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없는 회귀-30화 (30/316)

30화

‘애가 왜 이러지?’

정식은 자신의 짝꿍인 현우가 이상해졌다고 생각했다.

그는 언제부턴가 멍해 있는 시간이 길어졌고 친구들과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수업시간 말고는 종일 엎어져서 누워만 있잖아?’

정식은 최근 들어 더 무기력해진 현우를 보니 걱정이 되었다.

“야, 너 어디 아프냐? 아프면 담임한테 이야기하고 그냥 집에서 쉬어, 네가 말하기 그러면 내가 이야기해줄까?”

“.......”

그러나 현우는 그저 묵묵답답이었다.

“아우, 말을 말아야지. 공부나 해야겠다.”

정식은 현우를 내버려 둔 채 공부에 열중했다.

현우는 종명의 닦달이 더 심해진 이후로 극도의 우울감을 느끼며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수혁은 종명이 틈만 나면 그를 데리고 나가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고서 번역에 집중하느라 그들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학교 마치면 바로 서점에 가서 일해야겠다.’

수업이 끝나고 학교를 빠져나온 수혁은 곧장 칸타빌레로 향했다.

‘옷은 챙겨왔고 부모님께도 말씀드렸으니까 오늘부터는 밤샘 작업해야겠다.’

수혁은 효율적인 작업을 위해 칸타빌레에서 숙식을 하며 일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는 서점에 도착하자마자 컴퓨터를 켜고 작업에 집중했다.

한참을 번역에 몰두하고 있는데 갑자기 핸드폰이 울렸다. 수혁이 폰을 열어 확인해보니 우진에게서 걸려온 전화였다.

“네, 교수님 안녕하세요.”

“잘 지내고 있지?”

“예 저야 잘 지냈죠. 지금도 교수님이 주신 파일을 살펴보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벌써 번역을 하고 있나 보구먼. 부지런도 하지. 그건 그렇고 좋은 소식이 있어서 전화했네.”

‘협회에서의 일이 잘된 모양이구나.’

수혁은 우진이 전화를 건 이유를 바로 알아차렸다.

“예, 말씀하세요.”

“자네가 번역했던 소피스트에 관한 고서를 지난 토요일에 발표를 했네, 물론 가명으로 말이야.”

“다들 관심 있어 하던가요?”

“협회 측 관계자들부터 학자들까지 반응이 정말 뜨거웠네.”

“그렇습니까?”

우진은 자신의 일인 것 마냥 들떠 보였다.

“전국의 대학교수들과 재야의 원로학자들이 한데 모인 자리에서 흥미로운 발표들이 많이 나왔지만 가장 주목을 받은 것은 당연, 자네의 번역본이었네. 발표가 끝나자 도대체 월명이라는 자가 누구냐고 집요하게 묻는 사람들을 떨쳐 내느라 굉장히 힘들었지.”

“반응이 좋았다니 다행이군요.”

수혁은 내심 흐뭇했지만 겉으로 표현하지 않았다.

“이런 미지근한 반응이 어디 있나? 지금 많은 학자들이 월명의 등장을 반기고 있네, 내가 자네 신분을 밝히고 싶지 않은 젊은 학자 정도로 소개를 해서 급한 불은 껐지만 아마 당분간은 학계가 시끌시끌할 거야.”

“그런 부분들은 교수님이 앞으로도 잘 처리해 주실 것으로 믿겠습니다.”

“하하, 이 사람, 정말 관심이 없는 모양이구먼. 그리고 오늘 연락한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네.”

“그게 무엇인가요?”

“발표가 끝난 후 회원들 간 오찬 자리가 있었는데 내가 협회 관계자들에게 이 번역본을 공유하는 대가로 자네에게 성과금을 지급하자고 건의를 했어. 처음에는 사람들이 돈을 주는 것을 꺼리는 분위기였지만, 공들인 결과물을 이용하려면 적절한 보상이 필요할 것이라고 강변하니 그제 서야 내 말을 듣더라고.”

“그런 일이 있었군요.”

수혁은 우진의 말에 점점 흥미가 갔다.

“논의를 계속하는데 이 사람들이 자꾸 보상금에 대해서 확답을 미루는 거야. 그래서 내가 이런 식이면 이번 자료뿐만 아니라 추후에 번역되는 고서들도 공유하지 않겠다고 못을 박았지.”

우진은 열을 내며 말했다.

“세게 나가셨군요.”

“그러니까 관계자들이 안절부절 못하면서 검토를 하겠다고 이야기 했었는데, 드디어 오늘 그들에게 연락이 왔네.”

“오, 그래서 어떻게 됐나요?”

수혁은 차분하게 물었으나 속으로는 기대하고 있었다.

“협회에서 고서 번역에 들어간 노력과 자료의 가치를 고려해서 500만원을 자네에게 주기로 결정했다는 군. 방금 돈이 입금 되었는데 받자마자 바로 자네 통장에 넣었으니 나중에 확인해보게.”

“일 한 보람이 있네요.”

‘드디어, 돈이 들어왔구나.’

수혁은 겉으로 표현하지 않았지만, 학자로서 주목을 받은 사실보다 돈을 벌었다는 것에 더 큰 기쁨을 느끼고 있었다.

500만원이 비록 엄청난 금액은 아니었지만 회귀하기 전에도 만져보지 못한 큰 액수였기 때문에 만족스러워했다.

“감사합니다.”

“감사하긴, 다 자네가 노력한 덕분인데. 고서의 가치를 생각하면 500만원이 적게 느껴질 수도 있으나 너무 서운해 마시게. 협회 사정이 그렇게 넉넉지 않아. 수십 년간 협회에 있었던 나도 그 정도 돈을 받아본 적이 없을 정도니 말 다했지.”

“아닙니다. 저에게는 충분히 큰돈입니다. 그리고 교수님이 힘써주시지 않으셨다면 그 돈도 못 받을 겁니다.”

수혁은 적절한 보상을 주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우진을 달래주었다.

“그렇게 생각해줘서 고맙네. 아, 그리고 협회장에게도 연락이 왔었는데, 자네가 원한다면 협회 정식회원으로 등록하고 싶다더군. 그래서 내가 당사자에게 물어보고 연락 주겠다고 했는데 어떻게 생각하나?”

‘정식 회원? 난 그냥 고서 번역을 해주고 사업 자금만 마련하면 되는데.’

수혁은 이 제안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정식회원이 되면 모임에 참석해야 할 것 같았고 현재 생활에 이런저런 제약이 생길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 부분은 조금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아시다시피 제가 학생이고 또.”

“염려하는 부분이 무엇인지 잘 아네.”

우진은 그가 예상한 반응이 나오자 말을 잘랐다.

“내 안 그래도 협회장에게 정식회원이 되어도 총회에 참석하기는 어려울 거라고 말해놨네. 원래 총회 참석은 의무가 아니지만 그래도 1년에 한 번은 참석해야 회원자격이 유지되지. 하지만 내가 양해를 구해놨으니 참석을 두고 고민하지 않아도 돼.”

“고맙습니다. 참석문제가 해결됐다면 정회원이 되는 건 어렵지 않을 것 같습니다.”

수혁은 우진이 알아서 일을 처리해주자 안심이 되었다.

“대신 협회장이 조건을 제시하더군.”

“조건이요?”

수혁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수혁군, 내가 사실 협회장과의 대화를 하던 중 모르고 자네의 능력에 대해 이야기를 했네. 물론 자세하게 하지는 않고 살짝 말한 거지만 어쨌든 미안하게 됐어.”

“아닙니다. 교수님이 적당한 선에서 잘 말씀하셨겠죠.”

“당연하지, 이 일로 시끄러울 일은 발생하지 않을 거니까 걱정 마시게.”

“네, 신경 쓰지 말고 말씀하세요.”

수혁은 다음 이야기가 궁금했다.

“내 이야기를 들은 협회장은 무척 놀라워했지. 그러더니 갑자기 두 달에 한 번씩 고서들을 번역해 협회에 발표를 해주면 정회원을 보장해주겠다고 하더군.”

“그런 조건이라면 별로 어렵지 않을 것 같습니다.”

수혁은 어차피 고서 번역을 통해 정기적으로 돈을 벌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전혀 부담을 느끼지 않았다.

“그런데 정회원이 되면 뭐가 좋나요?”

“아, 그 부분을 말 안했구나. 일단 정회원이 되면 협회에서 돈을 받는 절차가 훨씬 간소해지지, 그리고 혹시 나중에 영구회원이 되고 싶으면 정회원 자격은 필수적으로 갖춰놔야 해.”

‘영구회원이 되면 연금이 나온다고 들었던 거 같은데?’

이야기를 듣던 수혁은 자기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교수님, 감사합니다. 앞으로 열심히 일해서 고서들을 많이 번역하겠습니다.”

“휴, 다행이구먼. 말은 안했지만 내 멋대로 일을 처리한 거 같아서 마음이 불편했었네.”

“다 절 생각해주셔서 하신 건데요 뭘.”

“아 깜빡하고 못한 말이 있는데 협회장이 조건을 수락하면 매달 연구비로 200만원을 지급하기로 했다.”

“매달 200만원이요?”

수혁은 처음으로 통화를 하다가 놀란 감정을 드러냈다.

“미안해, 자네의 능력을 고려하면 당연히 훨씬 더 많은 돈을 줘야겠지만 협회의 재정상황이 녹록치 않아서 말이야. 대신 협회에서 뛰어난 번역물에 관해서는 책으로 엮을 수 있도록 출판을 지원해주겠다고 약속 하더군.”

우진은 많이 챙겨 주지 못한 것이 못내 미안한지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아닙니다. 교수님이 도와주신 덕분에 뜻하지 않게 많은 걸 얻게 되네요.”

“아니야, 오히려 우리가 큰 도움을 받았지. 자신을 너무 낮추지 말게. 자네는 자격이 차고 넘치니까.”

“고맙습니다, 교수님. 그러면 번역 작업이 마무리되면 바로 연락드리겠습니다.”

“알겠네, 쉬엄쉬엄하게나.”

“들어가세요.”

전화를 끊은 수혁은 머릿속에 여러 생각들이 떠올랐다.

‘매달 200이라니, 일할 맛이 난다. 그리고 500만원은 상당히 큰돈인데 이 걸로는 뭘 할까? 사업을 하기에는 애매한데.’

90년대에 500만원은 현재와 비교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이 당시 대부분의 대기업이 신입사원에게 130~140만원을 주던 걸 고려하면 500만원은 결코 작은 돈이 아니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그는 이 돈으로 뭘 할지 결정했다.

‘그래 일단 이사를 먼저 가야겠다. 이 돈이면 아파트는 아니어도 빌라는 구할 수 있어.

대부분 전세긴 하지만 일정액의 보증금과 월세를 많이 받는 방식으로 내놓은 매물도 있을 거야. 이번 주말에 부동산 사무실에 가서 집을 알아봐야겠다.’

부모님이 평생 허름한 집에 전전했던 기억을 떠올린 수혁은 새집으로 이사할 계획을 세웠다.

‘주말이 되면 새집은 금방 구할 수 있을 거야. 그것보다 좋은 고서들은 출판을 한다고 했는데 성인이 되기 전에 큰돈을 만질 기회가 올지도 모르겠어. 이 기회를 살려 사업 밑바탕을 마련해보자.’

동기부여가 제대로 된 수혁은 다시 작업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이날 그는 새벽이 다 되도록 쉬지 않고 글을 썼고 사무실에서 쪽잠을 청한 뒤 등교를 했다.

오전 수업이 끝나고 점심시간이 되었다. 수혁은 식사를 마친 후 고된 일로 쌓인 피로를 풀기 위해 정원을 산책하기로 했다.

‘기분 전환이나 하자, 요즘 통 걷지도 못했잖아.’

그는 학교 뒤편에 있는 정원으로 걸음을 옮겼다.

푸른 녹음을 자랑하는 나무들은 조금씩 단풍이 들고 있었다.

‘유리랑 한 번 와본 곳이지만 참 경치가 좋다. 천천히 둘러보자.’

학생들은 친구들과 함께 나와 벤치나 정원 내에 설치된 정자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수혁은 서점에 틀어박혀 번역 일에만 매몰됐던 것을 잊고 시원한 공기를 마시며 주변을 구경했다.

‘컴퓨터랑 책만 보다가 간만에 산책하니까 상쾌하니 좋네. 그런데 이게 무슨 소리지?’

수혁은 정원을 걷던 중 거친 남자의 음성을 들었다. 그는 소리가 건물 뒤 후미진 장소에서 흘러나온다는 것을 알아채고 그쪽으로 걸어갔다.

“야, 장난해?”

“그게.”

‘맨 날 교실에서 같이 나가는 것 같더니 여기 있었네? 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야?’

수혁은 종명과 현우가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몸을 숨기고 이들이 뭐하는 지 지켜봤다.

“돈 가져오라고 월요일부터 계속 이야기했는데 내 말이 말 같지 않냐?”

“나 요즘 너무 힘들어 종명아, 좀 내버려 두면 안 돼?”

종명이 계속 윽박을 지르자 현우는 주눅이 들어있었다.

“내가 좋게 이야기할 때 들어라. 내 선에서 안 끝나면 성준이가 널 가만두지 않을 거야.”

“종명아, 네가 잘 이야기 해줘....... 내가 사정이 있어서 그래.”

“뭘 잘 이야기해! 너, 나 아니었으면 진작에 끝났어. 아우 진짜 그냥 확 어떻게 할 수도 없고.”

종명은 화를 참기 힘든지 몸을 들썩이며 말했다.

“종명아, 내가 일부로 돈을 안 주는 게 아니라. 이유가 있어서 그래, 지금은 말 못하지만 나중

에 해결되면 말해줄게. 그러니까 한번만 넘어가 주라. 우리 친구잖아?”

현우는 자신의 처지를 어필하며 사정했다.

“말하고 싶은 사정이 설마 너희 집 거지된 거 이야기하는 거냐?”

종명은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뭐?”

“왜? 내가 모를 줄 알았냐? 너희 집 망한 거 이미 알만한 애들은 다 알아. 새끼가 그래도 예전에 같이 논 것이 있어서 이렇게까지 말 안 하려고 했는데 거지새끼면 학교 끝나고 알바라도 해서 돈을 벌어, 그럼 낼 수 있을 거 아니야.”

종명은 당황한 현우를 보며 냉정하게 말했다.

“뭐라고? 다 안다고?”

주눅이 들어 고개를 숙이고 있던 현우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종명을 쳐다봤다.

그는 자신의 집안 사정을 아이들이 안 다는 사실에 큰 상처를 받았다.

“그래 새끼야, 알 애들은 다 알아. 그러니까 오버 좀 하지 마. 그리고 내가 이 말은 진짜 안 하려고 했는데 앞으로 너랑 나랑 친구 아니니까 그렇게 알아라.”

“…….”

충격적인 소리를 연거푸 들은 현우는 망연자실하여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개만도 못한 새끼, 못된 줄은 알았지만 사람 새끼가 아니잖아.’

그들의 일에 신경을 쓰지 않기로 했던 수혁은 자신이 겪었던 과거와 비슷한 처지가 된 현우에게 어느새 감정이입을 하고 있었다.

- 31화에 계속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