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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 없는 회귀-38화 (38/316)

38화

‘불도 안 켜져 있는데 들어가도 되나?’

2층에 도착한 수혁은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계십니까?”

기원은 아직 아침이라 그런지 텅 비어있어, 인기척을 찾아볼 수 없었다.

‘이런 곳에서 바둑들을 배우는 거구나.’

기원 내부에는 많은 테이블들이 놓여 있었고, 각 테이블에는 바둑판과 바둑알이 세팅되어 있었다.

“누구요?”

한 노인이 안쪽에 위치한 사무실 문을 열고 나왔다.

그는 생활 한복을 입고 수염을 멋있게 기르고 있었는데 왠지 모를 기품이 느껴졌다.

“안녕하십니까? 혹시 공효석 원장님 되십니까?”

“그렇소, 학생 같은데 누구신가?”

“예 저는 김우진 교수님의 소개를 받고 온 강수혁이라고 합니다.”

“안 그래도 김 교수가 아침에 전화 와서 학생 하나가 조만간 방문할 거라고 했는데, 이렇게 빨리 올 줄이야.”

효석은 눈이 침침한지, 안경집에서 안경을 꺼내 썼다.

“네, 어제 말씀을 듣고 바로 오는 길입니다.”

“흠, 그렇구먼. 이쪽으로 오게, 가볍게 차나 한잔 하지.”

효석은 수혁을 사무실로 데리고 들어갔다. 그는 수혁에게 자리를 권한 후 다기를 꺼내 차를 만들었다.

“그래, 바둑에 흥미가 있다면서?”

“예, 원장님께서 바둑에 조예가 깊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후학양성도 아주 잘 하신다면서요?”

“하하, 김교수가 그리 말하던가? 자, 우선 차 좀 들게.”

효석은 찻잔을 수혁에게 건넸다.

“과거에 내가 프로들을 다수 배출했던 것은 사실이네, 한 때는 바둑에 대한 열의에 찬 학생들로 기원이 가득 찬적도 있었지, 물론 그것도 이제 옛말이지만 말이야.”

새삼,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는지 효석의 눈빛은 아련했다.

“원래라면 내가 자네 같은 초보를 가르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듣자 하니 바둑을 시작 한지 얼마 안 됐다면서.”

“오늘로 4일째 입니다.”

“4일? 하, 이거야 원....... 아예 처음부터 배워야겠구먼. 자네, 바둑을 속성으로 배우려고 한다면서? 이봐. 바둑이 그렇게 짧은 기간에 숙달될 수 있는 것이 아니야. 나름 기대했는데 실망이야.”

효석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제가 비록 배움은 짧으나, 기초는 갖췄다고 생각합니다.”

“이 친구야, 자네가 배운 건 배운 것도 아니야. 바둑은 기초를 잡는데도 상당한 시간이 필요해. 김교수의 부탁도 있고 해서 직접 가르쳐보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안 되겠어, 내, 기본서를 하나 줄 테니 그것을 보고 혼자 공부를 하게.”

“어떻게 하면 원장님께 배울 수 있습니까?”

수혁은 계속되는 무시에 기분이 상했지만, 꾹 참고 물어봤다.

“나중에 테스트를 해서 기초를 뗐다는 판단이 서면 그때 수업을 시작하겠네.”

“저....... 방금 말한 테스트 지금 하면 안 되겠습니까?”

오기가 생긴 수혁은 당장 테스트를 치르고 싶었다.

“뭐, 안될 건 없지. 하지만 기본도 안 돼 있는 사람과 돌을 섞고 싶지 않아.”

“그러지 말고 바둑 한 번 두시죠. 나쁘지 않을 겁니다.”

수혁은 집요하게 테스트를 요청했다. 그러자 효석은 혀를 차기 시작했다.

“쯧쯧, 젊은 친구가 무모하구먼. 만약 테스트에 합격하지 못하면, 나한테 바둑을 배울 수 있는 기회는 영영 없을 걸세, 그래도 해볼 텐가?”

“예, 바로 시작하죠.”

‘어차피 기본서를 볼 시간 같은 거는 없어, 떨어지면 어쩔 수 없지 뭐.’

수혁은 마음을 굳게 먹고 단호하게 말했다.

효석은 사무실 안에서 오래된 고목으로 만든 바둑판을 하나 가져왔다.

그는 자연스럽게 흑돌을 수혁에게 쥐어줬다.

“9점 깔게, 자네랑 80수 이상 둬보고 일정 이상 실력이라 판단되면 테스트는 통괄세. 하지만 기준이하라고 여겨지면 바로 바둑을 중단할 테니, 그런 줄 알게.”

“3점이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효석은 그 말을 듣자 얼굴이 벌게졌다.

“아니, 굉장히 오만불손하구먼, 내 자네와 바둑을 두는 것 자체도 쉽지 않은 선택인데 초보를 상대로 9점도 아니고 3점으로 상대하란 말인가? 자네 내 이야기는 들었나? 내 비록 9단 입신의 경지는 아니었지만, 프로기사로 잠시 활동도 했던 사람이야.”

“이미 말씀은 드린 것 같습니다. 한 번만 믿어주시고 테스트를 해주십쇼.”

“고얀 녀석....... 먼저 두어라.”

효석은 수혁을 노려보았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수혁은 돌을 집어 바둑판에 놓았다.

“돌 놓는 폼은 그럴싸하군.”

효석은 코웃음을 치며 돌을 두었다. 초반은 우진과의 대국과 마찬가지로 빠른 전개의 양상을 보였다.

“제법인데? 30수안에 실력이 바닥을 보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산이었어.”

“.......”

수혁은 대꾸하지 않고 계속 바둑을 두었고 승부는 초반을 지나 중반에 다다랐다.

“자네, 무슨 그런 얼토당토않은 수를 두는가? 내가 잘못 생각했나 보군.”

수혁이 고서에서 배운 대로 돌을 두자, 효석은 그의 밑천이 드러났다고 생각했다.

“이미 80수는 지났습니다. 그리고 승부는 해봐야 압니다.”

수혁은 효석을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이런 초보적인 실수를 하는 사람과 무슨 승부인가?”

효석은 수혁을 가볍게 무시하고 거침없이 돌을 두는데 갑자기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니, 실수라고 생각했던 수가 이렇게 이어지다니, 이거 참 묘하구먼.”

“두시죠.”

“허허, 내 기본은 갖췄다고 인정하지, 테스트는 통과했네. 내 자네를 직접 지도하지.”

효석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자신이 수혁을 잘못 판단했음을 시인했다.

“이번 판은 끝까지 가셔야죠. 중간에 멈추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수혁은 아까부터 계속 무시 받은 터라 승부욕이 잔뜩 올라와있는 상태였다.

“자네, 혹시 나를 이길 작정인가? 하하, 승부가 들어왔으면 지금부터는 나도 진지하게 둬야겠어. 알겠네, 제대로 하지.”

효석은 씩 웃더니, 자세를 고쳐 앉고 대국에 집중했다. 그러자 팽팽했던 바둑의 형세가 급격하게 기울기 시작했다.

“자네, 뭘 하는가 빨리 두게.”

“……”

막바지에 다다를 때까지 효석은 단 한 번의 망설임 없이 수를 놓았다. 반면에 수혁은 갈수록 생각하는 시간이 길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뒤 대결은 끝이 났다.

“제가 졌습니다......”

“허허, 그래도 제법 잘 했어, 내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뛰어난 실력이었네.”

수혁은 효석에게 열 집 이상의 차이로 완패했다.

대국 종반까지 치열한 수 싸움이 일어나지 않은 것을 볼 때, 둘의 실력은 비교가 불가했다.

“표정을 보니, 결과에 납득은 된 것 같고. 지금부터는 자네의 패인에 대해 이야기 해볼까?”

“네, 원장님.”

효석은 차를 마시며 여유롭게 말했다.

“기본적으로 실력이 부족한 탓도 있지만, 가장 큰 패배원인은 자네의 기풍에서 비롯되네. 내 보아하니 일본기사들과 비슷하게 바둑을 두는 것 같은데......”

“그렇습니까?”

“내 눈이 정확하다면, 내 말이 맞을 걸세.”

“자세한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수혁은 진지하게 그의 말을 경청했다.

“일본의 기사들은 이기기 위한 바둑이 아니라 아름다운 바둑을 추구하네. 즉 실리보다는 형식을 추구하지. 그러다 보니 80년대 초까지만 해도 바둑 강국이었던 일본은 실리를 추구하는 우리나라나 중국에게 금세 따라잡혔지.”

일본은 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세계적으로 유명한 기사들을 많이 배출했고 바둑에서 가장 앞선 나라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80년대 후반부터는 한국과 중국의 기사들에게 밀리는 경우가 많이 발생했고, 현재는 과거의 영광에서 다소 멀어진 상황이었다.

“물론 형식을 추구하는 바둑이 약하지는 않아, 일본 기사들은 빠른 시간 안에 두어야 하는 속기바둑 보다 장고가 가능한 바둑에서 강한 면모를 보이네, 긴 시간을 들이면 형식의 완전성을 도모하기가 용이해지니까.”

“맞습니다. 저도 만약에 시간이 충분했다면, 좀 더 완벽한 수를 둘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수혁은 설명을 들으며 크게 공감했다.

“자네의 문제는 크게 두 가지야. 첫째는 형식의 미를 추구하는 바둑을 흉내는 내나, 숙달되진 않았어. 그리고 둘째는 경험의 부족에서 나오는 미숙함인데, 이 문제가 가장 치명적이라고 여겨지네.”

수혁은 효석의 분석에 저도 모르게 머리를 끄덕였다.

“경험이 부족하다 보니, 상대의 다음 수에 대한 예측능력이 떨어져 보이네. 짧은 기간에 그 정도 실력을 쌓은 건 훌륭하나, 결국 수읽기 능력을 갖추지 못하면 바둑의 고수가 되기는 어렵다고 볼 수 있지.”

‘원장님의 말씀을 들으니, 어플이 통찰력 향상 방안으로 왜 바둑을 추천했는지 알겠다.’

수혁은 적게나마 남아있던 바둑에 대한 의구심을 모두 거둬들였다.

“자, 이것으로 패인에 대한 분석을 마치고, 바로 보완에 들어가자고. 잠시만 기다려보게.”

효석은 일어나더니 책상 서랍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종이뭉치를 잔뜩 들고 자리로 돌아왔다.

“그것들은 뭡니까?”

“이건, 내가 지난 5년간 유명기사들의 시합을 직접 기록한 기보들이야. 넌 지금부터 이것들을 보면서 현대바둑의 트렌드와 기사들이 어떤 방식으로 바둑을 두는지 연구해야 돼.”

“네, 알겠습니다.”

효석은 수혁에게 기보들을 분석할 것을 지시했다.

“기초는 돼 있으니, 대국 과정을 분석하는 건 문제없을 거야. 내가 볼 땐 이 방법이 수읽기 능력을 키우고 경험을 쌓는데 가장 효율적이야. 그러니 부지런히 기보들을 봐라. 참고로 이곳엔 기보들이 차고 넘치니까, 양 걱정은 하지 말고.”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래, 그럼 수고해라.”

할 말을 마친 효석은 사무실을 나갔고 수혁은 테이블에 쌓인 종이들 중 하나를 집어 천천히 살펴봤다.

‘이곳에 오길 정말 잘한 것 같아, 교수님에게 큰 신세를 졌어.’

수혁은 우진에게 감사한 마음을 느끼며 부지런히 기보를 살펴봤다.

‘확실히 다르다. 형식의 완결성을 추구하는 고서의 바둑과 달리 현대의 바둑은 군더더기 없는 수를 추구하는 구나. 그 둘을 비교하는 것은 지금 내 실력으로는 어림없는 일이겠지만, 믿고 따라보자.’

수혁은 수많은 기보들을 분석하며 바둑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을 얻고 있었다.

* * *

‘촌음을 아껴야 돼.’

수혁은 점심 먹는 시간을 제외하면 사무실에서 계속 기보를 공부했다. 시계는 어느새 오후 4시를 가리키고 있던 그때, 효석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정말 대단한 집중력이야, 벌써 내가 준 기보를 반 이상 봤구나.”

“네 원장님, 정말 큰 도움이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럼, 기보들을 얼마나 이해했는지 한 번 시험해볼까?”

효석은 다시 바둑판을 가져왔다.

“네? 또 바둑을 두나요?”

“그래, 앞으로 너는 매일 내가 주는 기보들을 분석하고 바둑을 둘 거다. 기보를 통해 간접적으로 경험을 쌓는 것은 분명 좋은 방법이지만, 익힌 것을 실전에 활용하지 않으면 금방 기억에서 사라지는 법이야. 자, 각설하고 시작하자.”

말을 마친 그는 수혁에게 돌을 쥐어줬다.

“이번에도 3점을 깔고 해보자. 아까 말 한데로 원래 방식이 아니라 새로 익힌 방법으로 둬야한다.”

“명심하겠습니다.”

수혁은 기보를 분석해 얻은 지식을 바탕으로 바둑을 두었고 늦은 밤이 돼서야 대국은 끝이 났다.

- 39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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