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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 없는 회귀-36화 (36/316)

36화

수혁이 통찰력 향상에 대한 의지를 드러내자 도움말이 꺼지고 퀘스트 창이 활성화되었다.

그는 창에 뜬 느낌표를 누르고 내용을 확인했다.

<바둑을 배우시오.>

열거된 내용 밑에는 퀘스트를 수락할지 말지 선택할 수 있는 표시가 떴다. 그러나 수혁은 보통 때와 달리 바로 퀘스트를 진행하지 않고 머뭇거렸다.

‘아니, 바둑을 배우라니, 이게 뭔 소리야?’

수혁은 황당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그로서는 부지런히 훈련해서 앞으로 벌어 질 싸움에 철저히 대비해야 하는데, 한가롭게 바둑을 배우라고 하니 마음에 와닿지 않았던 것이다.

수혁은 도움말을 켰다.

‘궁금한 게 있는데.’

<말씀하십쇼.>

‘통찰력을 올리는 건 좋은데 다른 방법은 없어? 지금 바둑이나 배우면서 시간을 보내는 게 가당키나 해? 다른 방법들 있잖아, 차라리 종합격투기 경기를 본다는 가, 통찰력에 관련된 책을 읽던가.’

<본 프로그램은 사용자가 통찰력을 가장 빨리 늘릴 수 있는 방법으로 바둑을 추천했습니다. 격투기 영상을 보는 것은 상대방의 힘과 기술을 파악하는 능력을 키우는 직접적인 방법은 될 수 있으나 종합적인 통찰력을 키우기에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그럼, 바둑 잘 한다고 상대방이 나보다 강한 지 약한 지 알 수 있는 거야? 말이 되는 소리 좀 해라.’

<통찰력은 단순히 상대방의 강함을 파악하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의 의도는 물론 사물과 현상의 본질을 바라보는 능력입니다. 이는 지혜와 더불어 인간의 고차원적인 정신 능력이기 때문에 그렇게 쉽게 키울 수 있는 스텟이 아닙니다.>

어플의 상세한 설명에도 수혁은 여전히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지금 이 판국에 바둑을 배우는 것은 무리야. 뭐 다른 것 없을까?’

<바둑은 무한대에 가까운 경우의 수를 지닌 게임입니다. 바둑을 잘 하려면 수많은 경우의 수에서 상대방이 낼 수를 예측하는 능력을 필수적으로 갖춰야 합니다. 이를 수읽기 능력이라고 하는데 이 능력은 통찰력을 키우는데 큰 도움이 됩니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하, 참.......’

그는 절로 한숨이 나왔다.

<본 프로그램은 통찰을 위한 최적화된 퀘스트를 부여했습니다. 사용자는 내키지 않는다면 거부하셔도 됩니다. 단, 당분간 해당 스텟과 연관되는 퀘스트는 작동하지 않을 것을 참고하고 스스로 판단하십시오.>

‘뭐야, 강제로 하라는 거잖아.’

수혁은 프로그램이 퀘스트 내용을 수정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깨닫고 망연자실했다.

그러나 통찰력을 키우는 것은 필수였기 때문에 그는 마지못해 마음을 정했다.

‘휴, 어쩔 수 없네. 최대한 빨리 바둑을 배우고, 힘을 올릴 수 있는 훈련을 찾아야겠다.’

그는 힘없이 수락 버튼을 눌렀다.

‘기왕 이렇게 된 것, 열심히 해봐야지. 일단 몸을 회복하고 퇴원하자마자 칸타빌레에 가서 책을 찾아봐야겠다. 분명, 바둑에 관한 책이 있을 거야.

수혁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퇴원 후 계획을 세웠다.

* * *

시간은 흘러 어느 새 병원에 입원한지 3일이 되었다.

수혁의 몸은 놀라울 정도로 빨리 회복되었다.

몸 곳곳에 아직 통증이 남아있는 부분이 있었지만, 시간을 아껴야 했기 때문에 퇴원 절차를 밟기로 했다.

“저 오늘 퇴원하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수혁은 검진차 병실에 들어온 의사에게 말했다. 그러자 의사는 완강하게 말했다.

“환자께서 비록 거동이 가능하고 회복이 빠른 편이긴 하지만 장기간 치료는 불가피합니다. 환자처럼 몸을 과신해서 조기 퇴원한 사람들 중 후유증에 시달리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선생님, 제가 비록 전문가는 아니지만 몸이 나아진 걸 느끼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환자의 퇴원 의사를 존중해줘야 한다고 생각하고요.”

수혁은 다시 한 번 강하게 퇴원 의사를 밝혔다. 그러자 의사는 잠시 고민을 하더니 말했다.

“의사는 환자를 치료할 의무가 있지만 그렇다고 개인의 자유의사를 무시할 수는 없지요. 퇴원 수속을 밟을 수 있게 조치해놓겠습니다. 단 환자는 미성년자이기 때문에 보호자의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네, 그 부분은 확실히 하겠습니다.”

의사는 문을 닫고 병실에서 나갔고 수혁은 곧 평우에게 전화해 자신의 퇴원에 동의해줄 것을 부탁했다. 그 후 퇴원 수속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고, 그는 옷을 갈아입은 뒤 병원 밖을 나섰다.

‘우선 바둑판이랑 바둑알을 사야겠다.’

병원 앞 도로로 나온 수혁은 택시를 타고 시내로 이동했다. 그는 시내에 도착한 후 큰 마트에 가서 접이식 바둑판 세트를 샀다. 그리고 바로 칸타빌레로 향했다.

서점에 도착한 수혁은 바둑판 세트를 사무실 탁상에다 놓았다.

‘흠 이제, 책을 찾아볼까?’

수혁은 책을 찾으러 사무실을 나오려고 하는데 수북이 쌓인 속옷과 여러 옷가지들을 발견했다.

옷들 옆에는 쪽지가 하나 있었고 그는 내용을 확인했다.

‘수혁아, 할아버지다. 당분간 이곳을 집처럼 사용해라, 그리고 옷들은 밖에 볼 일이 있을 때 입으라고 준비해 놨다. 옷이 더러워지면 다용도실에 세탁기가 있으니 그곳에서 빨도록 하고.’

“감사합니다.”

수혁은 평우의 배려에 절로 혼잣말이 나왔다.

그는 쌓인 옷들을 정리한 뒤 본격적으로 책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방대한 서적을 보유하고 있는 칸타빌레에서 바둑에 관련된 서적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걸로는 안 되겠어.’

간신히 찾은 바둑관련 책들은 이론서가 아닌 잡지나 유명 기사들 간의 대결을 분석해 놓은 것들뿐이었다. 수혁은 최근 도서가 모여 있는 곳에서 도움이 되는 책을 찾지 못하자 고서들을 모아 놓은 책장들로 발걸음을 옮겼다.

‘바둑의 역사는 굉장히 오래됐지, 분명 바둑과 연관된 고서가 있을 거야.’

그는 고서들을 뒤지기 시작했고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수혁은 긴 시간 동안 책을 찾았으나 바둑서적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그러나 다행히도 소득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비록 두 권뿐이지만, 대충 살펴보니 그럭저럭 도움은 될 거 같네.’

수혁은 ‘신선바둑술’과 ‘현수기경’이라 쓰여 있는 고서들을 찾았다.

그는 두 권의 책을 들고 사무실에 들어와 읽어보기로 했다.

‘옛날 사람들의 바둑이라 재밌겠다.’

수혁은 어느새 책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는 먼저 ‘신선바둑술’을 읽어보았다.

‘신선바둑술’은 고대 도교 신자들 중 바둑이 수행에 도움이 된다고 믿는 사람들이 쓴 책이었다. 그들은 신선들이 바둑을 둠으로써 마음을 가다듬고 도력을 높였다고 생각했다.

‘신선들이 두는 바둑이라. 뭐가 허무맹랑하지만, 자세히 읽어봐야겠다.’

책에는 주로 바둑을 둘 때 가져야 하는 마음가짐과 정신수행에 끼치는 영향 등이 서술되어있었다. 물론 바둑을 두는 법에 대한 것도 쓰여 있었는데, 그들은 바둑을 둘 때 한수 한수가 아름다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상대방을 이기는 것도 중요하나, 자신이 둔 수가 아름다워야 하고 나중에 그 수들을 이었을 때 조화를 이뤄야 한다니. 뭔가 형식을 되게 중요하게 여기는 느낌이야. 우선 이 책은 대충 파악이 끝났으니까, 다른 것도 한 번 볼까?’

수혁은 신선바둑술을 덮은 뒤 현수기경을 펼쳐 보았다.

‘이 책은 송나라 시대 때 쓰인 책이군.’

‘현수기경’은 송대에 무명의 학자가 바둑실력을 자랑하는 것으로 내용이 시작됐다.

저자는 자신의 바둑실력이 황실에서도 관심을 가질 정도로 뛰어나다고 했다.

그는 황제의 스승인 국사에게 부름을 받아 종종 바둑을 뒀고, 국사는 저자를 당대 제일의 실력자로 인정해 줬다고 말하며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냈다.

‘가만히 보면 옛날 사람들은 책에 자기 소개하는 것을 굉장히 좋아한단 말이야.’

수혁은 실소를 머금고 계속 읽어나갔다.

책에는 송대에 유행했던 바둑 스타일이 상세히 서술되어 있었다.

당대에 이름을 날렸던 바둑기사들의 한수 한수가 어설픈 그림으로 묘사되어 있었고 저자는 그 수를 격파할 수 있는 묘수를 설명해주었다.

‘대단한데? 내가 바둑을 잘 모르지만, 실력은 확실했던 사람 같아.’

저자는 자신의 현묘한 수를 설명하는 것에 앞서, 책의 서두에는 바둑을 둘 때 알아야 하는 개념들도 적절히 기술하여 기본을 익히는 사람에게도 유익한 내용을 많이 집어넣었다.

‘일단, 현수기경을 통해 기초를 먼저 익혀야겠다. 그리고 직접 바둑판에 두면서 공부하면 배움에 훨씬 효과적이겠어.”

수혁은 바둑판을 책상에 놓고 고서를 읽으며 바둑알을 두었다.

처음에는 익숙하지 않은 터라 집중하는데 시간이 걸렸지만, 어느새 완전히 몰입하여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공부했다.

수혁이 공부를 시작한 지 어느 덧 3일이 지났다. 그는 바둑의 매력에 푹 빠져 밥 먹는 것도 잊어가며 바둑 두기에 열중했다.

‘현수기경보단 신선바둑술이 더 재밌는 거 같아.’

수혁은 두 책을 번갈아 가며 공부했다.

특히 그는 수많은 경우의 수를 계산해 놓는 것보다 아름다운 수를 강조하는 신선바둑술에 푹 빠져있었다.

‘한 수를 두더라도 앞서 놓은 수들과의 조화를 고려하며 두니, 수많은 바둑돌이 하나의 형태로 연결되는 구나. 바둑이 뭔 지 이제 좀 알 것 같아.’

수혁은 기본이 어느 정도 쌓였다는 판단이 들자 종종 혼자서 바둑을 두기도 했다.

그렇게 며칠 동안 쉬지 않고 바둑에 몰두한 수혁은 피로가 몰려왔다.

‘잠깐만 쉬자, 머리가 터질 것 같아.’

그는 놀 거리를 찾기 위해 컴퓨터를 켰다.

컴퓨터에서 머리를 식힐 만한 것을 찾으려고 했지만, 오래된 장부가 저장된 파일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게임이 있을 리가 없지, 그래 놀면 뭐하냐? 쉬면서 번역이나 해야겠다.’

수혁은 일전에 작업했던 텍스트 파일을 열었다.

‘확실히, 처음에 번역했던 고서에 비해 양이 많지 않아. 조금만 더 하면 충의록 번역은 끝낼 수 있겠군. 바둑도 물리는데 이거나 마무리해야겠다.’

그는 성준을 대비하는 것 못지않게 돈을 버는 것도 중요하게 생각했다.

바둑으로 인해 머리가 지끈거렸던 수혁은 기분전환을 위해 번역작업을 했다.

몇 시간이 지났을까, 수혁은 얼마 남지 않았던 충의록 번역을 모두 마쳤다.

‘후, 작업이 끝나니 홀가분하군. 그럼 교수님께 연락해볼까?’

시계는 저녁 8시를 가리키고 있었고 전화를 하기에 큰 무리가 없는 시간이었다.

수혁은 바로 핸드폰을 꺼내 우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혁군, 정말 오랜만이야.”

핸드폰 너머로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교수님 잘 지내셨습니까? 주신 파일들 중, 번역이 끝난 것이 있어서 연락드렸습니다.”

“조금 쉬었다 해도 되는데, 부지런하구나. 그래, 조만간 번역본을 받으러 서점으로 찾아가마.”

“예, 편하실 때 오세요.”

“잘 지내고 있지? 며칠 전 형님에게 전화가 왔는데 너희 부모님에게는 같이 일하는 것으로 해달라고 나에게 당부하셨다.”

우진은 대화도중 평우의 부탁이 떠올랐다.

“괜히 귀찮게 해서 죄송합니다.”

“아니야, 것보다 서점에서 당분간 지내기로 했다면서? 번역 일 말고 따로 해야 할 일이라도 있는 거냐?”

그는 궁금하여 물었다.

- 37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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