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웬일이냐? 네가 먼저 전화를 다 하고.”
“야, 배기현 나다.”
“누구세요?”
전화를 받은 기현은 친구가 아닌 다른 남자의 목소리에 의아해졌다.
“나라고.”
“어, 종욱아. 오랜만이다.”
기현은 금세 종욱의 목소리를 알아챘다.
“애들 교육 어떻게 시킨 거야?”
“왜? 무슨 일 있었어?”
그는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직감했다.
“이 새끼들이 앞 뒤 분별없이 나한테 달려들더라고, 그래서 내가 손 좀 봐줬다.”
“흠.......”
“왜 말이 없어? 아, 그리고 내 친구 더 이상 건들이지 마라, 너라고 봐 줄 생각은 없으니까.”
“친구? 누구 말하는 건데?”
“조성준 그 새끼랑 같은 학교 다니는데 이름은 강수혁이야.”
“뭐?”
기현은 수혁의 이름을 듣자 깜짝 놀랐다.
“그리고 오늘 일에 대해서 제대로 사과해라. 그러면 한 번 쯤은 용서해줄 수 있으니까.”
“종욱아. 은우 좀 바꿔줘 내가 말해놓을게.”
기현에게도 종욱은 어려운 상대였기 때문에 되도록이면 마찰은 피하고 싶었다.
그는 핸드폰 주인인 은우에게 말해, 상황을 정리하려고 했다.
“딴 소리 말고, 사과나 똑바로 해.”
종욱은 아랑곳하지 않고 차갑게 말했다.
“음…… 미안하다. 됐지? 이제 바꿔줘라.”
“똑바로 살아, 네 친구들이 너한테 뭘 보고 배웠는지 훤히 보이니까.”
사과를 받은 종욱은 핸드폰을 은우에게 돌려주었다.
“여보세요.”
그는 핸드폰을 건네 받은 후 기현과 대화를 나누었다.
잠시 후, 고성이 핸드폰 너머로 들려왔고 은우는 쩔쩔매다가 전화를 끊었다.
“우리가 잘못했어. 앞으로 이 근처에 얼씬도 안 할게....... 그럼, 애들 데리고 갈게.”
“꺼져, 꼴도 보기도 싫으니까.”
종욱은 냉담하게 말했다.
남자들은 쓰러진 친구들을 수습한 후 자리를 떴고 이제 골목에는 수혁과 종욱, 둘만 남게 되었다.
‘세긴 정말 세구나, 눈 깜짝할 새에 3명을 처리했어......’
수혁은 종욱의 움직임을 떠올리며 감탄하고 있었다. 3명을 단번에 처리한 것도 놀라웠지만, 자신에게 일방적인 패배를 안긴 기현이 쩔쩔매는 모습도 신선하게 느껴졌다.
“수혁아, 저놈들하고 어쩌다 엮인 거야?”
“별 일 아니야, 그나저나 고맙다 종욱아.”
그는 자신과 아무관계도 없는 일에 나서준 종욱이 무척 고마웠다.
“쟤네들, 내가 이야기해 뒀지만 반드시 복수하려고 할 거야. 자세한 건 나중에 이야기하자, 지금 운동시간이라 먼저 가봐야 할 거 같아.”
“저기, 잠깐.”
수혁은 종욱을 붙잡았다.
“왜? 수혁아.”
그는 가던 길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
“나한테 복싱 좀 알려주면 안 돼?”
“갑자기?”
“응, 네 실력을 보니까 복싱을 정식으로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수혁은 예전부터 종욱을 인상 깊게 봤지만, 오늘 보여준 실력은 이전과는 차원이 달랐다.
“난 강하진 않아, 세상엔 나보다 강한 사람이 지천에 널렸어. 다른 사람으로 알아봐.”
“아니야, 난 너한테 복싱을 배웠지만, 오늘 보여준 몸놀림은 따라 할 엄두도 안 나더라. 그리고 어느 누가 나에게 복싱을 가르쳐 주겠어?”
“하, 수혁아 그때 알려준 거는 기초였잖아.”
종욱은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쉬었다.
“사실, 네가 싸우는 모습을 잠깐 봤어. 타격하는 걸 보니까 기본은 갖춘 거 같긴 한데, 깊이가 부족해. 한 마디로 짬뽕이라고나 할까?”
“짬뽕이라니?.......”
“풋워크를 하는 것도 그렇고 몸 움직임이 여러 격투기를 종합적으로 배운 티는 나지만 아직은 엉성해 보여. 딱 보면 혼자서 어설프게 운동을 배운 느낌이야.”
“나도 네가 무슨 말 하는지 알아, 그래서 말인데 복싱이라도 제대로 할 수 있게 도와주면 안 되겠냐?”
수혁은 종욱의 말을 십분 이해했다. 비록 체육관도 다니고 책을 보며 여러 격투기를 익혔지만 어느 것 하나 통달하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정말 미안한데, 내가 개인 훈련으로 여유가 없다. 먼저 갈 테니까 나중에 보자.”
그는 완곡하게 거절했다.
“종욱아, 상황을 해결하려면 네 도움이 꼭 필요하다. 제발, 한 번만 도와줘라. 부탁한다.”
수혁은 포기하지 않고 진지하게 이야기했다.
“꼭 싸움는 방법만 있는 것은 아니잖아. 네 나름대로 싸울 상황들을 잘 피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야. 그리고 네 눈빛을 보면 운동을 가르치기가 좀 그래. 일이라도 낼 거 같단 말이야.”
종욱은 절박함이 가득한 그의 눈을 보면서 말했다.
“피할 수 없는 싸움이라면?”
수혁은 침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걱정하지 마, 쟤네들이 질이 안 좋기는 해도 그렇게 집요한 녀석들은 아니야. 그리고 내가 경고해뒀으니 널 먼저 건드리는 게 쉽지 않을 거야.”
“내가 대비하려고 하는 것은 고작 저런 애들이 아니야. 그런 거였으면 애당초 너에게 부탁하지도 않았겠지.”
“흠.......”
종욱은 턱에 손을 올려놓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큰일에 휘말리기라도 한 거야? 나한테 편하게 말해봐.”
“여기는 좀 그렇고, 혹시 커피 한잔 할 수 있을까?”
“좋아.”
수혁은 이야기가 길어질 것을 감안해 장소를 옮기기로 결정했다.
역 근처 카페에 도착한 그들은 마실 것을 주문한 뒤 테이블에 앉아 대화를 시작했다.
“시간 내줘서 고맙다.”
“그래, 이제 자세히 이야기해봐.”
자리가 마련되자, 수혁은 자신과 조성준 사이에 벌어진 일들을 차분하게 설명했다.
그리고 성준이 학생들을 대상으로 상납금을 어떻게 걷고 있는 지 말해주었다.
“양아치 새끼, 삥 뜯고 다니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 정도로 지독하게 애들을 괴롭히는 줄은 몰랐네.”
“조성준을 알아?”
수혁은 그가 성준을 아는 것처럼 말하자 궁금증이 생겼다.
“친하지 않아서 잘 모르지만, 쓰레기라는 건 누구보다 잘 알지.”
“어떻게 알게 됐는데?”
“그냥, 그 자식이 워낙 사고를 많이 치고 다니니까 어쩌다 알게 됐지 뭐.”
종욱은 자신이 중앙회에 있었다는 사실을 굳이 언급하고 싶지 않았다.
“그 새끼랑 엮이면 조금 피곤할 텐데.”
“맞아, 집요한 녀석이니까. 다행히 지금은 학교를 안 나가고 있어서 괜찮은데, 돌아가게 되면 조성준과 분명히 부딪힐 거야. 그리고 그놈을 계속 피할 생각은 없어.”
종욱은 진지하게 이야기를 듣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 사정은 잘 들었다. 내일부터 나랑 같이 운동하자. 관장님께는 미리 말해놓을게.”
“진짜?”
수혁은 갑자기 변한 그의 태도에 당황했다.
“조성준과 관련된 일이라면 당연히 도와줘야지. 저녁 6시까지 우리 체육관으로 와.”
“나야 고맙지만, 갑자기 이렇게 마음이 바뀐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
“너니까 도와주는 것도 있지만, 조성준 그 새끼는 후, 아니다. 너무 자세한 건 묻지 말아줘, 아무튼 내일부터 시작하자.”
“알았어.”
평소에도 성준을 못마땅하게 여겼던 종욱은 이런저런 설명을 길게 늘어놓는 것은 별로 내키지 않았다.
그들은 훈련과 관련된 세부적인 사안들은 내일 의논하기로 하고 카페에서 헤어졌다.
‘수혁이 일에 조성준이 개입돼있다니....... 안 도와줄 수가 없잖아?’
종욱은 클럽에서의 회동을 마지막으로 중앙회를 탈퇴했다.
그는 변질되어가는 아이들의 모습에 있는 정마저 다 떨어진 상태였고 이런 변화의 원흉을 조성준이라고 여겼다.
‘이 녀석은 암 같은 존재야, 어딜 가든 사람들을 병들게 만드는 그런 존재.’
종욱은 내일부터 훈련을 어떻게 할지 고민하며 밤길을 걸어갔다.
한편 수혁은 종욱과 헤어진 후 바로 칸타빌레에 돌아왔다.
그는 내일부터 시작될 복싱 수업을 위해 교본을 읽으며 준비를 했다.
‘후, 바둑 수업이 끝나면 저녁 시간은 비어서 마음에 걸렸는데, 이젠 괜찮겠어.’
수혁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책을 읽었다.
* * *
일요일 아침, 오전에는 딱히 할 일이 없었던 수혁은 바둑판을 앞에 두고 혼자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는 기보가 기록된 책들을 탁자 위에 펼친 뒤 공부를 하고 있었다.
‘묘수라고 생각했던 것이, 이 대결에서는 실수가 되는구나. 바둑의 깊이는 정말 헤아리기 어려운 것 같다.’
수혁은 책을 읽고 바둑을 직접 두면서, 단순히 기보의 내용을 따라가기보다는 자신이라면 어떻게 대응할지를 고민해보았다.
그렇게 한창 바둑에 몰두하고 있는데 갑자기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전화를 건 사람은 다름 아닌 경현이었다.
“응 경현아, 나야.”
“야, 퇴원을 했으면 나한테는 알려줘야지!”
그의 목소리에는 서운한 기색이 역력했다.
“미안해, 연락하는 걸 깜빡했어. 잘 지내고 있지?”
“나야, 문제없지. 그것보다 나오자마자 바쁘게 지내나 보네?”
“맞아, 학교에 돌아가기 전에 준비를 잘 해놓으려고.”
수혁은 내심 반가운 마음이 들었지만, 덤덤하게 대답했다.
“목소리 들으니까 몸은 다 나은 것 같은데? 그건 그렇고 알려줄 게 있어서 연락했어.”
“뭔데?”
“어제 내가 시내에 있는 공원에서 우연히 조성준을 봤거든, 배종명이랑 애들도 같이 있었는데 무지 심각해 보이더라.”
“아, 그래?”
‘어제 일 때문에 애들을 불렀나 보군.’
수혁은 성준이 왜 애들을 집합시켰는지 짐작이 갔다.
“내가 뭔 이야기 하나 근처에 숨어서 엿들었는데, 아니나 다를가 네 이야기를 하고 있더라고.”
“뭐라고 했는데?”
“네가 퇴원한 것을 알고 있던데? 애들한테 학교에 나오면 바로 잡아오라고 하면서 엄청 벼르고 있더라고. 너 혹시 무슨 일 있었던 건 아니지?”
“그게......”
수혁은 경현에게 어제 있었던 일들을 알려주었다.
“조심해 수혁아. 그 놈 성격 알잖아, 끈질긴 거. 너 있는 곳을 찾아서 해코지 할 수도 있어.”
“그거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당분간은 날 못 건들일 거니까.”
그는 종욱이 곁에 있는 한, 성준이 섣불리 행동하지 못할 거라고 확신했다.
“그래도 몸조심해.”
“알았어.”
‘안 되겠어, 오늘부터 더 빡세게 해야겠다.’
수혁은 전화를 끊은 뒤 훈련에 더욱 매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보통 때처럼 바둑공부를 한 뒤, 저녁시간이 되자 체육관으로 향했다.
체육관은 기원 근처에 있어 찾는데 어렵지 않았다.
‘들어갈까?’
수혁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3층에 올라갔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유리문이 보였고, 샌드백을 두들기는 소리가 문틈에서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딱 맞춰서 왔네. 저쪽에 체육복이 있으니까 갈아입어.”
“알았어.”
종욱은 샌드백을 두들기는 것을 멈추고 이야기했다.
수혁은 그의 말에 따라 탈의실에 가서 체육복으로 환복했다.
“자, 받아.”
종욱은 탈의실에서 나오는 수혁에게 글러브를 던진 뒤 링 위에 올라갔다.
“원래 테이핑을 하고 글러브를 껴야 되지만 오늘은 그냥 하자. 어차피 네 손목이 다칠 일은 없을 거야. 준비되면 바로 올라와.”
“쳇, 날 너무 무시하는 거 아니야?”
“무시가 아니라, 객관적인 평가라고 생각해라. 한 대도 못 맞힐 건데, 주먹 상할 일이 뭐 있겠냐?”
“흠....... 알았어.”
수혁은 글러브를 낀 뒤 링 위로 올라갔다.
“일단, 실력체크 먼저 해보자. 난, 최소한의 가드와 풋워크만 할 테니까 편하게 들어와.”
“할 거면 진지하게 했으면 좋겠다.”
수혁은 바둑 때와 마찬가지로 테스트를 받게 되었다. 그는 기왕 스파링할 거면 제대로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풋, 그렇게 하면, 며칠 동안은 누워만 있어야 될 걸? 그니까, 헛소리 그만하고 들어와.”
종욱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손을 까딱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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