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할아버지, 저 왔어요. 이번에는 무슨 고서를 찾으신 거예요?”
샤워를 마친 수혁은 곧장 사무실로 들어왔다.
“책은 뭐 아무래도 됐다. 오랜만에 네 얼굴 봤는데 다짜고짜 고서를 봐 달라 하는 것도 경우에 어긋난 것 같고.”
평우는 진지하게 말했다.
“아니에요, 저도 궁금해서 그래요.”
수혁은 괜찮다는 제스처를 취하며 밝게 말했다.
“수혁아, 무슨 일이야? 표정이 왜 이렇게 어두워?”
“아니요? 별일 없는데요?”
평우의 말을 들은 수혁은 잠깐 낯빛이 어두워졌으나 이내 안색을 바꾸고 태연히 말했다. 그러나 그 순간을 놓칠 그가 아니었다.
“허허, 이 할애비 눈은 못 속인다. 그리고 뭐든 나랑 편하게 상의하기로 약속 했었잖아.”
‘후, 할아버지한테는 솔직하게 말씀드려야겠다.’
평우가 서운한 말투로 이야기하자 수혁은 속내를 털어놓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게, 제가 학교에서 문제가 좀 생길 것 같아서요. 한 아이랑 심하게 다퉜는데 제가 조금 심하게 때렸거든요.”
“조성준이라는 망나니 녀석 말이더냐?”
평우는 대번에 그가 말하는 사람이 누군지 알아차렸다.
“네. 알고 계셨네요?”
“사실 예전에 네가 병원에 입원했을 때 사람을 시켜 그 녀석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았다. 몹쓸 놈이 더구나. 내 이사장과 그놈 애비한테 연락하여 직접 처리하려고 했지만 네가 싫어할까 봐 보고만 있었다.”
평우는 성준을 떠올리자 불쾌한지 얼굴을 붉히며 이야기를 했다.
“그러셨군요. 말씀대로 제가 나서서 해결했지만 당분간 학교가 시끄러울 것 같아요, 만약에 일이 커지면 학교를 그만둘 생각도 하고 있어요.”
“복수를 한 모양이구나. 그래, 남자가 당한 것이 있으면 되갚아줘야지, 물론 폭력은 정당화되지 않지만 그런 녀석에게는 가끔 필요할 수도 있다. 그리고 학교 일은 걱정 말거라.”
평우는 미리 준비해 놓은 차를 마시며 말을 했다.
“네, 어떻게 하시려고요?”
수혁은 궁금해서 물어봤다.
“어른의 일은 어른이 처리하는 것이 옳지. 너는 걱정하지 말고 내일 학교에 가거라.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나? 나도 처리할 것이 좀 있으니,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네 할아버지.”
수혁은 궁금했지만 더이상 묻지 않고 칸타빌레를 빠져나왔다.
평우는 그가 나간 것을 확인하자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어, 김 변호사, 날세. 내가 처리할 일이 좀 있어서, 예전에 알아봤던 일 있지 그거와 관련된 건데.”
평우는 급하게 몇 사람에게 전화를 돌렸다.
* * *
다음 날 아침 학교는 발칵 뒤집어졌다.
성준의 아버지인 조일오 의원이 만신창이가 되어 병원에 입원한 아들을 보고 화가나 학교에 전화를 걸었던 것이다.
학교에서는 이 일로 급하게 회의가 열렸다.
“강수혁, 이 학생에 대해서 제대로 된 징계가 필요합니다. 조성준 학생을 몹시 때렸던데 듣기로는 몸 곳곳 성한 데가 없다더군요.”
성준의 담임이 먼저 말을 꺼내었다.
“알다시피 조성준 학생의 부모는 우리 학교에도 큰 힘이 되어줬던 사람입니다. 이 일을 덮고 넘어갈 수는 없습니다.”
수혁의 1학년 담임이었던 송명철도 이를 거들었다.
“맞습니다. 이 사건을 철저히 조사해서 제대로 처리해야 합니다.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다른 선생들도 한마디씩 하기 시작했다.
“외람되지만 저는 강수혁 학생 담임입니다. 무슨 일인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학교에 아직 당사자가 오지 않았고 학생의 거취를 지금 바로 결정하기에는 조금 성급한 면이 있습니다.”
담임은 주변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니, 이 선생 그것이 말이나 되는 소리요? 지금 조일오 의원께서 화가 많이 나셨다니까요. 질질 끌 것 없어요. 여기서 그냥 바로 징계 내립시다.”
명철은 흥분을 하며 말했다.
“저는 이 선생 말이 옳다고 봅니다.”
설왕설래하는 선생들을 본 교장은 차를 한 잔 마시며 차분히 말했다.
“비록 의원님이 우리 학교에 도움을 많이 줬다고는 하지만 일은 공정하게 진행하여야지요.”
“저도 교장 선생님 말씀에 동감합니다. 당사자도 오지 않았는데 일을 처리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그의 옆에 앉은 교감도 지지의사를 밝혔다.
그들은 일전에 성준과의 첫 만남 이후로 그를 안 좋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성준이 전학 온 이후 묘하게 변한 학교 분위기를 심상치 않게 여기고 있었다.
“교장 선생님과 교감 선생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별수 없군요. 그러면 지금 당장 학생을 이 자리에 불러서 바로 진행할 것을 건의합니다. 이 사안은 시간을 끌 사안이 아닙니다.”
성준의 담임이 수혁을 당장 불러 진상을 파악할 것을 요구했다.
“그것은. 흠.......”
교장은 사안을 신중하게 파악하고 싶었으나 딱히 명분이 떠오르지 않아 잠시 생각에 빠졌다. 그 순간 회의실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고 행정실 직원이 들어와 누군가 찾아왔다고 보고했다.
“저, 회의 중에 죄송하지만 중요한 손님이 오신 것 같습니다. 여기 계신 선생님들께 드릴 말씀이 있다고 하는데요?”
“누구지? 손님을 이쪽으로 모시게.”
교장은 직원에게 말했다. 그리고 잠시 뒤 서류 가방을 든 양복을 입은 중년의 남자가 회의실 안으로 들어왔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신평 법무법인에서 온 김형석 변호사라고 합니다.”
‘신평이라고?‘
‘우리나라에서 제일가는 로펌 이잖아!’
선생들은 형석의 소개를 듣고 깜짝 놀랐다.
“아, 변호사님이셨군요. 그런데 우리학교에는 무슨 일이지요?”
교감은 교장을 대신해서 형석에게 물었다.
“지금 강수혁군의 거취를 두고 회의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저는 수혁군의 대리인 자격으로 왔습니다. 앞으로 이와 관련된 부분은 저와 상의하셨으면 합니다.”
형석은 명함을 교장에게 주며 말했다. 명함에는 신평 법무법인 대표변호사라고 쓰여 있었다.
“저, 죄송한데 여기는 학교입니다. 한 학생의 잘못된 행동으로 인해 거취를 논의하는 것은 법적인 문제가 아니라 행정적인 사안입니다. 저희는 회의를 계속해야 하니 나중에 이야기 하시죠.”
명철은 짐짓 근엄한 척을 하더니 형석에게 나갈 것을 권했다.
“잘 모르시겠지만, 학교 행정도 행정소송을 통해서 충분히 법적인 문제로 전환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단순히 강수혁 학생 대리인 자격으로 온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또 뭣 때문에 여기 오셨습니까?”
교장은 이야기를 듣다가 질문을 했다.
“오늘 아침 저는 이사장님과 통화를 했는데 이사장님께서 저보고 이 일에 관한 진상조사를 부탁하셨습니다. 저는 잠시 후 학교 학생들을 불러 지금까지 학교에 있었던 일들에 대하여 조사를 할 예정입니다.”
형석의 이야기를 듣자 교장을 포함한 선생들은 심각한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아니, 아무리 이사장님 말씀이라도 강수혁 개인만 조사하면 되는 문제인데 왜 학생들을 불러 조사한다는 것입니까?”
“맞습니다. 그리고 사건 당사자의 대리인이면서 조사를 진행한다니 공정한 조사가 가능하겠습니까?”
성준의 담임과 명철은 언성을 높이며 항변했다.
“불만 사항은 이사장님에게 직접 말씀하시죠. 그리고 자세한 이야기는 드릴 수 없지만, 이사장님은 이 일에 대하여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조성준 학생과 관련된 정황도 조사로 밝혀질 테니 두고 보십쇼.”
“이사장님이 말씀하셨으니 더이상 토 달지 않기로 하지요. 편하게 진행하시죠.”
교장은 이야기를 듣다가 차분하게 결론을 내렸다.
“조사가 끝나면 몇몇 선생님들이 포함된 징계위원회를 구성할 예정입니다. 위원회 구성은 제가 결정할 것이고 모든 것은 조사에서 발견된 정보를 토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아니, 우리를 무시하고 변호사님 마음대로 하려고 합니까?”
명철은 언성을 높이며 말했다.
“송선생 이게 뭐 하는 짓입니까? 이사장님 말씀이라고 못 들었어요? 아무리 이 일이 조의원이 관련되었다고 하여도 어쩔 수 없습니다. 아까 제가 한 말 명심하고 모두 협조하세요.”
교장은 명철을 제지했다.
“보니까 2학년 학생수가 381명이군요. 물론 전 학생 대상으로 조사를 할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빠른 진행을 위해서 부득이하게 저희 쪽 직원들을 불러 조사에 참여시켜야 할 것 같습니다.
형석은 서류를 꺼내 조사 계획을 검토하다가 입을 열었다.
“네, 저희가 적극 협조할테니 편하게 진행하시죠.”
교감은 상관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리고 조사할 학생들을 호명하는 데 도움을 줄 직원이 필요합니다. 적절한 장소도 함께 말이죠.”
형석이 인력 충원과 상담할 장소를 교감에게 부탁하자 그는 직원을 시켜 조사를 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고 일을 도와줄 것을 명했다.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우리도 그만 가보도록 하죠. 다들 나가셔서 수업준비 하세요.”
형석은 회의실을 떠나 조사준비를 시작했다. 남은 선생들도 잠시 후 모두 반으로 돌아갔다.
* * *
당일 아침 수혁은 조금 긴장된 마음으로 학교에 갔다.
확실치는 않았지만 오늘은 왠지 긴 하루가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반에 들어오니 종명이 아는 척을 하며 인사를 했다.
“수혁아, 어제는 잘 들어갔어?”
수혁은 종명을 볼 때마다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꾹 참고 성준에 대해 물어봤다.
“조성준은?”
“아, 성준이는 병원에 입원했어. 우리도 잠깐 병실에 있었는데 보좌관 같아 보이는 사람이 나가보라고 해서 우리도 바로 집에 갔어.”
“알았다.”
수혁은 정보만 확인하고 자리에 앉았다. 그 뒤에도 종명은 계속 눈치를 보는 듯한 행동을 했지만, 그는 미동도 하지 않고 할 일만 했다.
“수혁아, 어제는 잘 쉬었어? 어째 오늘 선생들이 조금 늦네?”
“그러게, 흠.......”
경현은 학교에 온 수혁을 반갑게 맞으며 말을 걸었다.
선생들은 아침 조회시간을 훌쩍 넘겼음에도 불구하고 반에 복귀하지 않고 있었다.
“설마 어제 일 때문에 늦는 것은 아니겠지?”
경현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마 그럴 거야 신경 쓰지 마. 어떻게든 되겠지 뭐.”
수혁은 덤덤하게 이야기했다. 얼마 후, 담임은 반에 들어왔고 아침 조회를 시작했다.
“오늘 교직원 회의가 있었다. 회의 도중 불미스러운 일이 우리 학교에 발생했다는 이야기가 나왔고 그에 관하여 대대적인 조사가 있을 건데 다들 당황하지 말고 있는 사실 그대로 이야기 해라.”
“무슨 일이래?”
“갑자기?”
아이들이 웅성거리자 교실 안은 조금 소란스러워졌다.
“조용히 해, 조사는 쉬는 시간과 수업 시간 중간 중간에 이뤄질 거니까 참고하도록 하고. 휴, 학교가 많이 시끄럽다. 이럴 때일수록 경거망동하지 말고. 얌전히 있어라. 이상이다.”
“터질게 터진 거지.”
“장난 아닌 것 같은데?”
반 아이들은 사태가 심각하다는 것을 인지했다. 특히 종명은 담임의 이야기를 듣자 엄청나게 불안해했다. 아침 조회가 끝나자 담임은 수혁을 밖으로 불러냈다.
“수혁아 잠깐 나 좀 보자.”
“네.”
수혁은 담임을 따라 복도로 갔다. 남은 아이들은 수업 준비를 하느라 복도는 한산했다.
“내가 널 부른 이유는 공정한 조사를 위해 널 아이들과 떨어뜨려 놔야 되기 때문이야.”
“네.”
“서운하게 생각하지 마라. 조성준이 학교에 있었으면 같이 격리가 됐을 테니까, 우선은 학교 안에 있는 상담실에 있어라. 상담 선생님한테는 미리 말해 놓았다.”
“알겠습니다.”
대화를 마친 수혁은 수업을 듣지 않고 상담실로 갔다. 그리고 학교에서는 대대적인 조사가 이뤄지기 시작했다.
- 51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