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더 이상 친구가 아니라고?
침묵을 지키던 현우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종명은 의기소침한 그의 반응에 당황했지만 이내 다시 냉정하게 말했다.
“휴, 나도 이런 말하긴 좀 그런데, 솔직히 우리가 이제 같이 어울릴 급은 아니잖아.”
“…….”
“너희 집 망한 것이 내 잘못이냐? 얘기하다 보니까 내가 무슨 죄인이야. 야, 됐고 돈이나 준비해와.”
종명도 일말의 양심은 있는지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살던 집도 매물로 내놓고 이사 갈 준비하는데 무슨 돈이 있겠어.”
“너희 집이 그래도 주유소를 3개나 운영했었잖아. 사업하는 사람들은 망해도 자기 쓸 돈은 따로 빼놓는다고 하드라 그니까 아버지한테 어떻게든 용돈 좀 달라고 해봐.”
“…….”
“싸가지 없는 새끼가 대답이 없네? 하, 이렇게까지 하기 싫었는데 쳐 맞고 싶냐?”
‘안 되겠다.’
종명의 행동을 계속 지켜보던 수혁은 더 이상 그 모습을 두고 볼 수 없었다. 그는 직접 나서기로 마음을 먹었다.
“끝까지 대답을 안 하네? 야, 내가 우습냐?”
종명은 인상을 쓰며 현우에게 다가갔다.
“왜, 왜 그래 종명아.”
“오늘이 마지막 기회였어, 뭐야? 거기 누구야!”
종명은 현우를 위협하려던 찰나에 누군가 다가오는 것을 발견했다.
“아니, 넌 또 왜 여기 있어?”
수혁은 그의 물음에 답하지 않고 말없이 걸어갔다.
“뭐, 뭐야?”
종명은 어느 새 코앞까지 다가온 수혁을 보자 당황하기 시작했다.
“너 같은 놈은 욕도 아깝다. 개만도 못한 새끼, 네가 인간이냐?”
수혁이 두 눈을 부릅뜨고 종명을 노려보자 그는 간이 오그라드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내 정신을 차린 그는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야, 네 일 아니니까 그냥 가던 길 가. 얘랑 잠깐 이야기하고 바로 갈 거야.”
“무슨 이야기를 했는데?”
“.......”
갑작스러운 질문에 종명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갑자기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이야! 평소에 애들한테 관심도 없는 놈이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남의 일에 참견하는 거야.”
사실 그랬다. 수혁은 학교에서 무슨 일이 벌어져도 관심을 갖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대화를 지켜보던 수혁은 마음속에서 분노가 차올랐다.
친구를 업신여기는 종명의 행동에도 화가 났지만, 쏟아져 들어오는 거친 말을 무기력하게 듣고 있는 현우의 모습에 자신의 과거 모습이 오버랩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슨 이야기 했는데?”
수혁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꾹 참고 다시 물어보았다.
“친구끼리의 사적인 대화를 너한테 이야기할 필요는 없는 것 같은데?”
종명은 수혁의 시선을 피하며 능청을 떨었다.
“친구? 그게 친구냐? 내가 아까부터 네가 하는 이야기 다 듣고 있었거든? 돈을 뜯으려고 하는 걸로도 모자라서 형편이 어려운 친구를 헌신짝처럼 버려? 벌레 같은 새끼.”
“뭐, 뭐? 벌레?”
흥분한 종명은 언성을 높였다.
“그래, 벌레 새끼야, 너 같이 비열한 놈은 벌레라는 단어도 아까워.”
“이 자식이!”
계속되는 수혁의 비난에 이성을 잃은 종명이 달려들었다.
수혁은 종명을 가볍게 피하고 로우킥으로 허벅지를 세게 가격했다.
“악.”
종명은 소리를 지르며 쓰러졌고 수혁은 그런 그를 무심하게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때릴 가치도 없는 새끼. 이런 짓 하다가 또 걸리면 그때는 진짜 죽는다.”
수혁은 냉정하게 말한 뒤 반으로 돌아서는데 종명은 아픈 다리를 움켜쥐며 악다구니를 쓰기 시작했다.
“지금 나쳤어? 내가 하는 일 방해하면 성준이가 널 가만두지 않을 거야.”
“그러든지 말든지.”
“너 성준이가 어떤 앤지 모르지? 내가 다 말할 거야.”
“마음대로 해.”
‘역겨운 새끼.’
마음 같아서는 한 대 더 패주고 싶었지만 더 이상 그와 같은 공간에 있기 싫었다.
수혁은 현우와 함께 정원을 빠져나왔다.
“고마워. 너 아니었으면 정말 큰일 났을 거야.”
“오해하지 마라. 널 도와주려고 한 게 아니라 저 새끼 보기 싫어서 그런 거니까. 그리고 너도 예전에 배종명이랑 같이 애들 얕보고 괴롭혔던 거 알지? 너라고 크게 다르지 않아.”
“그, 그건.”
현우는 위기에서 벗어나게 해준 수혁에게 고마운 마음을 표현했지만, 그는 냉담하게 이야기를 하고 자리를 떴다.
‘하, 좀 심했나? 목마른데 뭐 좀 마시러 가자.’
현우와의 대화로 마음이 심란해진 수혁은 매점에 가서 음료수를 사 마셨다. 그런데 한 남자가 테이블에 앉더니 말을 걸어왔다.
“생각보다 많이 냉정한데? 물론 이해는 가지만.”
큰 키와 훤칠한 외모를 가진 아이였다.
빙글거리며 웃고 있는 그의 얼굴에는 장난기가 가득했다.
‘얜 뭐지?’
수혁은 음료수를 마시며 건너편에 앉은 남자를 바라봤다.
“이야, 너무 하네? 그래도 같은 반인데 누군지는 알아봐야 하는 거 아니야? 아무튼 내 소개를 할게. 난 성경현이야.”
경현은 자기소개를 하며 악수를 청했다. 그러나 수혁은 악수를 받지 않고 그저 그를 쳐다만 보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학교에서 유리 말고 누군가가 말을 건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까칠하기는. 야, 너무 경계하지 않아도 돼. 난 너랑 친하게 지내고 싶어서 온 거야.”
경현은 무안해 손을 거둬들이며 말했다.
“날 알아?”
학교 애들에 대한 경계심이 많은 수혁은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잘 알지, 1학기에 조용히 지내다가 갑자기 화제의 인물로 등극한 강수혁. 근데 뭐 그런 부분 때문에 널 찾아온 건 아니야. 뭔가 너를 보고 있으면 나랑 비슷한 거 같았거든.”
“너랑 비슷하다고?”
“보니까 넌 네 할 일만 하고 학교 일은 관심도 없어 보이던데, 그렇지 않아?”
‘이 녀석 날 관찰한 건가?’
수혁은 경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나도 그렇거든, 1학년 때는 이런저런 활동도 하고 친구도 좀 있었는데 어느 순간 학교가 싫어지더라고. 애들이랑 선생들이 정이 안 간다고나 할까? 혹시 너도 그런 거 아니야?”
“어떻게 알았어?”
수혁은 무심결에 그의 말에 동조했다. 그러자 경현은 신이 나서 말을 이어갔다.
“처음에는 몰랐지, 그런데 2학기 들어 네가 너무 변해서 가끔 너를 지켜봤거든, 그런데 너는 애들에게 인기를 얻거나 선생님의 칭찬, 이런 것에 전혀 관심이 없어 보이더라고 그리고 가끔 보이는 경멸에 가까운 표정들, 그런 것들을 보고 내가 추측했지.”
‘뭐야, 이 녀석 나를 자세히도 봤네.’
수혁은 자신의 속이 다 까발려진 기분이 들었다.
“관찰한 게 기분 나빴으면 미안해, 나도 이놈의 학교가 마음에 안 들어. 선생들부터 학생들까지 나랑 잘 안 맞거든.”
“너는 왜 그러는데?”
수혁은 대화 중 처음으로 관심을 드러냈다.
“이제야 궁금한 게 있나 보네? 음....... 사실 난 어렸을 때 엄청 가난하게 살았어. 그래서 중학교 때까지는 애들한테 무시당하고 살았지, 그러다가 아버지가 사업에 성공하셨고 이 학교에 왔는데 생각보다 애들이 나를 되게 좋아 해주는 거야.”
“그런데?”
“하지만 나중에 실상을 알게 되었지. 이놈들이 나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다른 부분을 좋아하는 거더라고. 그 뒤로 나도 너처럼 아웃사이더의 길을 걷게 되었지. 그건 그렇고 앞으로 조성준이랑 시끄러운 일이 생길 것 같은데 괜찮겠어?”
“그건 네가 신경 안 써도 돼. 내가 알아서 해.”
수혁은 성준의 일에 누군가를 개입시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냉랭하게 말했다.
“조성준 뒤에 중앙회가 있는 건 알지? 어쩌면 내 도움이 필요할 수도 있을 거야.”
“네 도움은 필요 없다고 했잖아.”
수혁은 아직 그를 믿지 않고 있었다.
“오, 물론 널 방해하는 일은 없을 거야. 그리고 혹시 모르잖아? 내가 생각보다 꽤 쓸 만한 놈일지?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불러줘. 개인적으로 너랑 잘 지내고 싶다.”
“바빠서 먼저 일어날게, 이야기 잘 들었고 나중에 또 보자.”
“그래, 언제든지.”
수혁은 대화가 계속될수록 경현에 대한 경계심이 수그러드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에 대한 확신이 들지 않았기 때문에 냉담히 이야기했다.
수혁은 시종일관 명랑한 모습을 보인 경현을 뒤로한 채 교실로 돌아갔다.
“까칠하긴.”
그는 뭐가 좋은지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한편 반에 돌아온 수혁은 자신의 운명을 봐줬던 성욱의 말이 떠올랐다.
‘살면서 이런저런 사건에 많이 휘말릴 수 있다고 했는데 설마 시작되는 건가?’
성준과 마찰이 생길 것을 직감한 수혁은 순간 긴장이 되었다. 그러나 이내 마음의 평온을 되찾았다.
‘어떤 일이 있어도 상관없어, 이제 피하지 않을 거야.’
수혁은 어떤 시련이 닥쳐도 반드시 뚫고 나가겠다고 다짐했다.
시간은 흘러 수업이 끝났다. 종명은 학교가 끝나자마자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다.
그의 발걸음이 멈춘 곳은 선도부실 앞이었다. 종명은 숨을 고른 뒤 노크를 하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왔냐?”
성준은 소파에 누워 만화책을 보고 있었다.
어떻게 했는지는 몰라도 그는 이제 아예 선도부실을 자기 안방처럼 사용하고 있었다.
“어, 성준아 쉬고 있었어?”
“잡소리 말고 오늘 왜 연락했어?”
상냥한 종명의 태도와 달리 성준은 귀찮은 기색이 역력했다.
“그게 말야....... 어, 보고할 게 있어서.”
“뭔데?”
성준은 만화책을 보며 심드렁하게 물어봤다.
“그게, 저번에 못 걷은 돈을 받으려고 하는 걸 우리 반 강수혁이 방해하는 바람에 수금에 차질이 생겼어.”
“강수혁이 누군데?”
“그 네가 준 명단에 별표 쳐져 있는 앤데.”
“병신새끼.”
종명은 움찔했고 성준은 만화책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다하다 별표 쳐 논 새끼 때문에 돈 못 걷었다는 놈은 또 처음이네? 내가 사람을 잘못 봤어.”
종명은 성준의 말에 몹시 당황했다.
“저....... 성준아. 걔는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야, 일단 협박이 먹히지도 않고 싸움실력도 상당하다고.”
“그건 어디까지나 네 수준에서 이야기겠지. 멍청한 자식이 날 피곤하게 만드네.”
“미안해 성준아.”
종명은 고개를 푹 숙였다.
“알았어, 나가봐.”
“응?”
“꺼지라고!”
“미, 미안. 갈게.”
성준이 고함을 지르자 종명은 재빨리 선도부실을 나갔다.
홀로 남은 그는 명단을 뒤적여 수혁에 대해 살펴봤다.
‘싸움을 잘한다고? 괜히 방심해서 일을 키울 필요는 없지.’
실패를 용납하지 않는 성격의 성준은 신중하게 일을 처리하기로 했다. 그는 핸드폰을 꺼내 중앙회 멤버 중 하나인 배기현에게 연락을 했다.
“기현아 나다, 학교에 골치 아픈 녀석이 있는데 네가 와줘야겠어.”
성준은 기현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그는 흔쾌히 승낙했다.
‘강수혁? 내 이름을 듣고도 주눅 들지 않았다고? 선민고에 이런 녀석이 있었나?’
성준은 명단에 적힌 이름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 * *
수혁은 종명과 만난 후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번역일로 쉬고 있던 훈련을 재개했다.
‘이미 조성준한테 내 이야기를 했을 거야, 이제는 정말 대비를 해야 해, 번역은 시간이 넉넉하니까 나중으로 미루자.’
수혁은 칸타빌레로 가는 것을 중단하고 다시 체육관에 나가서 구슬땀을 흘렸다. 스파링을 하자 실전 감각은 금방 올라왔고 수혁은 능숙하게 상대방과 주먹을 주고받았다.
‘종욱이가 안 보이는데?’
수혁은 평소 스파링이 끝나면 지도를 해주던 종욱이 체육관에 나오지 않자 그의 행방이 궁금했으나 이내 훈련에만 몰두했다.
‘뭐 바쁜 모양이지, 신경 쓰지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자.’
수혁은 체육관에서 운동을 하고 나면 집 마당으로 가서 밤잠을 아껴가며 훈련에 매진했다. 그리고 학교에 있을 땐 성준이 자신을 건드릴 경우에 대비해 항상 긴장하고 지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특별한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뭐야, 며칠 지났는데 아무 일도 없잖아.’
수혁은 성준이 어떻게 나올지 지켜봤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게다가 종명은 수혁에게 당한 이후로 교실에서 소란을 떠는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나 정도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건가?’
수혁은 예상 외로 잠잠한 학교 분위기 때문에 긴장이 풀어짐을 느꼈다. 그러나 그는 고개를 흔들며 정신을 차렸다.
‘아니야, 그놈은 한 번 찍은 타겟은 절대 포기하지 않는 놈이었어, 안심하지 말자.’
전생의 기억을 떠올린 수혁은 긴장을 풀지 않고 훈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러나 특별한 일은 일어나지 않은 채 시간은 흘러만 갔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복도 창가에서 밖을 바라보며 상념에 잠겨 있었다.
‘후, 조성준의 굴레는 지긋지긋하다. 이번 생에서는 꼭 끝을 내야겠어. 누구지?’
수혁이 근심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고민하고 있던 그 때, 옆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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