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서울 어느 클럽의 룸, 이곳에는 10명 정도의 사내들이 둘러앉아 있었다.
거친 외모의 그들은 앉아 있는 자세에서부터 자신감이 자연스럽게 묻어나오고 있었다.
요란한 클럽의 음악 소리는 방 안까지 희미하게 들려왔고 그들은 음악을 배경으로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야, 조성준! 아버지가 용돈 많이 주나 보다. 이런 데를 다 잡고?”
한눈에 보아도 험악한 인상을 풍기는 거대한 체구의 사내가 침묵을 깼다.
“내가 요즘 용돈 말고 따로 들어오는 수입이 좀 있거든, 이 정도는 별거 아니야. 뭐, 너희들이 원하면 밖에서 춤추고 있는 여자애들도 이 방에 부를 수 있어.”
성준은 거만한 말투로 이야기했다.
클럽 2층에 위치한 룸은 밖에서는 안을 들여다 볼 수 없지만, 안에서는 클럽을 내려다 볼 수 있게 설계되어 있었다.
“성준아, 너 요즘 알바라도 하냐?”
곽혁수, 현재 중앙회에서 명실상부한 일인자로 불리는 자다.
중앙회는 서울의 한 중학교에서 같이 어울리던 학생들이 만든 클럽이다.
멤버들 하나하나 개성이 있고 지역을 주름잡을 수 있는 싸움 실력을 자랑했지만, 혁수에게는 모두 한수 접어주고 있었다.
“내가 최근에 또 학교 잘렸잖아. 그래서 새로 전학을 가게 됐어. 그런데 알고 보니 그곳이 노다지였지 뭐야?”
“노다지?”
처음에 이야기를 꺼냈던 성규가 관심을 보였다.
“우리 꼰대가 내가 들어간 학교의 일을 하나 해결해 줬거든, 그래서 선생들부터 이사회까지 다들 나한테 꼼짝 못 해. 그 학교가 샌님들만 다니는 학교라는 것도 한몫했고.”
“그래서 뭘 어쨌는데?”
성규는 이야기를 재촉했다.
“내가 한 번 알아보니까 그 학교에 잘 사는 애들이 좀 있더라고 그래서 보호비 명목으로 상납금을 걷었는데 제법 쏠쏠하더라고.”
“애들 삥 뜯는 이야기가 뭐가 그렇게 궁금하냐? 참 한심하다.”
가만히 듣고 있던 종욱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성준을 쳐다봤다.
그는 체육관에서 수혁에게 복싱을 가르쳐주었던 아이로 중앙회 멤버 중 하나였다.
“운동하다 간만에 나왔는데 이런 이야기나 듣고 있는 내가 참 한심하다. 다들 이제 곧 성인인데 철 좀 들어라.”
“…….”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주변 공기는 무거워졌고 다들 입을 닫고 서로 눈치만 살폈다.
종욱은 혁수처럼 싸우고 돌아다니지는 않았지만, 복싱에 관해서는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참고로 종욱은 전국체전에서 메달을 딴 뒤 프로로 전향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얘가 전학 간 학교에서 뭐했는지 그게 그렇게 궁금해? 들어봤자 뻔하잖아. 양아치 새끼들이랑 작당해서 한탕 해보려고 했겠지.”
종욱은 고개를 저으며 더 볼 것도 없다는 식으로 말했다.
“야, 김종욱! 적당히 해라. 넌 가만 보면 매사에 부정적이야. 돈 좀 버는 것이 뭐 어때서 그래? 친구가 잘나가니까 부럽냐?”
성준은 자신보다 월등히 강한 종욱의 비아냥을 참다가 끝내 한 마디 던지고 말았다.
그러자 방 안 분위기는 더욱 험악해졌고 그들 사이에서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친구같은 소리하고 자빠졌네. 야, 애들 앞에서 헛소리 그만하고 인생 좀 똑바로 살아.”
“너야 고리타분한 놈이니까 이런 이야기가 듣기 힘들겠지만 다른 애들은 달라. 그리고 싫으면 나가, 여기 내가 예약한 데야.”
종욱이 평소 마음에 들지 않았던 성준에게 쓴 소리를 하자 그는 눈을 부라리며 대들었다.
“말을 내뱉을 때는 그 뒤도 생각해 성준아. 너 자신 있냐?”
“킥킥, 싸움으로 하면 내가 당연히 너한테 지지. 근데 애들은 나보다는 너를 더 불편해 할 것 같은데?
종욱이 사납게 쳐다보며 말하자 성준은 주위를 둘러보며 능청을 떨었다.
“그래 종욱아, 너는 너무 진지해. 좀 진정해라 뭘 그런 걸로 흥분하고 그래? 야, 술이나 마시자.”
“야, 우리가 언제부터 이렇게 놀았냐? 난 그냥 동네에서 조용히 놀 때가 더 좋았어. 그런데 조성준 저 새끼가 전학 온 뒤부터 무슨 조폭 마냥 중앙회니 뭐니 이딴 거나 만들고 말이야. 아무튼 난 마음에 안 들어.”
종욱은 아랑곳하지 않고 쓴 소리를 이어나갔다.
“와 방금 들었어? 저 자식 본심 나오네?”
성준은 그의 심기를 자꾸 건드렸다.
“이 새끼가.”
“야, 솔직히 이 자리도 성준이가 만들어줬는데 오히려 고마워해야지 않냐? 그리고 나도 가끔 애들한테 돈 걷어서 쓰는데. 그럼 나도 이상한 놈이냐?”
종욱이 화를 내려는 찰나, 성준의 옆에 있던 배기현도 거들며 나섰다.
“너희들 하는 꼴 보니까 더 이상 이곳에 있기는 힘들 것 같다. 난 그냥 중앙회니 뭐니 이딴 유치한 거 그만하고 운동이나 전념하련다. 앞으로 나 부르지 마라.”
종욱은 한심하다는 듯 애들을 쳐다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말하지 말고 그냥 조용히 나가, 너 없으면 오히려 분위기 업 되고 좋으니까.”
성준은 야비한 미소를 지으며 계속 깐죽거렸다.
“성준아. 나 아직 프로 아니야, 내가 지금 너 하나 어떻게 못 할 것 같아?”
“종욱아! 그만 가라.”
종욱이 살기를 띠며 말하자 아까부터 가만히 있던 혁수가 입을 열었다.
“네가 말 안 해도 갈 거였는데 말투가 띠껍네?”
“분위기 망치지 말고 나가라. 이제는 내가 널 어떻게 할지도 모르겠다.”
“뭐라고? 어이가 없네? 네가 뭘 어떻게 할 건데?”
종욱은 혁수의 경고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휴, 너도 조성준이랑 놀더니 맛이 갔구나?”
“쓸데없는 소리 그만해라.”
그들은 서로의 실력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섣불리 싸우지 않고 말만 주고받고 있었다.
‘이 새끼까지 이럴 줄은 몰랐는데. 역시, 다 똑같은 놈들이었어.’
종욱은 어렸을 때부터 무리들 중에 혁수와 가장 친하게 지냈다. 그는 처음부터 중앙회에 대해 안 좋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혁수의 간청에 어쩔 수 없이 가입한 상태였다.
“야, 됐다. 더럽고 치사해서 내가 간다. 그리고 앞으로 귀찮게 하면 중앙회고 나발이고 다 부셔버릴 거니까 그런 줄 알아라.”
혁수에게 배신감을 느낀 종욱은 룸 문을 거칠게 닫고 그대로 나가버렸다.
“난 저 자식 예전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종욱이 떠난 것을 확인한 금철민이 분통을 터뜨렸다. 그는 중앙회에 무슨 일이 생기면 가장 앞장서는 자로 혁수에 대한 충성심이 대단했다.
“맨 날 우리가 뭐 좀 하려고 하면 그만 좀 하자, 적당히 하자, 한두 번은 참았는데, 이제 진절머리가 나서 못 듣겠어.”
“나도 저 새끼 눈치를 얼마나 봤는지 몰라. 후, 이제야 속이 다 시원하네.”
성규도 철민의 말을 거들고 나섰다.
“그건 그렇고 제 앞으로 어떻게 할 거냐? 아주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나가던데.”
성준은 애들을 선동해 종욱을 처리하려고 했다.
“그러게, 아주 정의의 사도야. 그 새끼 눈빛 못 봤어? 보니까 친구고 뭐고 다 죽일 기세던데?”
중앙회 내에서 성준과 친하게 지내는 배기현도 동조하고 나섰다.
“맞아, 그 자식 때문에 불편한 게 한 두 가지가 아니야.”
“나도 혁수 때문에 참았지, 진작부터 손절하고 싶었어.”
룸 안에 남은 사람들은 저마다 불만을 꺼내며 종욱을 비난했다. 그러던 그때 상황을 지켜보던 혁수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당분간 종욱이는 우리 모임에 부르지 말자.”
“당분간? 그럼 나중에는 다시 부르려고?”
종욱에 대한 반감이 강했던 성규가 항변했다.
“그 이야기는 이제 그만 하자. 불만이 있는 것은 알겠는데 어찌 됐든 그래도 우리 멤버고 함께한 시간도 짧지 않아. 그냥 내버려 둬, 내버려 두면 별문제 없을 거야.”
“그래, 혁수야 우리도 그렇게 생각했어. 그런데 오늘 저 자식 이야기 들었지? 처음부터 내가 마음에 안 들었다고 하는 거, 그리고 아까 그 눈빛 못 봤어? 절대 가만히 있을 녀석이 아니라고!”
“그만해라 성준아.
성준은 종욱이 자신을 해코지 할까 봐 두려운 나머지 그에 대한 불만을 쏟아냈지만 혁수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그냥 내 말대로 해. 자 다들 이제 놀아, 나는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올게.”
혁수는 아이들을 뒤로 하고 룸 밖으로 나가버렸다.
남은 애들은 그저 조용히 술잔을 기울이며 말없이 맥주만 마실 뿐이었다.
‘두고 보자 김종욱, 언젠가 내가 꼭 한 번 손봐주지.’
성준은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 * *
클럽에서 중앙회 회동이 있던 그 시각, 수혁에게는 좋은 일이 있었다. 그는 평우와 헤어진 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눈앞에 화면이 뜬 것을 발견했다.
<임성욱과의 대화로 세상의 진리에 대한 안목이 넓어졌습니다. 그 영향으로 사용자의 지혜와 통찰이 각각 3씩 향상되었습니다.>
‘확실히, 운월당을 다녀온 이후 인생을 바라보는 시야가 넓어진 것 같아. 귀한 가르침을 받은 것만으로도 스텟이 오를 수도 있구나.’
수혁은 스텟이 오른 이유를 나름대로 추측해보았다.
<퀘스트와 상관없이 사용자께서 세상의 법칙에 대한 깨달음을 얻었기에 스텟이 향상되었습니다.>
수혁의 생각을 읽고 도움말이 자동으로 활성화되었다.
‘어플도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면 선생님은 진리를 알고 계신 것이 틀림없어.’
수혁은 나중에 기회가 되면 성욱을 찾아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누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 도착한 그는 그동안 쌓인 피로를 풀기 위해 남은 주말은 휴식을 취했다.
월요일이 되었다.
수혁은 학교에서 여느 때와 같이 독서를 즐기고 있었다. 그런데 반 분위기가 보통 때와 다르게 조용했다. 매일 시끄럽게 떠들던 종명은 입을 꾹 다물고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종명아, 무슨 일 있어? 왜 이렇게 심각해 보여?
그와 어울리는 친구들 중 한 명이 눈치를 보며 물었다.
“야, 시끄럽고 박현우 왔냐?”
“현우? 방금 자리에 앉는 거 못 봤어?”“이 자식은 뭘 하다 이제 오는 거야?”
종명은 현우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고 그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쟤네들 어디 가지? 에잇 모르겠다. 지네들끼리 지지고 볶든 내가 상관할 바 아니지.’
수혁은 호기심이 약간 들었지만 이내 무시하기로 했다.
이들은 친하게 지냈던 사이였기 때문에 별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수업이 끝난 수혁은 하굣길에서 우진이 주었던 CD가 떠올랐다. 그는 칸타빌레에 가서 CD를 확인해 보기로 했다.
‘지금 여유롭다고 마냥 쉴 일이 아니야, 교수님이 주신 파일을 확인하고 작업을 시작해야겠어. 열심히 해놓으면 나중에 사업 밑천을 마련하는데 큰 도움이 될 거야.’
집으로 가던 수혁은 발길을 돌려 서점으로 향했다. 칸타빌레에 도착한 그는 곧장 컴퓨터를 켜고 CD를 집어넣었다. 그러자 잠시 후 모니터에 창이 하나 떴다.
‘흠, 이런 식으로 정리를 하셨구나.’
창이 켜지자 여러 개의 폴더가 수혁의 눈에 들어왔다.
폴더마다 고서의 제목이 적혀 있었고 몇몇 폴더에는 ‘제목을 알 수 없음.’이라고 표시 된 것들도 있었다.
‘교수님이 편한 데로 골라서 번역을 하라고 했으니까, 좀 살펴보고 바로 작업에 들어가자.’
CD안에는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다양한 곳에서 수집된 고서들이 들어있었다.
고서들은 비교적 최근의 것들도 있었으나 이전에 보았던 책처럼 고대의 작품들도 있었다.
그는 여러 자료들을 살피다가 가장 흥미로워 보이는 것을 선택했다.
‘충의록이라....... 고려시대에 나라를 위해 훌륭한 일을 했던 사람들의 일대기를 모아놓은 책이군, 이거 먼저 작업해야겠다.’
수혁은 그날 저녁부터 번역을 시작했고 늦은 밤이 돼서야 서점을 나와 집으로 향했다.
‘고서들을 미리 번역해뒀다 하나씩 교수님께 드려야겠다. 그렇게 하면 나중에는 다른 일을 하면서도 돈을 벌 수 있을 거야. 이렇게 열심히 살다보면 내 미래도 점점 나아지겠지?’
불이 다 꺼진 어두운 거리, 이날따라 달은 유난히 밝았고 수혁은 달빛을 맞으며 상념에 빠졌다. 그는 번역에 몰두해 피곤한 상태였지만 목표에 조금씩 다가가고 있다는 생각에 발걸음은 가벼웠다.
- 30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