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다음 날이 되었다. 수혁은 일찍 일어나 학교 갈 채비를 하고 집을 나섰다.
‘거리는 변한 게 없구나.’
등굣길 아침, 오랜만에 교복을 입은 수혁은 천천히 걷고 있었다.
그는 어플을 켜서 수련의 성과를 확인했다. 통찰력, 정신력, 힘 그리고 체력은 일주일 전에 비해서 대폭 상승이 돼 있었다.
‘이만하면 충분히 준비한 것 같아. 어라? 벌써 다 왔네.’
수혁은 스텟을 체크하고 여러 생각을 하다 보니 금세 학교에 도착할 수 있었다.
교문 앞의 선도부, 그리고 바쁘게 움직이는 학생들까지 겉으로 보기에는 학교는 여전히 평화로워 보였다.
학교 건물에 들어간 수혁은 복도를 지나 반으로 들어가려는데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성경현, 계속 대답 안 할래? 강수혁 어디 갔냐고? 달동네에도 안 오는 것 같던데.”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그리고 알더라도 너한테 알려줄 이유는 없어!”
“네가 분위기 파악을 잘 못 하는 모양인데 계속 그런 식이면 나도 어쩔 수 없어.”
성준은 경현이 수혁과 친분이 있음을 알고 그와 연락하고 지낼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얼마 전부터 종명을 시켜 행적을 물어보고 있는 중이었다.
“배종명 자리로 가라.”“어떤 새끼가 헉....... 넌?”
한참 열변을 토하고 있던 종명은 수혁을 보자 눈이 휘둥그레졌다.
반에 들어온 수혁은 딱 보아도 많이 달라져 있었다.
비교적 탄탄했던 체형은 더 좋아져 이제는 한 눈에 보아도 근육질의 몸매가 드러났고 키도 계속 자라 180을 넘게 되었다.
“왔어? 미리 연락 줬으면 마중이라도 나갔지.”
“그럴 필요가 뭐 있어 그냥 오면 되는 건데. 아무튼 그동안 고생 많았다 경현아.”
그들은 반가움의 인사를 나누었다.
“강수혁, 넌 좀 있다가, 아니지 먼저 성준이한테 알려줘야겠다.”
종명은 뭐에 홀린 듯 어디론가 가버렸다.
‘쥐새끼 같은 새끼. 아마 죽을 때까지 저 모양 저 꼴이겠지.’
수혁은 그를 손봐주고 싶었지만 일단 무시하기로 했다.
반에 들어온 그는 자리에 앉아 경현과 계속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반장 민정식이 그들에게 다가왔다.
“강수혁, 담임선생님이 지금 교무실로 오래.”
“그래? 알았어. 경현아 나 다녀올게.”
“응, 좀 있다 보자.”
수혁은 곧 바로 교무실로 향했다.
“녀석 왔으면 선생님한테 먼저 올 일이지. 그래 몸은 괜찮고?”
담임은 반가운 기색으로 수혁을 반겼다.
“네, 푹 쉬고 와서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할아버지께 연락이 오셔서 소식은 들었다. 보니까 몸도 다 회복된 것 같으니 다시 학업에만 집중해라.”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중간고사가 일주일 전에 있었는데 형평성 문제로 어쩔 수 없이 너는 결시 처리했다. 서운하겠지만 이해해줘라.”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수혁은 중간고사 결과에 대해 전혀 개의치 않았다.
“뭐 그렇다면 다행이고. 자, 끝났으니까 반으로 돌아가라 조회시간에 보자.”
“네.”
수혁은 담임과의 짧은 대화를 마치고 반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보통 때와 다름없는 하루가 시작됐다. 아침조회가 끝나자 수업은 진행됐고 학교에선 특별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수혁아, 같이 가.”
“응.”
수업이 끝나자 수혁은 경현과 함께 반을 나서려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종명이 그를 불러 세웠다.
“강수혁, 성준이가 잠깐 보자는데?”
“야, 얘 퇴원하고 오늘 학교 온 거야. 나중에 보자고 해.”
옆에 있던 경현이 듣다못해 나섰다.
“아니야, 가자 배종명.”
“수혁아.”
“걱정 안 해도 돼. 너는 교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어 금방 끝내고 갈게.”
“별거 아니니까 또 저번처럼 선생님 불러오고 그러지 마라.”
종명은 경현을 째려보며 말했다.
“나한테 용건 있는 거 아니었어? 조성준 보기 전에 너 먼저 손 봐줄까?”
“아, 아니야....... 따라 와.”
수혁의 말에 겁을 먹은 종명은 고개를 돌리며 말없이 복도를 걸었다.
‘가 볼까?’
그는 경현의 걱정스러운 눈길을 뒤로하고 종명을 따라 선도부실로 갔다.
선도부실에 도착한 종명은 조심스럽게 노크했다.
“성준아, 나야. 강수혁 데리고 왔어.”
“들어와.”
종명은 선도부실 안에서 들리는 목소리를 듣고 천천히 문을 열었다.
성준은 책상에 발을 올리고 거만한 자세로 기다리고 있었다.
‘얼굴 한 번 더럽게 생겼네.’
무게를 잡고 앉아 있는 그는 괜히 인상을 쓰며 상대를 위협하려고 했다.
그러나 수혁은 회귀 후 성준을 처음 만났을 때 긴장됐던 거와 달리 신기할 정도로 마음이 평온했다.
“병원 나온 지 꽤 된 걸로 아는데, 왜 이제 왔냐?”
성준은 거들먹거리는 투로 물었다.
“안 그래도 한 번 찾아가려고 했는데 불러줘서 고맙다. 일단 용건 먼저 들어보자.”
“훗, 좋아. 다음 주 월요일까지 시간 줄 테니까 20만원 준비해 와라. 참고로 매달 내야 하는 거니까 일을 하든지, 용돈을 아끼던지 네가 알아서 하고.”
성준은 수혁의 학교생활을 지옥으로 만들 몇 가지 아이디어가 있었는데, 상납금은 그 계획의 첫걸음이었다.
“개소리를 뭘 그렇게 분위기 잡으면서 하냐?”
수혁은 성준을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며 대꾸했다.
“후후, 쉽게 말을 들을 놈은 아니지. 가라, 네가 선택한 거니까 후회하지 말고.”
“후회? 지금 바로 붙을까? 싸가지 없는 새끼가 입을 어디서 함부로 놀려?”
“.......”
성준은 일전의 싸움으로 인해 자신이 수혁의 상대가 되지 않음을 잘 알고 있었다.
“쫄리면 입 닥치고 있어. 그리고 조만간 네 친구들이랑 너랑 다 같이 조질 거니까 죽으려고 애쓰지 마라. 참나, 이딴 헛소리 들으러 여기까지 온 거야? 시간만 아깝네.”
수혁은 말이 끝남과 동시에 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그러자 성준은 어이가 없는지 웃음을 터뜨렸다.
“푸하하하, 이 녀석 물건이잖아? 저번에 그렇게 당하고도 정신을 못 차리네?”
“어떻게 할 거야? 저 녀석, 절대 가만있을 놈은 아니야.”
옆에 있던 종명은 우려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아, 걱정 안 해도 돼. 잊은 기억이 있다면 그 기억은 다시 살려주면 돼. 그리고 두고 봐, 질질 짜면서 상납금을 낼 수밖에 없을 테니까.”
성준은 확신에 찬 표정을 지어보였다.
수혁은 선도부실을 나와 정문에서 기다리고 있는 경현과 만났다.
“괜찮아?”
“응. 오래 기다렸지?”
“아니야 그만 가자.”
경현은 선도부실에서 있었던 일을 물어보고 싶었지만 차분한 수혁의 모습에 안심이 되어 구태여 묻지 않았다.
“수혁아, 내일 보자.”
“잘 들어가.”
수혁은 경현과 헤어진 후 곧바로 집으로 왔다.
집에 와서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그는 마당으로 가서 훈련을 했다.
‘하루도 쉬면 안 돼, 분명히 바로 움직일 거야.’
샌드백을 치며 훈련에 몰두하다보니 어느새 밤이 되었다. 땀에 흠뻑 젖은 수혁은 집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길에 선웅과 마주쳤다.
“운동을 한 모양이구나. 씻고 와라. 잠시 상의할 것이 있다.”
“네, 아버지.”
수혁은 샤워를 한 뒤 선웅의 방으로 갔다. 그는 티비도 꺼놓은 채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지, 저 왔어요.”
“그래, 학교생활은 괜찮아? 오랜만인데 힘들지 않았어?”
“저 아시잖아요. 이젠 그런 걸로 힘들 일은 없어요.”
“다행히도 적응에는 문제가 없는 것 같구나. 그건 그렇고 우리 토요일 날 이사 가는 거 알고 있지? 혹시 잊었나 싶어서 이야기하는 거다.”
‘아 맞다.’
수혁은 이사 가는 것에 대해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11월 초로 이삿날이 잡혀있었는데 이번 주 토요일이 마침 약속한 날이었던 것이다.
“당연히 알고 있었죠. 전에 살던 사람이 10월 말에 방을 뺀다고 했었으니까 이사는 문제없을 거예요.”
그는 속내를 숨기고 자연스럽게 말했다.
“그래, 그날 오전에는 네가 학교에 있으니까 이사는 나랑 일꾼들이 맡아서 하마. 너는 학교가 끝나면 곧장 새 집으로 와서 네 방을 정리해라.”
“죄송해요. 제가 도와드려야 하는데......”
“아니야. 짐이 많지 않아서 그리 오래 걸릴 것 같지 않아. 시간이 늦었다. 피곤할 텐데 이만 들어가서 쉬어라.”
“예, 아버지.”
수혁은 인사를 드리고 방에 들어왔다.
‘이 지긋지긋한 곳을 떠난다니 실감이 안 나네?’
그는 주말이면 달동네를 벗어난다는 사실에 설레었다.
오래되다 못해 낡아빠진 수혁의 집은 구석구석이 균열이 나고 부서진 곳이 많아 수시로 선웅이 수리를 해야 유지되는 그런 집이었다.
‘이 집은 이제 안녕이다. 어떻게 보면 새 삶의 첫걸음이라고 볼 수 있겠어.’
수혁은 성준과의 일은 잊은 채 새 집에서의 삶을 그리며 행복한 상상에 빠졌다. 한동안 즐거운 생각에 들떠있던 그는 자기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 * *
“강수혁, 성준이가 마지막으로 상납금을 낼 기회를 준다고 하는데 어떻게 할 거야?”
다음 날 아침, 수혁은 반 앞에서 종명과 마주쳤다.
“죽고 싶냐?”
“아, 아니. 난 단지 말을 전달하려고......”
“휴.”
수혁은 변명을 하는 종명을 무시하고 반으로 들어갔다.
“쯧쯧쯧. 멍청한 자식, 마지막 기회를 이렇게 차버리네?”
종명은 혀를 차며 혼잣말을 하다가 성준이 있는 선도부실로 향했다.
‘날이 흐리네. 비 온다는 이야기는 없었는데.’
수혁은 반에서 수업을 듣고 있던 중 창밖을 바라보았다.
하늘에는 구름이 잔뜩 끼어 햇빛이 들지 않아 낮임에도 불구하고 어두웠다. 시간은 흘러 마지막 수업까지 모두 끝이났고 수혁은 학교를 빠져나왔다.
‘다행히, 비는 오지 않네. 우선 집으로 가자.’
갈 곳을 정한 수혁은 정문을 지나 골목에 들어섰다.
평소라면 왁자지껄 떠들면서 하교를 하는 아이들은 오늘따라 조용했다.
핸드폰을 꺼내 뭔가를 확인하거나 고개를 숙이며 걸어가는 애들이 절반이 넘었다.
‘조성준 떨거지들이 온 날이랑 비슷한 거 같은데?’
수혁은 성준과 싸웠던 그 날과 유사한 분위기를 감지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아니나 다를까 성준과 기현, 그리고 몇몇 남자들이 건들거리며 그의 앞에 서있었다.
“잘 지냈냐?”
기현의 뒤에는 3명의 남자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일전에 기원 근처에서 만났던 자들이었다.
“내 친구들하고 일이 있었다면서? 그렇게 쳐 맞고도 계속 깝치는 걸 보면 배짱은 인정할 만 해.”
기현은 박수를 치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따라와라. 남의 학교에서 무슨 민폐냐,”
수혁은 짧게 이야기하고 그대로 그들을 지나쳤다.
“이 건방진 새끼가.”
무시를 당했다고 느낀 기현은 화가 나서 그대로 수혁의 뒤를 치려고 했다.
“기현아, 그냥 따라가자. 저번처럼 선생이라도 나와서 방해하면 제대로 손 볼 수도 없잖아.”
“듣고 보니 그러네? 저 새끼 오늘 죽었어.”
“가자.”
성준은 기현을 제지한 뒤 애들을 데리고 수혁을 따라갔다.
‘저기가 좋겠다.’
골목을 나와 큰길을 걷다보면 하천위에 지어진 다리가 하나 나왔다. 그리고 다리 밑에는 하천 주변으로 공터가 형성되어 있었는데, 수혁은 그곳이 싸움을 하기에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뭣 때문에 왔냐?”
수혁은 인적이 드문 공터에 자리를 잡은 뒤 그들에게 물었다.
“오, 어딜 가나 했는데 아주 명당으로 왔네?”
성준은 수혁이 인도한 장소가 마음에 드는 듯 손을 비비며 말했다.
“너는 꼭 뒤에 뭐를 주렁주렁 달고 오던데, 추하다는 생각은 안 들어?”
“내가 준 마지막 기회를 차버리다니 한편으론 불쌍하다 너도. 막상 우리 보니까 후달리지 않아?”
성준은 수혁의 말을 무시하고 도발했다.
“그렇게 맞았으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바보라도 알 텐데....... 안타까워서 그러는데 마지막 기회를 줄게. 월요일까지 30만원 가지고 와라, 그럼 오늘은 조용히 갈게.”
“조용히 간다고? 누구 마음대로. 안 그래도 찾아가려고 했는데 알아서 와주니까 난 너무 고마운데?”
수혁은 성준의 헛소리를 일축하고 메고 있던 가방과 위에 걸친 교복 마이를 벗어 땅에 내려놓았다.
“기현아, 안 되겠다.”
“나한테 맡겨.”
성준은 기현을 보며 말했다.
“풋, 아가리 하나는 정말 잘 놀린단 말이야?”
기현은 씽긋 웃더니 수혁이 있는 쪽으로 서서히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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