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제가 요즘 바둑에 흥미를 갖고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중입니다.”
“바둑이라고? 이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구나. 이거, 언제 한 번 실력을 겨뤄야 되겠는데?”
평소 바둑을 즐겨두는 우진은 반색을 드러냈다.
“저야 좋죠. 안 그래도 저도 혼자 두는 것이 지루했던 참이거든요.”
“그래? 혹시 많이 바쁜가?”
“아니요, 바둑 공부하는 거 외에 딱히 하는 게 없어 바쁘지 않습니다.”
“그럼, 오늘 밤에 시간 괜찮아? 마침 나도 할 일이 없어 여유가 있거든. 그리고 만난 김에 번역본도 챙겨야겠고 말이야.”
우진은 바둑을 두고 싶은 마음에 급작스럽게 약속을 잡으려했다.
“오히려 제가 감사하죠. 번역본은 미리 뽑아놓겠습니다. 편하실 때 오세요. 어차피 요즘 잠을 거의 안 자거든요.”
“잘됐군. 내 전화 끊고 바로 준비해서 가겠네.”
수혁은 기꺼이 제안에 응했다.
‘실력을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그는 3일 동안 바둑에 열중한 결과, 적지 않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고 그로 인해 통찰력도 13에서 16으로 증가했다.
수혁은 우진이 오기 전까지 공부했던 것을 복기하며 대결 준비를 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입구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나 왔네.”
“예. 교수님 저 여기 있습니다.”
사무실에 있던 수혁은 그를 마중 나갔다.
“그래, 자네가 형님 대신 여기를 관리하는가?”
“아닙니다. 그저 잠시 신세를 지고 있는 중입니다. 뭐 마실 거라도 드릴까요?”
“괜찮아. 그것보다 들어가세, 내 당장 바둑을 둘 마음에 손이 근질거리는구만.”
우진은 번역본은 안중에도 없고 오직 바둑 둘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했다.
“이쪽으로 오세요.”
수혁은 우진을 데리고 사무실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바둑판 위에 놓인 바둑알들을 정리하며 대결 준비를 했다.
“흑과 백 중 무엇으로 하시겠습니까?”
“아무래도 내가 백을 잡는 것이 맞지 않을까 싶네. 자네는 아직 초보자이지 않나?”
“예, 그러면 제가 흑을 하겠습니다.”
“자네, 몇 점을 깔고 두는게 좋겠나?”
우진은 초심자인 수혁을 배려하고자 하였으나 그는 제대로 두고 싶었다.
“호선으로 두고 싶습니다.”
“하하하, 자네가 뛰어난 인재란 건 내 알지만, 바둑을 이제 막 시작한 상태에서 나와 호선으로 두면 상대가 되지 않을 걸세. 내가 비록 프로는 아니나 프로기사랑 접바둑을 두면 쉽게 지지는 않는다고.”
우진은 호탕하게 웃으며 수혁을 만류했다.
“괜찮습니다. 짧은 기간이지만, 나름대로 깨달음을 얻어서 드리는 말입니다. 그리고 설사 제가 지더라도 배우는 것이 있으니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냥 호선으로 두면 안 되겠습니까?”
“자네 뜻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구먼, 그럼 먼저 두시게.”
우진은 떨떠름했지만, 수혁의 계속되는 고집에 그냥 두기로 했다.
“시작하겠습니다.”
수혁은 돌을 들어 바둑판 위에 놓았다.
그러자 우진은 일체의 망설임 없이 다음 수를 두었다.
그들은 말없이 바둑을 두었고 초반은 빠르게 흘러갔다.
호쾌하게 바둑돌을 놓던 그들은 중반에 다다르자 손이 느려지더니 치열한 수 싸움을 벌였다.
“허, 이런 수는 처음 보는군. 참, 묘하구먼.”
우진은 종종 수혁의 수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현대 바둑에 익숙한 터라 옛 바둑은 신선하게 느껴졌다.
어느덧 바둑은 종반에 이르렀다. 그들은 각자가 확보한 집을 세어가며 마지막 수읽기를 하고 있었다.
“후, 끝났군. 수고했네.”
“고생하셨습니다.”
꽤나 긴 시간 동안 둘은 바둑을 두었고 그 결과 우진이 반집차이로 간신히 이겼다.
“제가 졌군요.”
오랜 대국 탓에 목이 말랐던 수혁은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왔다.
“후 자네는 정말.”
우진은 자기도 모르게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는 비록 프로기사는 아니었으나 어렸을 때 바둑을 배웠고, 평생을 취미로 바둑을 즐겨왔다.
그런데 바둑을 배운지 며칠 지나지 않은 수혁과 호각을 다툰 사실이 믿기 어려웠다.
“미안하지만, 다시 묻겠네, 바둑을 공부한 지 얼마 안 되었다는 말이 사실인가?”
“예, 교수님과 대국을 하기 전까지, 3일 정도 책을 보며 독학으로 공부한 게 전부입니다.”
“말도 안 돼.”
우진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래도, 교수님한테 많이 배웠습니다. 허점을 노리고 두었던 수가 오히려 패착이 되는 지점에서 제 실력이 아직 부족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아닐세, 자네의 바둑실력은 이미 웬만한 실력가들과도 붙을 수 있을 정도야. 짧은 시간에 이 정도 실력을 쌓다니, 혹시 전문적으로 바둑을 둘 생각이 있는 거 아니야?”
우진은 수혁의 재능에 감탄하며 물었다.
“아닙니다. 그저 필요하여 배우는 것일 뿐, 업으로 삼을 생각은 없습니다.”
“그렇구먼, 또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 바둑을 두다보니 너무 혼란스러워서 말이야.”
“어떤 점에서 그러셨나요?”
“내가 프로기사들의 대국도 즐겨보고 바둑도 제법 둔 편인데, 자네처럼 바둑을 두는 사람은 처음이네.”
우진은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바둑 스타일에 신선한 충격을 느끼고 있었다.
“제가 고서를 통해 바둑을 공부했기 때문에 기풍이 생소하셨을 겁니다.”
“아니, 이 서점에 바둑에 대한 고서도 있었어? 형님의 수집품들은 보면 볼수록 대단하네.”
우진은 고서에 관한 이야기를 듣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건 그렇고, 바둑을 정식으로 배워볼 생각은 없나? 업으로 삼지 않아도 자네의 잠재력이 아깝네. 3일 만에 이 정도 성장이라면, 제대로 배웠을 때는 금방 일취월장 할 걸세.”
“아닙니다. 저는 지금 공부하는 것으로도 만족합니다. 어차피 잠깐만 바둑을 두는 거라서 굳이 다른 곳에 가서 배울 생각은 없습니다.”
수혁은 완곡하게 거절의사를 밝혔다.
“허허, 아쉽구만. 자네가 좋은 스승 밑에서 바둑을 배우면 엄청난 성과가 있을 텐데 말이야. 수혁군, 내 충고 하나 해도 괜찮을까?”
“네.”
“자네가 공부한 옛 바둑은 확실히 대단하네. 생소하기도 하고 어떤 면에서는 예술적인 가치가 느껴지는 부분도 있었어. 하지만 계속 그런 식으로 바둑을 두면 어느 순간 한계에 봉착할 걸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한계라니요?”
수혁은 우진이 자신의 바둑을 폄하한다고 느껴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내 말을 곡해하지 말게, 자네 바둑이 나쁘진 않지만, 일류들에게는 통하지 않을 거라는 말이니까. 괜찮다면 바둑을 한 번 다시 둬볼까?”
우진은 바둑판을 정리하며 도발적인 투로 말했다.
“얼마든지요. 전, 상관없습니다.”
수혁의 얼굴은 살짝 상기되어 있었다.
바둑판이 모두 정리되자 둘은 다시 바둑을 두었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초반흐름은 빠르게 진행됐다. 이들은 서로 거침없이 돌을 두며 탐색전을 했고 승부는 곧 중반에 다다랐다.
‘아까보다 고민을 오래 하시네?’
우진은 첫판보다 훨씬 신중하게 바둑돌을 두었고, 대국은 어느새 끝이 났다.
“제가, 졌습니다.”
“수고했어.”
수혁은 믿을 수 없는 결과에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둘의 대결은 여섯 집 차이로 이전보다 격차는 더 벌어졌다.
그는 첫판에 거의 대등한 바둑을 두었기에 이길 수 있을 거라는 마음으로 승부에 임했으나 결과는 처참했다.
“꽤나 놀란 표정이구만. 궁금하지 않나? 어떻게 된 일인지.”
“.......네, 궁금합니다.”
수혁의 얼굴에는 짙은 허탈감이 배어있었다.
“자네의 수는 확실히 기발하고 놀라운 면이 있었네, 그래서 처음에는 많이 당황했지. 그러나 두 번째 판부터는 허점들이 보이기 시작하더군.”
“허점이요?”
수혁은 더욱 집중해서 경청했다.
“바둑은 긴 역사 속에서 꾸준히 발전해왔네. 즉, 전통바둑이라고 해서 현대바둑보다 더 낫다고 볼 수 없는 거지.”
“무슨 말씀이신지.......”
“예를 들면, 과거에 최강을 자랑하던 기사들이 갑자기 나타난 젊은 기사에게 지는 경우를 생각해보게, 현대 바둑에서는 이와 같은 일이 심심치 않게 발생하곤 하지. 흠, 잠깐만.”
우진은 목이 마른지 물을 한 모금 마신 뒤 말을 이어갔다.
“바둑을 오래 둔 사람은 자신의 기풍을 고치기가 힘들어, 반면에 어린 기사들은 선배들이 쌓아온 토대 위에 한층 더 강한 바둑을 가지고 세상에 나오곤 하지.”
“무슨 말씀인지 알 것 같습니다.”
수혁은 현대 바둑이 고서 안에 있는 바둑보다 더 강하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되었다.
“어떤 연유로 바둑을 배우는지는 모르겠지만, 빠른 시간 안에 실력을 늘리고 싶으면 내가 말한 대로 제대로 된 스승에게 현대 바둑을 배우는 편이 훨씬 나을 걸세.”
“듣고 보니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내일부터 바둑을 배울 수 있는 곳을 찾아봐야겠네요.”
수혁은 그의 조언을 받아들여 훈련의 효율성을 높이기로 결정했다.
한 달 안에 통찰력 외에도 힘을 적절히 키워야 했기 때문이다.
“혹시, 아는 기원이라도 있나?”
“없습니다. 교수님이 가시고 나면 한 번 찾아볼 생각입니다.”
“그럴 거 없네, 마침 기원을 운영하는 친구를 한 명 알고 있거든. 나름 이쪽 바닥에서는 이름난 녀석인데, 배워보겠는가?”
우진은 수혁에게 기원을 추천해줬다.
“물론입니다 교수님, 그래주시면 감사하죠.”
수혁은 우진의 지인이라면 믿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럼 그 친구에게 미리 연락을 해두지, 그리고 이 걸 받게.”
우진은 지갑에서 명함을 하나 꺼냈다.
“명함을 보면 주소가 적혀 있으니 편할 때 찾아가봐, 내 소개로 왔다고 하면 알아들을 거야.”
“고맙습니다.”
“고맙긴. 이래 봐도 프로기사를 다수 배출했을 정도로 지도력은 검증된 친구니까, 가면 배울 것이 많을 거야.”
“교수님이 보증하시는 분이라면 걱정 없습니다.”
수혁은 명함을 주머니에 넣으며 말했다.
“훗, 안본 새 넉살이 늘었구먼. 그건 그렇고 괜찮으면 한 판 더 두는 것이 어떤가?”
“좋습니다.”
이날 밤, 그들은 새벽이 다 되도록 늦게까지 바둑을 두었다.
* * *
‘그럼, 슬슬 출발해볼까?’
바둑을 두느라 새벽에 잠이 든 수혁은 아침 10시가 돼서야 일어났다.
그는 샤워를 하고 옷을 입은 뒤 서점을 나섰다.
‘주소를 보니 지하철을 타고 가야겠군. 그러고 보니 회귀한 후로 지하철은 처음인가?’
수혁은 시내에 있는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기원은 역에서 세 정거장 떨어진 곳에 있었다. 그는 얼마 안 가 목적지에 도착했다.
‘지도를 보면 역 근처인 거 같은데?’
수혁은 명함 뒤편에 그려진 약도를 보며 기원을 찾기 시작했다.
역 주변은 번화가로 건물들이 복잡하게 들어서 있어, 예상보다 찾는 것이 쉽지 않았다.
‘후, 다 왔다.’
기원은 한 눈에 보아도 오래된 3층짜리 건물에 자리 잡고 있었다.
건물 2층에는 현천기원이라고 쓰인 간판이 걸려있었고 이는 명함에 적힌 기원명과 일치했다.
위치를 확인한 수혁은 지체 없이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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