그녀의 질문을 가볍게 받아넘겼다.

그리고 유리도 그런 수혁에게 질문을 계속하지는 않았다.

“야, 근데 수혁아 너 머리 좀 잘라야겠다. 머리가 너무 덥수룩해서 눈도 안 보여.”

유리는 길게 자란 수혁의 머리를 보며 말했다.

그는 여름방학이 시작된 이래로 미용실을 가지 않았고 최근 사이 머리가 많이 자라 어느새 앞머리는 눈을 다 가리고 남을 정도였다.

“흠, 많이 자라기는 했네, 한 번 자르기는 해야겠다.”

“그래? 그럼 나랑 주말에 같이 시내 가서 머리 자를래?”

“응? 미용실을 같이 가자고?”

살면서 한 번도 이성에게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없던 수혁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시험도 끝났는데 중간고사 전에 머리 좀 식히고 싶어서 그래, 너 머리 자르고 나면 시내 구경도 하고 그러자.”

“그래, 좋아.”

수혁은 고서 번역으로 많이 바빴지만 회귀한 후 쉬지 않고 달려왔기에 한 번쯤은 쉬어도 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유리와 함께하는 시간이 낭비라고 여겨지지 않았다.

“그럼, 토요일 수업 끝나고 학교 앞 문방구에서 보자! 늦었는데 조심히 들어가 수혁아.”

“응 너도.”

동네 청과점 앞에서 유리와 헤어진 수혁은 집으로 가는 골목으로 들어가는 그녀를 보이지 않을 때까지 지켜보다가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주말에 유리랑?’

이성과 주말에 시내를 구경하는 것은 회귀 전의 수혁에게는 꿈과 같은 일이었다.

그는 밝은 성격을 가진 유리가 마음에 들었다. 비록 해야 할 일이 많기에 이성과 사귀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괜히 설레는 기분이 들었다.

‘휴, 이게 뭐라고 마음이 싱숭생숭하네. 자기 전에 운동 좀 하다 자야겠다.’

수혁은 밝은 달빛을 받으며 집으로 돌아갔고 도착하자마자 옥상 마당으로 가서 훈련을 하며 마음을 정돈했다.

* * *

개학 후 첫 시험을 치룬지 이틀이 지났다.

학교 분위기는 점점 변하여 예전과 같지 않았다. 아침에는 항상 친구들과 시끄럽게 떠들던 아이들이 말없이 공부를 하거나 아니면 엎드려서 자는 경우가 많아졌다.

“야, 너 요즘 왜 그래?”

반장인 정식은 자신의 옆에 앉은 박현우에게 물었다.

“뭐가?”

고개를 숙이고 멍하니 있던 현우는 힘없이 대답했다.

“아니, 좀 이상하잖아. 통 기운도 없고 왜 그러는 거야?”

“그냥, 모의고사 이후에 무리하게 공부해서 그런가 봐. 맨날 피곤하네.”

“뭔 소리야? 네가 언제부터 공부를 했다고.”

정식은 현우가 평소 공부와는 거리가 먼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황당해했다.

“너만 공부하는 줄 아냐? 나도 이제 곧 고3이야. 됐고 좀 쉴게.”

현우는 피곤하다는 듯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야, 그럼 왜 요즘은 배종명이랑 안 노냐? 너 2학년 들어와서는 나보다 종명이랑 더 친하게 지냈잖아.”

정식은 현우의 반응이 시원치 않자 눈살을 찌푸리며 물어봤다.

“아, 그냥 좀 피곤하다고.”

정식이 종명의 이름을 언급하는 순간 현우는 갑자기 짜증을 내었다. 그는 급기야 대화를 피하기 위해 그냥 책상에 엎어져 버렸다.

“뭐야? 도대체, 걱정해줘도 난리야.”

보통 때와 다른 반응에 정식은 미심쩍은 표정으로 현우를 보다가 잠시 멈췄던 공부를 다시 했다.

이 시각 수혁도 학교에서 뭔가 이상한 기류가 흐르고 있다는 것을 감지하고 있었다.

‘조성준이 학교에서 애들을 또 괴롭히고 있는 모양이네.’

일례로 수혁은 쉬는 시간에 매점에서 초콜릿 바를 산 뒤 테이블에 앉아 먹고 있었다.

그런데 한 학생이 헐레벌떡 뛰어오는 것을 보았다.

“저 여기 빵하고 음료수 사 갈게요. 빨리 계산해주세요.”

남학생은 급하게 빵과 음료수를 사 갔는데 몇 분 지나지도 않아서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는 다른 것을 사더니 다시 반으로 뛰어 올라가는 것이었다.

‘재는 뭘 잘 못 샀나? 뭐가 저렇게 급하지? 하긴 곧 수업 시작하니까 바빠서 그런가 보지.’

수혁은 이 일에 대해서 별로 신경 안 쓰고 넘어갔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여러 아이들이 남학생과 비슷한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을 수혁은 발견했다.

그들의 얼굴은 긴장감이 어려 있었고 누구한테 쫓기듯 다급해 보였다.

‘후, 저 표정, 행동 많이 익숙하다. 과거에 조성준 빵 셔틀을 해봐서 잘 알지. 저 녀석들 지금 누군가에게 시달리고 있는 거구나. 아마 조성준일 테지.’

그들의 행동에서 과거의 모습이 떠오른 수혁은 성준이 전생과 마찬가지로 누군가를 지목하여 노예처럼 부리는 모습이 상상되었다.

‘딱하지만 더는 생각하고 싶지 않아, 뭔가 마음만 심란해지는 기분이야.’

수혁은 과거의 자신과 비슷한 처지가 된 아이들을 보면서 연민의 감정도 들었지만, 대부분의 학생들이 아무도 자기를 도와주지 않았던 사실이 마음에서 올라왔다.

‘머리가 아프다, 반으로 돌아가자.’

그는 기억을 떠올릴수록 과거의 상처가 자신을 옭아매는 것을 느껴 생각을 중단하고 반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담임이 아침 조회를 위해 반으로 들어왔다.

“어젯밤에 모의고사 채점이 완료되었고 석차까지 모두 나왔다.”

“아. 벌써 나왔어?”

“휴, 난 모르겠다.”

담임이 조회시간에 청천벽력과 같은 말을 하자 곳곳에서 탄식이 나오기 시작했다.

“내가 지금부터 호명하는 사람은 나와서 성적표 받아가라. 그 전에 우리 반 1등을 발표하겠다. 이번에 정식이가 반 1등을 했고 문과에서 8등을 했다. 다들 박수.”

“와, 1등이야? 대단하다.”

“원래 잘했잖아.”

‘영어 시간 이후 공부시간을 더 늘린 것이 효과를 보는구나.’

주변에서는 칭찬하는 소리가 흘러나오자 정식은 기분이 좋아졌다.

“애들아, 조용! 그리고 우리 반에 1학기 모의고사 때보다 성적이 엄청나게 오른 친구가 있다. 강수혁, 앞으로 나와라.”

‘뭐야 갑자기?’

수혁은 별 관심이 없었기에 자리에서 몰래 복싱교본을 읽고 있다가 갑작스럽게 자신의 이름이 호명되자 깜짝 놀랐다. 그리고 의외의 이름이 담임의 입에서 나오자 아이들은 충격에 빠졌다.

- 24화에 계속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