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없는 회귀-26화 (26/316)

26화

“이제 제법 밤공기가 서늘하구나, 몇 주만 더 지나면 완연한 가을이 되겠어.”

“그러게요. 가을 냄새가 나는 것 같아서 기분이 편안하네요.”

수혁과 평우는 커피와 차를 마시며 간단한 대화를 나누었다.

“수혁아, 내가 맨 날 물어보는 거지만 학교생활은 괜찮으냐?”

“예, 항상 똑같죠 뭐.”

평우는 자리를 고쳐 앉고 진지하게 물었다.

“수혁아, 학교에서는 어떻게 지내는지 잘 모르겠지만 난 너의 학교생활이 즐거웠으면 한다. 기우였으면 좋겠지만 학교 이야기를 나누려고 하면 왠지 네가 피하는 느낌이 드는구나.”

수혁은 평우의 말을 듣고 잠시 멈칫했다.

‘할아버지한테는 솔직하게 이야기해도 괜찮겠지?’

마음을 정한 수혁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게, 오랜만에 학교에 가서 그런지 생각보다 마음을 못 붙이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그래? 학교에서는 기분이 어떠냐?”

평우가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수혁은 표정이 굳어졌다.

“사실 학교에 있으면 왠지 모르게 답답해요, 선생님이나 아이들에게 정을 못 붙이는 것도 있고요. 친구를 한 명 사귀긴 했는데 동네에서 알게 된 사이라 학교에서 사귀었다고 보긴 좀 그래요.”

수혁은 유리를 떠올리며 말했다. 그리고 최근에 성준과 반을 달리하며 복잡해진 자신의 심경도 토로 했다.

“그리고 뭔가, 학교생활을 할 때 제가 알 수 없게 흘러가는 부분이 있어서 조금 혼란스럽기도 합니다.”

평우는 수혁의 말을 차분히 경청하다가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나 보구나. 네 나이 때는 친구가 최고인 나인데 아이들과 정을 못 붙이겠다니, 나에게 말하기 좀 그러면 이야기 안 해도 된다. 그래도 혹시 네 마음이 괜찮아지면 언제든지 나에게 털어놓거라. 난 들을 준비가 돼 있으니까.”

“네…….”

평우의 따뜻한 말을 들은 수혁은 마음이 뭉클해졌다.

그로서는 회귀한 이후 누군가에게 속내를 털어놓은 적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평우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수혁아, 내가 궁금한 것이 있는데 물어봐도 될까?”

평우는 인상을 쓴 채 고민을 하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네 편히 말씀하세요.”

“아까 대화 중에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는데, 학교생활을 하면서 네가 알 수 없게 흘러간다는 것이 무엇이냐?”

“그건......”

수혁은 운의 영향으로 과거의 사건들이 변화하는 것에 대해 혼란스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단순히 운이 좋아진 것만으로도 자신은 성준의 괴롭힘을 피할 수 있었지만 다른 아이가 대신 피해를 보는 상황들을 보면서 종종 생각이 많아지곤 했다.

‘할아버지한테 어플에 대해서는 이야기 할 수 없는데 어떡하지.’

수혁은 적당한 말을 만들어 낸 뒤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남들이 들으면 조금 이상하게 볼 수도 있는 건데요.”

“그래, 말해 보렴.”

“사실, 사람이 살다보면 예감이라는 것이 생기잖아요.”

“그야, 그렇지.”

평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 예감이 잘 맞는 편이라 많이 의지했었는데 최근에 들어 틀리는 경우가 생겨서 혼란스럽네요.”

수혁은 어플을 언급하지 못했기에 상황을 애매하게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자세히 말하지 못하는 것을 보니 뭔가 사연이 있나 보구나. 대충 이야기를 들어보니 네가 예상했던 대로 결과가 나오지 않아 당황스러웠다는 거구나.”

평우는 진지하게 그의 말을 들어주었다.

“예, 할아버지. 그런데 그런 상황이 발생하는 요인이 실체가 없는 거라서 더 답답한 거 같아요.”

“실체가 없다니? 예를 들면 뭐가 있을까?”

평우는 호기심이 가득한 눈빛을 보내며 물었다.

“그게....... 들어도 믿기 힘드실 것 같아서 그러는데요.”

“아니다, 수혁아 뭐든 편하게 이야기해, 도대체 뭔데?”

‘그래, 더 이상 숨겨봤자 뭐하냐.’

수혁은 주저하는가 싶더니 솔직하게 말하기로 결정했다.

“운이요, 사람은 운에 따라서 뭔가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하는 것 같아요.”

“그렇지, 사람은 운으로 인해서 자신이 뜻하지 않은 방향으로 인생이 흘러갈 때가 많다. 생각해 봐라, 누구는 죽어라 노력해도 안 되는데 누구는 일사천리로 일이 잘 풀리잖아.”

수혁은 평우가 열린 마음으로 이야기를 듣자 편안하게 말을 이어갔다.

“예, 그래서 최근에 이 운이라는 것이 삶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나 고민이 되더라고요.”

“그래? 그런 거라면 내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평우는 수혁의의 말을 듣자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어떻게요?”

“잠깐만 기다려 봐.”

평우는 핸드폰으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상대방은 응답이 없었다.

“바쁜가?”

“누구신데요?”

수혁은 그가 누구에게 연락하는지 궁금해졌다.

“아, 이 녀석은 내 친군데, 어? 잠시만 연락이 오는구나.”

평우는 핸드폰이 울리자 전화를 받았다.

“그래 나야, 아 손님이 와 있었나 보구먼. 다름이 아니라 혹시 이번 주말에 시간 되나? 내 손자가 자네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다고 하는데 내 얼굴 봐서 시간 좀 내주면 안 되겠는가?”

평우는 그렇게 한참을 상대방과 전화를 하다가 끊었다.

“할아버지. 누구신데 저랑 같이 보자고 하는 거예요?”

다짜고짜 약속을 잡은 평우의 행동에 수혁은 어리둥절해졌다. 그러자 그는 차를 마시며 설명을 해줬다.

“방금 통화한 이 놈이 네가 궁금한 운에 관한 걸로는 대한민국 최고라고 평가되는 사람이야.”

“그래요?”

호기심이 동한 수혁은 집중해서 그의 말을 듣기 시작했다.

“이 친구를 만난 지 벌써 20년이 지났는데, 얼마나 용한지 대한민국에서 유명한 사람들은 다 이 친구한테 상담받나 보더라고. 그런데 이놈이 얼마나 까다로운지 언제부턴가 사람을 가리지 뭐야.”

“할아버지 예전 모습이랑 비슷하네요.”

“하하하, 녀석 이제 농담도 할 줄 아는구나.”

평우는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진지하게 대화를 이어나갔다.

“녀석이 그래도 나랑은 막역해서 이렇게 자리가 마련된 거야. 친한 지인들만 아는 소문인데, 옛날에 군인들이 이 친구를 찾아와 자기들이 큰일을 벌이려고 하는데 어떻게 될 건지 물어봤다고 하더군.”

“설마, 예전에 우리나라 대통령을 했던?”

어떤 인물이 찾아왔는지 감을 잡은 수혁은 점점 더 평우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그래, 그 사람. 그런데 이 녀석이 군인들에게 대뜸 화를 내며 나라 훔치는 도적놈들이 나라를 뒤집으려고 그러는구나 하고 바로 맞춘 거야.”

“그래서요?”

수혁은 뒷이야기가 궁금해서 재촉했다.

“그때 화가 난 부하 군인이 친구에게 권총을 들이대려고 하는데, 녀석이 내가 무슨 말을 하든 나라를 다스릴 사람들이니 기왕 하는 거 잘 좀 해달라고 부탁했다는 구나. 그러고 나서부터 소문이 퍼졌는지 그 친구에게 점을 보러 고위관료들이 많이 찾아온다고 들었다.”

‘할아버지 말씀이 진짜라면 정말 대단한 분이시잖아. 어쩌면 운에 대한 내 고민을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몰라.’

수혁은 이야기의 주인공을 만나고 싶어졌다.

“수혁아 토요일 날 시간 괜찮지? 점심 먹고 나랑 같이 녀석을 보러 가자.”

“넵, 전 좋아요. 그러면 학교 끝나자마자 바로 서점으로 갈게요.”

수혁은 시원스럽게 대답을 했다.

“그래, 서점 앞에서 보자. 이제 슬슬 돌아갈까? 김 교수가 지금쯤이면 검토를 대충 다 했을 것 같은데.”

“네.”

그들은 대화를 마치고 다시 방 안으로 돌아갔다.

우진은 집중하느라 그들이 들어오는 소리도 듣지 못한 채 책을 부지런히 읽고 있었다.

“흠흠.”

평우는 고서에 몰두해 사람이 온 지도 모르는 우진의 주의를 끌었다.

“아, 형님 오셨군요. 수혁군 정말 잘 읽었네.”

그제 서야 인기척을 느낀 우진은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반겼다.

“그래, 수혁이가 번역은 잘한 것 같은가?”

평우는 우진에게 넌지시 물었다.

“네, 저는 지금까지 고서와 번역본을 비교해가며 읽고 있었습니다. 사실 원본은 분야별로 각 인물들의 이론들을 산발적으로 모아 놓은 것에 불과해 읽기에 조금 난잡했다면 번역본은 수혁군이 각 인물별로 이론들을 한 번 더 재구성해 놔서 독자가 보기 좋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맞습니다. 고서에서는 그저 줄글로 누구는 이랬고 누구는 저랬다 식으로 쓰여 있어서 목차를 살짝 수정해봤습니다.”

수혁은 우진의 말에 동의했다.

“고생했어. 번역본이 마음에 쏙 드는군. 그러면 일단은 내가 이 작품을 협회에 가서 발표를 하겠네, 그리고 추후에 협회의 반응이 있거나 금전적인 보상이 주어지면 바로 연락을 하지.”

“네, 알겠습니다.”

“허허, 만족한다니 다행이구먼.”

흡족해하는 우진을 본 평우는 활짝 웃었다.

“아, 그리고 나도 자네에게 줄 것이 있네.”

우진은 가방에서 CD케이스 하나를 꺼냈다.

“이게 무엇입니까?”

“CD를 실행하면 많은 파일들이 있을 거야. 내가 자네와 만난 후 번역이 필요한 고서들을 찾아 사진을 찍고 스캔을 떴네. 그러니 자네가 여유가 될 때 파일들을 보고 번역을 하면 좋겠어. 물론 작업마다 보상은 확실히 해줌세.”

“알겠습니다. 그 건 문제없을 것 같습니다. 시간 날 때 틈틈이 하겠습니다.”

‘뭐야? 알아서 일들이 들어오면 나야 좋지. 이제 본격적으로 돈을 벌 수 있겠구나.’

사업자금을 마련할 계획이 있던 수혁은 순순히 제안을 수락했다.

“그럼 오늘은 일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이제부터는 좀 재밌는 이야기를 하자고. 김 교수 자네 유럽 갔다 온 이야기 좀 해봐.”

“네, 형님 저도 계속 책만 읽으니 머리에 쥐가 날 참이었습니다.”

번역본 확인이 끝나자 수혁은 두 노인과 밤이 늦도록 대화를 나누었고 카페 문을 닫을 시간이 돼서야 그들과 헤어질 수 있었다.

수혁은 카페에서 나와 집에 가려던 참이었는데 갑자기 퀘스트창이 활성화되었다.

<히든 퀘스트가 완료되었습니다. 보상으로 지능, 지혜, 통찰이 각각 3씩 증가했습니다.>

‘아, 맞다. 퀘스트가 있었는데 까먹고 있었구나. 공부도 하고 돈도 벌고 여러모로 유용한데?’

수혁은 스텟 창을 켜 향상된 능력들을 확인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 후 며칠 동안은 번역과 훈련을 반복하는 단순한 일상이 계속되었다.

그는 잠시 쉬고 있었던 복싱 훈련을 다시 시작했다.

‘주구장창 일만 하는 것보다 체육관에 나와서 운동도 해줘야겠어. 간만에 몸을 푸니까 기분이 좋은데?’

체육관에 온 수혁은 오랜만에 스파링도 하고 종욱에게 레슨을 받았다.

어느덧 시간은 흘러 드디어 토요일이 되었다.

‘오늘은 끝나고 할아버지를 뵙기로 했지? 수업이 끝나자마자 바로 칸타빌레로 가자. 후, 그분은 어떤 사람일까?’

수혁은 교실에서 평우에게 들었던 신비로운 인물에 대해서 이런저런 상상을 하고 있었다.

“야, 너희들 일 잘했어?”

1교시 수업이 끝나고 쉬는 시간이 되자 학생들이 복도에 모여 대화를 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힘들었는데 막상 하니까 별거 없던데?”

“난 사실 좀 힘들었어, 돈은 잘 걷었는데 뭔가 마음이 무거운 게…….”

“야, 촉 떨어지게 그런 말 하지 마.”

종명은 녀석의 말을 끊으며 버럭 성질을 내었다.

“것보다 뒤에 성준이가 있다고 하니까 애들이 순순히 돈을 내던데?”

“맞아, 덕분에 반에서도 애들이 나만 보면 꼼작도 못해.”

그들은 한데 모여 돈 걷는 일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좀 있다 수업 끝나고 선도부에서 다 모이기로 한 거 잊지 않았지?”

“당연하지, 그거 잊어버리면 무슨 일 당하려고.”

“그럼 수업 끝나고 다들 좀 있다 보자.”

종명과 아이들은 무슨 작당모의를 하듯 은밀하게 대화를 주고받다가 수업이 시작되자 각자의 교실로 흩어졌다.

‘저 새끼들은 뭐하는 거야?’

복도를 쳐다보고 있던 수혁은 그들이 뭘 꾸미고 있는지 궁금했지만 이내 시선을 돌리고 복싱 교본을 읽는데 집중했다. 그리고 수업이 끝나자마자 바로 칸타빌레로 향했다.

한편, 학생들이 하교를 해 조용해진 학교 안에서 일련의 무리들이 어딘론가 가고 있었다.

“야, 다 왔지?”

“그래, 괜히 늦어서 성준이한테 욕먹지 말고.”

선도부실에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들고 있었다.

- 27화에 계속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