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수혁은 허튼소리를 용납하지 않는다는 평우의 말을 떠올리며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예, 제가 가까운 일들은 잘 맞추는 편인데, 요즘 따라 예상이 빗나가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저는 이러한 현상이 사람이 가진 운 때문에 일어난다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보십니까?”
“음.......”
성욱은 수혁을 노려보기만 할 뿐 침묵을 지켰다. 그러더니 대뜸 한마디를 던졌다.
“어째, 말하는 것이 네 나이답지가 않아. 사람은 다른 건 다 숨길 수 있어도 눈은 못 숨기거든. 눈빛이라는 것은 세월의 때를 타면 변하기 마련인데, 네 눈에서 중년 어른이나 돼야 가질 수 있는 연륜이 느껴진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냐?”
‘과연, 대한민국 최고라는 말이 허언은 아니었어. 그런데 뭐라고 해야 하지?’
수혁은 전생의 세월이 눈빛에 묻어난다는 말을 듣자 고민에 빠졌다. 왜냐하면, 미래에서 과거로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왜 우물쭈물 대는 거야? 어서 똑바로 말 안 해?”
‘진실을 말하되 회귀했다는 것은 들키면 안 돼.’
성욱이 대뜸 고성을 내지르자 수혁은 머뭇거리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럼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긴 꿈을 꾼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제가 어렸을 때부터 어른이 되기까지의 꿈이었는데 어찌나 생생하던지 꿈의 길이마저 현실과 같았습니다. 그리고 긴 잠에서 깬 저는 꿈에서 보았던 것들이 현실에서 이뤄진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수혁은 회귀하기 전에 살았던 인생을 꿈에 빗대어 표현했다.
“숨기는 것은 있지만 그 안에 진실도 있구나, 계속 말해봐라.”
‘귀신이야 뭐야?’
정곡을 찔린 것 같은 기분이 든 수혁은 식은땀을 흘리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이지 어느 순간 꿈과 현실이 달라지는 사건들이 생겨서 연유를 묻기 위해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흠, 그렇단 말이지. 연월일시 불러봐.”
성욱은 이야기를 듣고 생각을 하더니 대뜸 수혁에게 생년월일과 태어난 시간을 물어보았다.
“네, 1981년 4월 x일 진시에 태어났다고 했습니다.”
정보를 입수한 성욱은 종이를 꺼내 연월일시를 쓰고 붓으로 한자들을 적기 시작했다. 그는 한참동안 글자들을 보면서 궁리를 하다가 말을 꺼냈다.
“이럴 리가 없는데? 뭔가 이상해.”
“네?”
성욱은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주를 보면 천간지지간의 충이 많아 평생 고달픈 삶이고 부모 자리마저 불안정해 부모의 도움은 하나도 기대할 수 없는 명이야. 게다가 충이라는 것은 살의 기운으로 이는 안 좋은 인연을 뜻하기도 한다. 따라서 이런 사주를 갖고 태어났으면 일생을 남에게 핍박을 받거나 헛소문과 모함에 시달리게 돼서 평생을 인간 때문에 고생하며 살아야 돼.”
“자네 뭐를 잘 못 본 것이 아닌가? 그럴 리가 없는데?”
수혁의 사주 감정을 들은 평우는 믿기 힘들다는 투로 말했다.
“허허, 나를 의심하는 건가?”
“이 사람아 의심하는 게 아니라 수혁이가 인간들에게 당하고 살 느낌이 아니라서 하는 말이야. 나도 인생을 제법 살았는데 그런 사람 하나 분간 못하겠는가?”
평우는 손을 저으며 말했다. 그러나 성욱은 그의 말에 개의치 않고 말을 이어갔다.
“거기다 결정적으로 이 사주는 직업 운과 재물복도 약해서 평생 별 볼일 없는 일을 하고 살아야 될 뿐만 아니라 인복도 없어서 자네나 나 같은 사람을 만날 수 없어야 정상일세.”
쉽게 말하면 수혁의 사주로는 평우와 성욱과 같은 거물들은 만나기 어렵다는 뜻이었다.
“하신 말씀이 정확합니다. 제 부모님은 선량하시지만 불안정한 직업을 가지고 계셔서 저를 물질적으로 지원하기 힘든 형편입니다. 그리고 저는 학창시절 내내 불운한 삶을 살았습니다.”
설명을 듣던 내내 속으로 감탄하던 수혁은 순순히 그의 말을 인정했다. 그러나 성욱은 여전히 미심쩍은 게 남아있는지 아리송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래, 그래야 해. 자네는 유년기부터 불운을 타고 태어났으니까 그런데 이상한 것은 네 상이 굉장히 귀해 보인다는 점이야. 피부에서 뻗어 나오는 기색과 몸의 형상은 나중에 부와 명예를 누릴 것을 보여 주고 눈썹의 형태와 눈을 보며 인복도 좋은 것으로 나오네.”
수혁은 운명을 개척할 수 있는 도구인 어플을 다운로드 한 이후로 상이 많이 바뀌었다.
이는 매력스텟의 영향으로 변한 외모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성욱은 운명과 관련된 좀 더 근본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내가 눈을 보고 상대를 파악한다고 했지? 근데 너의 눈을 보면 여전히 불운의 기운을 미세하게나마 찾을 수 있다. 그리고 보통 사람은 널 보면 못 알아채겠지만 네 얼굴 구석구석에는 불운한 과거의 흔적들도 남아있어.”
“그게 무슨 뜻인가요?”
수혁은 그의 말이 조금 어렵게 느껴졌다.
“너는 좋은 운을 가졌으나 한편으로는 살면서 우여곡절을 많이 겪을 거라는 말이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수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했다.
“사주는 전생의 성적표 같은 거라서 아무리 상이 좋아져도 네가 전생에 쌓은 업보는 피할 수가 없다. 어쩌다 보니 자꾸 말이 길어지는군, 그런데 궁금한 것이 뭐라고 했지?”
성욱은 한참 설명을 하는 통에 수혁의 질문을 잊어버렸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히든퀘스트와 운이 향상됐다는 이야기만 빼고 모두 말해야겠다.’
수혁은 그의 앞에서는 아무것도 숨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그간 있었던 일을 소상히 말해주었다.
그는 평우의 도움으로 책을 수월하게 구할 수 있었던 일과 책을 찾은 뒤 왠지 모르게 불운이 비껴간 상황들에 대해 자세히 알려주었다.
“자네는 고서를 찾아서 안 좋은 일이 조금씩 비껴갔다고 생각하나?”
“네, 그렇습니다.”
수혁은 나름의 확신을 갖고 대답했다.
“뭔가 잘 못 생각하고 있구먼. 찾았던 책이 쓸 만하던가? 물론 그 고서가 네 인생에 긍정적인 영향을 줬을 거야. 하지만 사람의 인생이라는 것은 책 한권으로 쉽게 변할 정도로 단순하지가 않아.”
“그럼 무엇 때문에 이런 일들이 발생한 겁니까?”
수혁은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는 지적에 강한 궁금증이 생겼다.
“내가 네 이야기를 쭉 들어봤는데. 인과관계를 잘못 파악한 것 같아.”
“그렇습니까?”
“내 진단에 의하면 자네가 불운을 피할 수 있게 된 건 평우와 깊은 관계를 맺었기 때문이야. 운이라는 것은 인과응보의 법칙에 따라 자신이 전생부터 쌓아온 업력에 의해 결정되는 건데 선행을 많이 하는 것 외에 가장 좋은 개운법은 운이 좋은 사람을 자기 곁에 두고 친하게 지내는 거지.”
‘그래 생각해보니, 할아버지를 만난 이후 인맥도 넓어지고 하는 일이 잘 풀렸던 거 같아. 그리고 내가 하는 일이라면 발 벗고 도와주셔서 모든 일이 수월하게 진행됐어. 애당초 책이랑 운은 그렇게 큰 연관이 없었던 거야.’
성욱의 설명을 듣고서야 수혁은 운이 향상된 이유를 깨달았다.
“선생님 말씀이 맞는 것 같습니다. 확실히 할아버지를 만난 이후 제 삶이 많이 변한 것 같아요. 좋은 고언 감사합니다.”
수혁은 성욱에게 고마움을 표시했다.
“사람의 인연이 주는 파장은 굉장히 크다네, 그래서 부모들이 어렸을 때부터 자식들에게 친구 잘 만나야 한다고 하는 거야. 요즘은 그것을 잘못 해석하는 부모들도 많은 것 같지만 말이야 쯧쯧.”
성욱은 혀를 차며 말했다. 그런데 별안간 평우가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하하하, 나는 수혁이가 내게 귀인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까 나도 수혁이의 귀인이었구먼.”
평우는 기분이 좋은지 호탕하게 웃었다.
“자네가 이 친구를 만난 것도 인연인 게지. 사람간의 관계는 인력만으로 되지 않는 경우가 더 많지 않은가?”
“그럼 인연도 아주 귀한 인연이지.”
평우는 수혁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수혁이라고 했던가? 아무튼 이번 만남으로 궁금증이 해결되었길 바라네.”
“어르신 감사합니다. 덕분에 많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수혁은 진심으로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그는 이번 대화를 통해 자신의 인생이 왜 이렇게 흘러갔는지에 대한 단서를 찾았다. 그리고 삶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제공하는 역학을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생님. 저.......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흐으음, 뭐야? 또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성욱은 피곤한지 하품을 하며 말했다.
“제가 말씀을 듣다 보니까 선생님께서 공부하신 역학에 대해 큰 관심이 생겼습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선생님에게 배움을 얻고 싶습니다. 만약 받아 주시면 제 여건 안에서 시키는 것은 무엇이든 다 하겠습니다.”
“쳇, 헛소리 마라 네가 잘도 이걸 공부하겠다. 너는 이 공부 안 해, 아니 못 해!”
수혁의 간청을 들은 성욱은 콧방귀를 뀌었다.
“네? 무슨 말씀이신지........”
일언지하에 거절을 당한 수혁은 당혹스러운 감정을 감추지 못했다.
“내가 오늘 대화를 통해 가장 크게 느낀 건, 넌 삶에 대한 욕구가 강하다는 거야. 이 공부는 너처럼 에너지를 발산하고 다니는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야. 운명을 연구하려면 속세에 관조적인 태도를 가지고 살짝은 세상과 거리를 둬야 되는데, 네 눈에서는 강한 집착이 보여.”
성욱은 그에게서 삶에 대한 뜨거운 열망을 느낄 수 있었다.
수혁은 후회스러웠던 과거를 바꾸고 나중에 사업을 해서 크게 성공해 인생을 개척하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속세와 거리를 두고 지낼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도, 조금이나마 배울 수 있는 게 없겠습니까?”
“수혁아 그만해라. 저 친구가 그렇게 말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어. 내가 저 친구만은 못 하지만 내가 봐도 너는 이 공부가 어울리지 않는다.”
“알겠어요, 할아버지.”
수혁은 평우가 단호하게 말하자 자신의 고집을 내려놓기로 했다.
“거 성욱이, 날도 어두워지는데 저녁 밥 좀 얻어먹을 수 있을까? 내가 들으니 자네 집 밥이 그렇게 맛있다던데?”
“이름 부르지 말래도, 거참 음식이 맛있으니 이런 문제가 발생하는군. 소영아.”
식사를 하고 싶다는 평우의 말에 성욱은 큰 소리로 자신의 제자를 불렀다.
“네 스승님.”
소영은 문밖에서 공손히 대답했다.
“미안한데, 여기 마실 것을 내주고 저녁상 두 명분 더 차려라. 식충이들이 있어서 괜히 널 고생시키는 구나.”
“신세 좀 지겠네.”
평우는 염치없는 표정을 지으며 소영에게 말했다.
“아닙니다. 양만 조금 더 늘리면 되는 일이라 어렵지 않습니다. 우선 마실 것을 내놓고 바로 저녁 준비하겠습니다.”
“저도 손을 보태겠습니다.”
수혁은 무작정 얻어먹을 수 없다는 생각에 저녁준비를 도와주려고 했다.
“아닙니다. 이 집에서 손님은 그저 편하게 있다 가면 되는 겁니다. 그럼.”
소영은 도움을 정중하게 사양한 뒤 문을 닫고 나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술과 수정과를 가지고 왔다.
“술까지 챙겨왔어? 뭐가 예쁘다고 이런 놈들을.”
“수혁아, 너도 원하면 한잔해보는 게 어떻겠냐?”
“그래. 너 술 안 마셔봤지? 술은 어른한테 배우는 거야.”
평우와 성욱은 은근하게 술을 권했다.
“저는 조금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하, 이 자식 답답하네. 그냥 우리끼리 마시지.”
수혁은 점잖게 거절하자 그들은 술을 주고받으며 대화를 나누었다.
얼마 후 저녁상이 차려지자 수혁은 조용히 이들 옆에 앉아 식사를 했다.
“오늘은 오랜만이라서 봐줬는데 다음부터는 부탁 같은 거 하지 마.”
“허허, 그렇게 말하니, 좋은 일 하고도 욕 얻어먹지.”
평우와 성욱은 긴 시간 알고 지낸 동네 친구들처럼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나눴다. 그들은 식사를 마치고 난 후에도 늦은 밤이 될 때까지 회포를 풀었다.
“이만 가지, 다음에 또 오겠네.”
평우는 대문 앞에서 작별인사를 했다.
“많이 배우고 갑니다.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수혁도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다 늙은 영감 주제에 술은 또 왜 이렇게 잘 마시는 거야? 다음에는 올 땐 자네가 술사와.”
“참나, 같은 영감끼리 누굴 보고 늙었데?”
평우는 어이가 없는지 피식 웃음이 나왔다.
“아무튼, 밤길 어두우니까 조심히 가고! 그리고 너, 뭘 할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열심히 살아라!”
성욱은 큰 목소리로 이들을 배웅했다.
용건을 마친 수혁은 차를 타고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오늘 참 많은 것을 배운 기분이다. 할아버지 친구 분을 만나 뵙길 잘 한 것 같아.’
그는 동네로 가는 계단을 오르며 오늘 있었던 만남과 대화를 떠올리며 깊은 생각에 빠졌다.
- 29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