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날 알아?”
수혁은 그녀가 자신을 아는 것처럼 말하자 조금 당황했다.
“그럼, 알지. 이번 학기 들어서 성적이 가장 많이 오르고 또 최근엔 조성준을 처리한 화제의 인물이잖아. 요즘 여자애들이 뒤에서 네 이야기를 얼마나 많이 하는데 내가 널 모르겠어?”
미희는 웃으며 이야기했다.
그녀는 유리와 비교해보아도 손색없는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유리는 밝고 명랑하면서도 순수한 느낌이라면 미희는 조금 차가운 느낌은 있지만, 지적이고 도시적인 매력이 있었다.
“화제의 인물까지야...... 그건 그렇고 시간 늦었는데, 조심해서 들어가. 난 집에 가는 중이라 먼저 갈게.”
비록 초반에는 호기심이 든 건 사실이었지만 수혁은 미희에게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그녀였지만 별 관심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괜찮으면, 나랑 저녁 안 먹을래? 나 오늘 학원도 일찍 끝나서 할 것도 없는데.”
미희는 최근 들어 학생들에게 많은 주목을 받고 있는 수혁에게 관심이 있었다. 그녀는 좀 더 수혁과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미안한데, 오늘은 오랜만에 가족들이랑 식사를 하고 싶어서. 다음에 하자.”
“그래, 그럼 다음에는 꼭 같이하는 거다?”
“흠, 알았어.”
미희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지만 수혁의 반응은 뜨뜻미지근했다.
“혹시 나 택시 좀 잡아 줄 수 있어? 아까 일로 조금 놀란 것 같아.”
“알았어.”
수혁은 골목을 나와 택시가 다니는 도로 근처로 왔다.
“너 여기 근처 살아?”
미희는 물었다.
“여기서 좀 들어가면 있는 빌라에서 살고 있어.”
“아, 그렇구나.”
“저기 온다.”
그는 다가오는 택시를 잡은 뒤 미희를 택시에 태워서 보냈다.
이후 수혁은 곧장 집으로 향했다.
집에는 부모님이 와 계셨고 같이 저녁을 먹었다.
‘뭔가, 목표가 다시 필요할 것 같아. 조성준 일은 해결됐으니까 앞으로의 일을 생각해 봐야겠어.’
식사를 마치고 방에 돌아온 수혁은 향후 계획을 고민하며 한가롭게 주말을 보냈다.
주말이 지나 월요일이 되었다.
“수혁아 왔어?”
“안녕.”
성준의 일을 해결하고 난 후 그의 일상에는 소소한 변화가 생겼다. 수혁이 반에 들어오면 이제는 몇몇 아이들이 먼저 인사를 걸어오곤 했다.
‘뭐, 나쁘지는 않네.’
과거에는 느껴보지 못한 주변의 따뜻한 관심은 수혁의 마음을 안정시켜 주었다.
이전 삶에서 비롯된 상처의 흔적 중 하나로 타인에 대한 경계심이 있었는데 조금씩 그런 부분이 개선되고 있음을 느꼈다.
그는 자리에 앉아 일상의 평화로움을 만끽하고 있었는데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수혁아.”
‘누구지?’
유리가 아닌 다른 여성이 수혁을 불렀는데 그가 확인해보니 미희가 반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와, 이제 이미희랑도 친해졌나 봐.”
“수혁이 보면 은근히 인기가 많은 거 같아.”
“은근히? 내 주변에도 수혁이 좋다는 애들이 한 둘이 아니야”
미희를 본 몇몇 아이들은 수군거렸다.
수혁은 이런 반응을 무시하고 미희를 보러 반 밖으로 나갔다.
“무슨 일이야?”
“응, 그냥 어제 일도 고맙고 해서 왔어. 덕분에 어젠 잘 들어갔어.”
“그래, 다행이다.”
수혁은 미희의 말에 단답식으로 답했다.
“넌 나에 대해 궁금한 것 없어?”
“나? 별로 없는데.”
“관심 좀 가져봐. 앞으로 친하게 지낼 건데 서로에 대해서 알면 좋지 않을까?”
미희는 어떻게든 말을 이어가려고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수혁은 짧게 대화를 한 뒤 반에 돌아왔고 언제 그랬냐는 듯 자신이 할 일에만 집중했다. 그리고 그 뒤에도 며칠 동안 점심시간이나 쉬는 시간이면 종종 미희가 찾아왔다.
“야, 이미희가 너 좋아하는 것 같아. 난 쟤가 남자 찾아오는 거 처음 봤어.”
경현은 놀라워하며 말했다.
“한 번 도와준 적이 있는데 그날 이후로 계속 그러네.”
수혁은 무덤덤하게 말했다.
“야, 도와줘서 고마운 마음에 그렇다고 말하고 싶나 본데 내가 볼 땐 그런 단순한 이유는 아니야, 너도 보면 은근히 둔해. 쯧쯧”
경현은 답답한 지 혀를 찼다.
‘오늘은 뭘 할까? 아무래도 내일부터는 칸타빌레에 가서 번역작업이라도 시작해야겠어.’
수혁은 성준과의 일을 매듭지은 후 사업에 대해 구상을 해봤지만 큰 소득은 없는 상황이었다.
그는 고민에 잠겨 천천히 걸어갔다.
“집 가고 있어?”
수혁은 말없이 걷고 있는데 옆에서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어 너구나, 여기서 뭐해?”
그가 고개를 돌려 확인을 해보니 미희가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 학원가는 날인 줄 알고 왔는데 알고 보니까 쉬는 날이더라고. 그래서 뭐 할지 생각하고 있었지.”
“여기까지 왔는데 허무하겠다.”
“수혁아, 괜찮으면 같이 저녁 안 먹을래? 너 예전에 나랑 같이 밥 먹기로 했는데 계속 미뤘잖아.”
미희는 수혁에게 가까이 붙어서 애원하듯 말했다.
‘휴, 어쩌지?’
그는 약속을 계속 미뤄왔기에 난감한 처지가 되었다.
수혁은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래, 근처에서 저녁 같이 먹자. 뭐 먹을래? 좋아하는 거라도 있어?”
“진짜? 그럼 저기 새로 생긴 카페형 레스토랑 있는데 가서 파스타 먹고 커피도 마시자.”
“알았어.”
미희는 뭐가 그리 좋은지 싱글벙글이었다.
그녀는 수혁을 데리고 레스토랑으로 향했고 곧 도착했다.
‘제법인데?’
수혁은 내부를 살펴보며 생각했다. 선명한 벽돌 무늬로 이루어진 벽과 곳곳에 걸린 그림들은 레스토랑다운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고 잔잔한 재즈음악은 인테리어와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내가 먹자고 했으니까, 내가 살게. 뭐 먹을래? 좋아하는 거 있어?”
“그냥, 뭐 난 가리지 않아, 네가 알아서 시켜.”
그들은 메뉴판을 보면서 음식을 고르고 있었다.
“알겠어, 저기요!”
미희는 웨이터를 불렀다.
“여기 알리오 파스타랑 크림 파스타 하나씩 주세요.”
“넵. 더 필요하신 건 없나요?”
“후식 음료는 식사 다하고 따로 주문할게요.”
“알겠습니다.”
주문을 받은 웨이터는 주방으로 갔다.
“알리오 파스타는 크림이랑 토마토 파스타랑 다르게 깔끔해서 좋더라고.”
“맞아, 내 입맛에도 딱 맞는 것 같아.”
수혁과 미희는 메뉴에 대한 대화를 나누었고 잠시 뒤 음식이 나왔다.
“여기 맛있다. 많이 먹어.”
“응. 먹자.”
그들은 파스타를 먹은 뒤 후식으로 시킨 커피를 마셨다.
“여기 분위기 괜찮다. 나중에 너랑 또 왔으면 좋겠어.”
“그러게. 나중에 가족들이랑 와도 좋겠다.”
수혁도 레스토랑의 분위기가 마음에 드는지 미희의 말에 공감했다. 그렇게 커피를 마시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던 그들은 슬슬 나가보기로 했다.
“수혁아, 내가 산다니까.”
“됐어. 내가 약속을 미뤘던 것도 있었고, 생각보다 얼마 나오지도 않았네. 어쨌든 잘 먹었으니까 됐지 뭐.”
“아, 그래도.”
계산을 마친 수혁과 미희는 레스토랑 밖을 나오고 있었다. 그런데 은색 세단하나가 그들 앞에 멈추었다.
“아........”
“왜 그래?”
미희는 차를 확인하자마자 얼굴이 굳어졌다. 수혁은 그녀의 반응을 살핀 후 차를 쳐다봤다. 그러자 잠시 후 차 창문이 내려가더니 중년의 여성이 말을 걸어왔다.
“이미희, 너 학원도 안 가고 어딜 돌아다니는 거야? 학원에 전화 와서 너 찾으려고 내가 이곳을 몇 바퀴 돈 줄 알아?”
세련된 옷을 입고 선글라스를 낀 여자는 미희를 꾸짖기 시작했다.
“미안해, 엄마. 친구랑 오래전부터 밥 먹기로 해서 어쩔 수 없었어.”
미희는 쩔쩔매며 변명하기에 바빴다. 여자는 미희의 엄마로 이름은 김현숙이었다.
“이 잘생긴 청년은 누구야? 친구야? 미희가 이 시간에는 학원에서 공부해야 되니까 나중에 휴일에 만나든가 해라.”
“네, 뭐 앞으로 미희를 방해하거나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수혁은 현숙에게 꾸벅 인사를 한 뒤 차분히 말했다.
“그래, 같은 학교 학생인 것 같은데, 미희 알지? 얘는 나중에 자기 아버지 따라서 법대 가야 해, 그니까 서로 이렇게 놀지 말고 공부에 열중해라. 그건 그렇고 친구는 공부 잘 하니?”
현숙의 말투는 친절했으나 상대방이 불편할 수 있는 질문을 서슴없이 하고 있었다.
“엄마! 수혁이한테 그런걸 뭐 하러 물어봐.”
미희는 현숙을 말리려 했다.
“가만히 있어봐, 수혁이라고? 그래 공부는 잘 해?”
“성적은 미희처럼 좋지는 않습니다. 제가 아직은 공부를 안 해봐서요.”
수혁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학생들이 공부를 해야지, 집 어디야? 친구니까 내가 태워줄게, 미희 너도 타. 바로 집에 돌아가서 오늘 못한 공부마저 하고 자야지.”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여자는 쌀쌀한 말투로 돌변했다.
“안 태워주셔도 됩니다. 저는 여기서 조금 걸어가면 금방입니다. 알아서 가겠습니다.”
“그래? 여기 근처 살아? 어디 사는데?”
“네 여기서 조금만 걸어가면 나오는 빌라 촌에서 삽니다.”
수혁은 질문이 조금 불편했지만 침착하게 대답했다.
“학생, 아직 어린데 벌써 자취 하나 보네?”
그녀는 걱정하는 척 하면서 물었다.
“아닙니다. 지금 부모님이랑 같이 삽니다.”
“그래? 흠, 그럼 알아서 들어가. 미희야 타라.”
수혁의 답변을 들은 현숙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는 그녀가 어떤 마음으로 표정이 바뀌었는지 눈치챘지만, 미희를 생각해서 무시하기로 했다. 그들을 뒤로 하고 집을 가려는데 갑자기 현숙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미희야, 넌 무슨 생각으로 저런 애랑 어울리는 거야? 집에 가서 이야기 하자, 그리고 학생. 미안한데 앞으로 미희랑 어울리는 것을 삼갔으면 좋겠어.”
“엄마, 그만해.”
수혁은 집에 가려는 발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
그녀는 무례한 말을 함에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말을 이어갔다.
“들어보니까 형편도 좋지 않은 것 같은데, 밤늦게 싸돌아다닐 생각하지 말고 공부를 하든가, 아니면 집에 일찍 들어가서 효도해야지.”
“아줌마 말씀이 지나치시네요.”
수혁은 차가운 표정을 지으며 현숙을 노려봤다.
“뭐, 지나쳐? 감히 네 따위가 뭐라고, 미희야 두 번 이야기 안 한다. 차에 타고 다시는 쟤랑 어울리지 마!”
“따님은 적어도 저랑 지낼 때 예의라는 것을 알았는데, 지금 타는 차와 전혀 어울리지 않게 천박하게 말씀을 하시네요.”
수혁은 더이상 참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다.
“뭐? 천박? 그니까 뭐 하러 변변치도 않으면서 우리 딸이랑 어울리래? 사회생활도 안 해본 녀석이 말이야, 밖에 나가면 너는 나한테 말도 못 섞어!”
그녀의 말을 듣자 수혁의 눈썹은 꿈틀대었다.
“나중에 공부든 뭐든 어떻게 되는지 두고 보시죠.”
“두고 볼 필요가 뭐 있겠어? 미희 실력을 알면 그런 말 못 할 건데? 그리고 나중에 친구들한테 미희 아버지가 뭐 하는지 물어봐라. 그러면 네가 얼마나 큰 실수를 저질렀는지 알게 될 거다.”
“물어볼 생각 없고요. 혹시 다음에 뵐 일이 있으면 사람에 대한 예의 정도는 갖추시고 오시죠.”
“.......”
수혁은 훈계조로 말하면서 잠시 동안 현숙을 노려보았다.
그녀는 눈빛에 눌려 더 이상 대응하지 못하고 운전대만 잡고 있었다.
‘아 쪽팔리다.’
미희는 이 상황이 민망한지 고개를 푹 숙였다.
“들어가. 학교에서 보자.”
수혁은 차에서 손을 뗀 뒤 털레털레 자신의 갈 길을 갔다.
그리고 현숙은 놀란 마음을 진정시킨 후 분통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어디 저런 버르장머리 없는 녀석이 있지? 미희야, 누차 이야기하지만, 근본 없는 애들이랑 어울리지 말라니까?”
그렇게 그녀는 한동안 차에서 분풀이를 했고 미희는 침묵을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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