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많이 나아졌군. 처음과 비슷한 차이로 지긴 했지만, 이전에 보였던 허점들이 많이 줄어들었어.”
효석은 대국 과정을 복기하며 흡족해했다.
“열심히 해서 더 좋은 모습 많이 보여드리겠습니다.”
“그래, 오늘은 이만하면 됐다. 기원은 8시부터 여니까, 내일은 좀 더 일찍 오거라.”
“네, 알겠습니다. 그럼,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수혁은 인사를 하고 기원을 나왔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바깥은 칠흑 같은 어둠이 쫙 깔려있었고 거리는 한산했다.
‘기원에 오길 잘했어, 확실히 책만 보고 공부하는 것보단 훨씬 효율적인 것 같아. 최대한 빨리 실력을 키워서 힘 스텟도 올릴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해보자.’
하루 배웠을 뿐인데 실력이 급성장 하는 것을 톡톡히 느낀 수혁은 당분간은 바둑공부에 더 정진해야겠다고 다짐했다.
* * *
다음 날이 되었다. 수혁은 본격적으로 바둑공부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기원이 문을 열면, 들어가 곧바로 기보를 분석했고 저녁이 되기 전까지는 원장과 바둑을 두며 실력을 점검했다.
“내, 나이가 드니 바둑 몇 판 뒀다고 힘에 부치는구나, 체력만 되면 온 종일 너와 바둑을 둘 텐데 말이야. 참, 세월도 야속하지.”
“아닙니다. 매일 살펴주셔서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효석이 피로한 눈을 비비며 하는 말에 수혁은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내심, 모든 시간을 훈련에 쏟지 못해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내게는 이렇게 낭비할 시간이 없어, 남는 시간 무엇이든 다른 훈련을 해야겠다.’
그는 저녁이 되어 칸타빌레에 돌아오면, 격투기 교본을 읽으며 혼자 연습했다.
비록 샌드백이 없어 타격훈련을 하기 힘들었지만, 자세를 교정하고 맨몸 운동을 하며 하루도 훈련을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퇴원 후 첫 주말이 되었다.
‘오늘도 파이팅 해보자.’
기원은 일요일을 제외하면 항상 열려있었다. 수혁은 이날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오전에는 기보를 분석하고 오후에는 효석과 바둑을 두었다.
“실력이 많이 늘었구나, 3점 바둑이긴 해도 나와 수 싸움을 벌이다니.”
효석은 믿기 어렵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직 멀었습니다. 그래봤자 한 번도 이긴보지 못했잖아요.”
“허허, 난 평생을 바둑만 둔 사람인데 날 그렇게 쉽게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거냐?”
그는 패기 넘치는 수혁의 말에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어쨌든 수고 많았다. 내일은 푹 쉬고 월요일 날 보자.”
“감사합니다.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그 동안 얼마나 늘었을까?’
기원을 나온 수혁은 어플을 켠 뒤 스텟을 확인했다.
통찰력은 지난 5일 동안 향상을 거듭해 어느 새 19가 되었다.
이는 수치가 높아질수록 성장속도 느려지는 스텟의 특성을 고려했을 때, 나쁘지 않은 성과였다.
‘통찰력이 조만간 20을 넘겠군, 고작 1주일을 투자한 것 치고는 빠른 성장이야. 그건 그렇고 온 종일 바둑만 둬서 그런 지 너무 배고픈데?’
그는 두뇌활동에 에너지를 많이 소모해서인지 몹시 출출한 상태였다. 마침 기원 주변에는 맛집들이 많이 있었고 수혁은 그 가운데 백반을 전문으로 하는 식당에 들어가 밥을 먹었다.
“잘 먹었습니다.”
계산을 끝낸 수혁은 가게에서 나와 역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그때, 한 무리의 남자들이 오락실에서 시끄럽게 떠들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야, 내가 이겼으니까. 네가 밥 사라!”
“치사해서 진짜, 저한테 유리한 게임만 해놓고 뭐래냐?”
“네가 내기하자고 해놓고 뭔 개소리야.”
“알았어 알았어, 메뉴나 정해!”
교복을 입은 학생들은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하며 오락실을 나오고 있었다.
“어라? 쟤, 저번에 우리한테 겁나 맞았던 새끼 아니야?”
친구들 사이에서도 가장 큰 덩치를 자랑하는 사내는 수혁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러게? 기현이 말로는 한동안 병원신세라고 했는데, 벌써 돌아다녀?”
그들은 배기현의 친구들로 일전에 학교에 찾아와 수혁을 구타했던 놈들이었다.
“찌그러져야 할 새끼가, 뭐하고 다니는 거야? 야, 너! 일로 와봐.”
수혁을 한 눈에 알아봤던 녀석이 고함을 질렀다.
‘젠장, 하필 이럴 때 마주치다니.’
수혁은 이전 싸움에서 생긴 두려움이 아직 남아있었다. 그는 저들과 정식으로 싸운 적은 없으나 신중해질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씁, 빨리 안 와? 입원했다더니 우릴 그새 잊었어?”
‘일단 나와 붙었던 녀석은 없는 것 같군. 그래, 부딪혀보자.’
수혁은 마음을 진정시킨 뒤 그들에게 다가갔다.
“야 밥 사먹게 돈 좀 줘봐.”
“내가 왜?”
그는 남자의 요구에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이 새끼가 또 쳐 맞으려고 환장했나? 말로 할 때 돈 주고 꺼져.”
“병신새끼가 뭐라는 거야?
“아무래도 교육을 다시 받아야 할 거 같은데?”
남자는 손을 우두둑 꺾으며 눈을 치켜떴다. 그러나 수혁의 마음에는 어떤 동요도 일어나지 않았다.
‘저 새끼랑 붙어보진 않았지만, 지진 않을 것 같은데?’
수혁의 통찰력은 최근에 비약적으로 상승하여, 이전보다 수월하게 상대의 역량을 가늠할 수 있게 되었다.
“꼬우면 한 번 해보든가. 가만 보니까 너네 대가리도 없는 것 같은데, 너무 자신만만한 거 아니야?”
“누구? 기현이? 푸핫, 네까짓 놈 처리하는데 기현이까지 낄 필요가 있겠냐? 야! 너희들은 가만히 있어, 나 혼자면 충분하니까.”
수혁에게 시비를 걸며 떠들던 사내가 호기롭게 앞으로 나섰다.
“자, 먼저 공격해도 좋으니까, 네 마음대로 해봐.”
“......”
수혁은 사양하지 않고 스텝을 밟아 간격을 좁힌 뒤, 복부에 스트레이트를 꽃아 넣었다.
“흐흐, 제법 묵직한데?”
녀석은 어렵지 않게 주먹을 막아낸 다음 로우킥을 날렸다.
그러자 수혁은 한쪽 다리를 들어 킥을 막아낸 다음 엘보우로 상대의 턱을 가격했다.
“커억.”
남자는 턱에 들어온 강한 충격 때문에 제대로 서있지 못하고 몸을 비틀거렸다.
“이 새끼가!”
흔들리는 몸을 간신히 추스른 남자는 몸을 낮추더니 하단태클을 시도했다.
그러나 수혁은 두 다리를 뒤로 빼, 태클을 방어한 다음, 두 팔로 그의 목을 감아 압박했다. 그러자 남자는 얼마 안가 그대로 실신해버렸다.
“야! 정신 차려!”
“뭐야? 그냥 쳐 발렸잖아?”
친구가 맥없이 쓰러진 모습을 본 남자들은 웅성대기 시작했다.
“계속 할까?”
수혁은 옷에 묻은 먼지를 털며 여유롭게 말했다.
“어차피, 저 자식은 혼자고 우리는 다섯이야. 그냥 저번처럼 밟자.”
“그래, 길이 좁아서 도망칠 수도 없을 거야.”
“뭣들 해? 가서 조져야지!”
그들은 일대일로는 이길 수 없다는 판단이 서자 동시에 덮치기로 마음을 먹었다. 남자들은 메고 있던 가방을 땅에 내려놓고 천천히 거리를 좁혀왔다.
‘양아치 새끼들, 역시 예상을 빗나가지 않는군. 다행히 골목이라 저놈들을 상대하는데 어렵지 않겠어.’
수혁은 한 명씩 차례대로 상대하기 위해 일부러 막다른 곳으로 이동한 뒤 벽을 등지고 섰다.
“큭큭, 구석으로 알아서 기어 들어가네? 이번엔, 병원에서 오래 쉬게 해줄게.”
“언제까지 주둥이만 털래? 잔말 말고 들어와라.”
“뭐야?!”
“죽여!”
수혁 가소롭다는 듯 도발하자 그들은 흥분하여 달려들기 시작했다.
“거기 뭐해!!”
그 순간이었다. 달려드는 사내들 뒤로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비겁한 새끼들, 졌으면 조용히 가야지. 다구리를 쳐?”
“누구야?”
“어떤 새끼야?”
그들은 정체불명의 소리에 움직임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기현이 그 새끼가 이딴 더러운 방식으로 싸우라고 가르쳤냐?”
“너, 너는.......”
“......”
무리들 중 하나가 목소리의 주인공을 확인하자 당황했는지 말을 더듬었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너희, 나 알지?”
“……”
“네들이 내 친구를 건드렸는데 이걸 어떻게 하면 좋을까?”
“종욱아, 여긴 웬일이야?”
수혁은 싸움을 중단시킨 사람이 종욱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 새끼들 먼저 처리하고 이야기하자.”
그는 최근 들어 자신이 다니는 체육관에서 훈련에 전념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마침 그가 다니는 체육관은 기원 근처에 자리잡고 있었다.
“오늘 일은 그냥 넘어갈 테니까, 조용히 갈 길 가라.”
“칫......”
그들은 종욱의 말에 섣불리 대답을 못하고 가만히 있었다. 그러다 남자 하나가 용기를 내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김종욱, 이 새끼가 네 친구인 건 상상도 못 했다. 하지만 내 친구가 저 녀석한테 당한 게 있어서 이대로는 못 가겠다.”
“못 간다고? 이유를 말해 봐.”
종욱은 그를 노려보았다.
“그야, 내 친구가 맞았으니까 그렇지.”
“왜 맞았는데?”
“시비가 붙었으니까......”
남자는 종욱의 따가운 시선에 점점 주눅이 들었다.
“내가 봤는데, 너희가 먼저 내 친구한테 괜한 꼬투리 잡으면서 시비 걸었잖아. 후...... 됐고 더 말하면 폭발할 거 같으니까 그냥 꺼져라.”
종욱은 화가 점점 치밀어 오르고 있었다.
“아무리 네 친구라지만, 너무한 거 아니냐? 우리가 중앙회는 아니어도 기현이 친군데, 이렇게 대해도 되는 거야? 좀 서운해지려고 하는데?”
남자는 대화로 상황을 풀어가는 것이 힘들다는 생각이 들자 배기현을 들먹이며 위기를 모면하려고 했다.
“배기현? 너 지금, 그 새끼 믿고 깝치는 거냐?”
“우리를 너무 우습게 보는 것 같은데, 자만하지 마라.”
종욱이 기현을 모욕하자 남자는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자만? 훗, 살다보니까 배기현 똘마니한테도 무시를 당하네?”
“똘마니??”
“야,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니야?”
종욱의 말을 들은 사내들은 발끈했고 그들 사이에서 묘한 긴장감이 형성되었다.
“아오, 더 이상 주절주절 데지 말자. 야, 너희들 다 일로와.”
“.......”
그들은 종욱의 겁박을 함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같잖은 자식이 운동 좀 했다고 되게 뻗대네......”
기세에 눌려 침묵을 지키던 중, 사내 하나가 소심하게 혼잣말을 했다.
“푸하하핫, 내가 잘 못 들었나? 뭐라고?”
종욱은 어이가 없는 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운동 잘 한다고 싸움까지 잘 하냐? 기현이 친구로서 예우해줄 때 행동 똑바로 해라.”
“별, 씨 재수가 없으려니. 저 새끼 들어보니까 중앙회에서도 버려진 거 같은데, 왜 저렇게 센 척 하는 거야?”
한 번 물꼬가 터지자 놈들은 점점 대담해져갔다.
“예우? 너희들 안 되겠다.”
더 이상의 말은 불필요하다고 느낀 종욱은 그들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가까이 오지 마! 네가 이러면, 우리도 어쩔 수 없어.”
“야, 다들 뭐해? 저 새끼 오고 있잖아.”
사내들은 바짝 긴장한 표정으로 싸울 준비를 했다.
그리고 종욱은 어느 정도 거리가 좁혀지자 가드를 올리고 그들에게 대시했다.
“아씨.”
맨 앞에 서 있던 남자는 당황한 나머지 얼떨결에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자 그는 고개를 숙여 간단히 피한 뒤 어퍼컷으로 턱을 후려쳤다.
“아악!”
종욱의 주먹이 상대의 턱을 가격하자 수혁은 지금까지 들어보지 못했던 둔탁한 타격음을 들을 수 있었다.
‘대단하다. 강한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인 줄은......’
수혁이 그의 정확하고 빠른 타격에 감탄하던 사이, 종욱은 나자빠진 남자를 무시하고 바로 옆에 있던 사내의 옆구리를 가격한 뒤 허리를 숙인 상대의 관자놀이를 훅으로 쳐버렸다.
“그만해 새끼야!”
순식간에 쓰러진 친구들을 본 한 놈이 이성을 잃고 펀치를 날렸다.
“병신.”
그는 느려빠진 주먹을 사이드 스텝으로 간단히 피한 후 스트레이트로 코를 정확하게 가격했다.
“으으윽, 내 코!”
남자는 코를 부여잡고 쏟아지는 피를 막으며 신음했다.
“저, 저기....... 네가 이런 걸 알면 기현이가 가만있지 않을 거야.”
종욱이 순식간에 세 명을 정리하자 남은 사람들은 전의를 상실했다.
처음 시비를 걸었던 거구의 사내는 기현의 힘을 빌려 이 상황을 벗어나려고 했다.
“불러.”
“어?”
예상과 달리 종욱이 거침없이 나오자 사내는 당황했다.
“배기현 부르라고 새끼야. 핸드폰 있으면 지금 전화해. 나도 할 말이 있으니까.”
“알았어......”
사내는 폰을 꺼내 기현에게 연락했고 잠시 후 종욱에게 폰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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