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깊은 밤이 되어 상점들은 문을 다 닫은 시각, 수혁은 차가운 가을바람에 옷깃을 여미며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하, 과거는 좀 더 사람들이 순수했던 것 같은데 20년 후의 미래나 지금이나 별로 다를 건 없네.’
수혁은 밤길을 걸으며 지난 생에서 가난한 집안과 학벌로 자신을 무시하던 사람들을 떠올렸다.
조성준 일을 처리하고 잠시나마 느꼈던 삶의 여유는 이런저런 생각으로 인해 흩어져가고 있었다.
‘그래, 고민만 해서는 안 돼, 이제부터는 공부를 해서 좋은 대학에 가고 사업에 대해 구체적인 구상을 해야 돼.’
한동안 목표를 잡지 못하여 방황했던 수혁은 삶의 새로운 방향을 설정했다.
‘공부를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 학원을 다녀야 되나? 아니면 책을 사서 독학을 할까?’
수혁은 한국대학교 경영학과를 진학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한국대학교는 자타공인 최고의 대학으로 일반 고등학교에서 한 명 보내는 것도 쉽지 않은 명문대학교였다.
‘인터넷 강의가 있다면 돈도 얼마 안 들고 손쉽게 공부를 할 수 있을 텐데.’
때는 1998년, 2000년대 중반에 들어서야 인터넷 강의가 보편화 되었던 것을 고려했을 때, 싸고 양질의 온라인 강의를 듣고 싶은 수혁의 바람은 요원해 보였다.
‘그래, 내가 직접 인터넷 강의를 전문적으로 하는 회사를 차려야겠다.’
수혁은 효율적인 공부 방법에 대한 아이디어를 생각하다가 사업 아이템을 착안해 내었다.
‘2000년에 대학에 입학하니까 온라인 강의가 유행하기 전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어,’
그는 회귀하기 전 어느 학원이 발 빠르게 온라인 강의 서비스를 론칭하여 대기업 못지않은 커다란 회사로 발전한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우선은 한국대학교에 진학할 수 있게 실력을 갖추고 창업을 위해서 돈을 모아야 해, 어떻게 할까?’
집에 도착하여 자리에 누운 수혁은 앞으로의 계획을 고민하며 밤을 보냈다.
다음 날이 되었다. 학교에 도착한 수혁은 반으로 들어가려는 중이었다. 그런데 미희가 반 앞 복도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수혁아, 저기.”
“응, 뭐야?”
미희는 학교에 일찍 도착하여 수혁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어제 일로 인하여 많이 어두운 상태였다.
“어젠 우리 엄마가 너에게 너무 무례했던 것 같아. 내가 대신 사과할게.”
“괜찮아. 네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뭘. 마음 쓰지 않아도 돼.”
수혁은 그 일에 대해 크게 신경쓰지 않고 있었다.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어제 일 생각하면 나 보기 싫을 것 같아서 걱정했었어. 그리고 괜찮으면 우리 친구로라도 지낼 수 있을까?”
미희는 어렵게 말을 꺼냈다.
“응, 그래. 말했듯이 어제 일은 의식하지 말고 편하게 지내자. 밖에 춥다 들어가.”
“알았어, 수혁아. 나갈게.”
미희는 인사를 건넨 뒤 반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어제 일로 수혁을 볼 면목이 없었다. 그리고 따라다니면서 느낀 점이 있다면 그가 자신을 여자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더 이상 부담주지 말자.’
그녀는 수혁과는 그냥 친구로 지내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 몇 주의 시간이 지났다. 어느새 계절은 가을을 훌쩍 지나 겨울에 들어가고 있었다.
“수혁아, 요즘 뭐하고 지내?”
“어, 유리구나.”
그날은 학교에서 보내는 2학기 마지막 날이었다. 방학식을 마친 학생들은 일찌감치 짐을 싸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고 수혁은 우연히 유리와 마주쳐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기말고사 기간이라 한동안 너랑 보지도 못했는데 이렇게 만나네.”
유리는 평소처럼 밝게 웃으며 말했다.
“응, 그러게.”
성준도 오랜만에 만난 유리가 반가웠다.
“너 요새는 미희랑 안 붙어 다니는 것 같던데?”
“언제 붙어다녔다고....... 나도 요즘은 공부하느라 바쁘게 지내고 있어. 이제 곧 고3이잖아.”
수혁은 미희와의 일 이후로 공부에 매진했다. 방학 전에 실시되었던 기말고사도 성적이 예전에 비해 250등 이상 올라 살면서 처음으로 100등 안에 들게 되었다.
“와 진짜? 어쩐지, 가끔씩 반에 찾아가면 맨 날 책만 읽고 있던 것 같더라고. 그래서 말 걸기가 좀 그러드라.”
“그냥, 와서 말하지 난 상관 없는데.”
수혁은 유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잠시 나누고 있는데 갑자기 퀘스트창이 활성화 되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퀘스트 내용을 확인해보았다.
‘한 번 살펴볼까?’
<히든 퀘스트가 발동되었습니다. 방학 동안 유리와 함께 공부를 하시길 바랍니다.>
‘뭐지? 공부라면 혼자 잘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수혁은 목표를 뚜렷이 설정한 이후 누구의 도움 없이 혼자서 독학으로 수능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플로 인해서 향상된 그의 능력을 감안했을 때, 비록 성적이 많이 올랐지만 충분하다고 볼 수는 없었다.
<몇 번을 말씀드리지만 본 프로그램은 사용자의 욕망을 실현시키는데 최적화 되어 있습니다. 이번 히든 퀘스트도 사용자의 성장에 크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의 생각을 읽은 도움말은 의견을 말했다.
‘그래, 고민하지 말자.’
수혁은 이미 어플을 많이 신뢰하고 있었기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히든퀘스트를 수락했다.
“수혁아 무슨 생각해? 아까부터 말도 없고.”
유리는 조금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봤다. 수혁은 잠시 생각을 정리한 뒤 입을 열었다.
“유리야, 나 이제 방학 때 본격적으로 공부하려고 하는데 같이 안 할래? 사실, 혼자 공부하니까 감도 잘 안 잡히고 그러더라고.”
“응 좋아.”
그녀는 전혀 고민하지 않고 쉽게 대답했다.
“응? 나랑 너는 실력 차이가 있어서 어쩌면 공부에 방해가 될 수도 있는데 괜찮겠어?”
그는 유리의 빠른 반응에 당황했다.
“우리 사이에 뭐 그런 걸 따져, 그리고 나도 너 가르쳐주면서 내 공부도 할 수 있어서 상관없어. 원래 실력은 누군가를 가르쳐줄 때 가장 빨리 느는 법이야.”
“고마워, 유리야.”
“고맙긴, 그럼 내일부터 바로 공부 시작하자. 수험에 도움이 되는 책을 내가 알려줄 테니까 오늘 가서 책 사고 아침 8시까지 우리 반으로 와, 자습실은 아이들 공부해서 같이 공부하기 좀 그러니까.”
“알았어, 내일 아침에 보자.”
수혁은 유리와 향후 공부 계획에 대해서 대화를 나눈 뒤 헤어졌다. 그리고 그는 바로 시내 서점에 가서 그녀가 말한 수험서를 모두 샀다.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공부 시작인가?’
수혁은 집에 돌아가 방학 전날에 느낄 수 있는 짧은 여유를 만끽하며 휴식을 취했다.
방학의 첫날이 되었다. 12월이 되자 날씨는 급격하게 추워졌다.
수혁은 바람에 휘날리는 진눈깨비를 맞으며 학교에 갔다.
‘날씨도 안 좋은데 유리는 왔나?’
약속 시간인 8시보다 조금 빨리 학교에 도착한 수혁은 그녀의 반으로 향했다.
그의 예상과는 달리 반의 불은 켜져 있었고 유리는 책상 위에 프린트를 쌓아두고 기다리고 있었다.
“빨리 왔네?”
수혁은 반에 들어와 인사를 건넸다.
“수혁아 여기 앉아. 본격적으로 공부를 하기에 앞서 테스트를 보려고 하는데 괜찮지?”
“시키면 군말 없이 해야지.”
“하하, 여기 앉아.”
유리는 서로 마주 볼 수 있게 책상을 맞댄 뒤 자신의 건너편 자리에 수혁이 앉게끔 했다.
“수혁아, 나 궁금한 게 있는데.”
“뭔데?”
“네가 가고 싶은 대학이 어디야? 공부하기 전에 뚜렷한 목표가 있으면 동기부여도 되고 좋거든.”
“난 한국대 경영학과에 가고 싶어.”
수혁은 고민도 하지 않고 즉각 대답했다. 이미 언급했지만, 한국대학교는 대한민국에서 인정받는 최고 명문대학이다.
그곳에는 각 고등학교에서 온 수재들이 모두 모이는데, 재벌가나 한국에서 알아주는 명문가들도 자신의 자식들을 그곳에 보내려고 혈안이 돼 있었다.
“그렇구나. 목표는 높을수록 좋은데 나쁘지 않네.”
유리는 제3자가 보면 약간 무리가 있을 것 같은 수혁의 목표에 놀라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진지하게 들어주었다. 그녀는 종이 위에 수혁의 대답을 적은 뒤 말을 이어갔다.
“나도 사실 한국대학교를 목표로 하고 있어, 우리 열심히 해서 같은 학교 들어갔으면 좋겠다.”
“그래. 우리 열심히 해보자.”
“그럼 본격적인 공부에 앞서 진단을 한 번 해보자. 이 종이들은 올해 고3 선배들이 본 6월 모의고사를 뽑아놓은 거야. 시간은 똑같이 재고 풀 거니까 긴장하는 게 좋을 거야.”
유리는 종이뭉치 사이에서 언어문제들을 추려낸 뒤 건네주었다.
“준비됐어? 바로 시작하자. 시간 관리는 칠판 위의 시계를 보면서 해, 나는 구석에서 개인 공부를 하고 있을게. 마킹시간 감안해서 원래보다 3분 정도 일찍 시험을 종료할 테니까 감안하고 풀어 수혁아.”
“오케이.”
수혁은 대답을 한 뒤 곧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
유리는 자신이 갖고 온 스톱워치를 켠 뒤 한쪽에서 공부를 했다.
그는 중간에 점심을 먹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모의고사 문제를 풀었다.
집중을 하다 보니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고 그는 모의고사를 마칠 수 있었다.
‘계절이 바뀌긴 했나보네.’
창밖을 보니 해는 벌써 지고 있었다.
“채점할게.”
유리는 수혁이 푼 문제지들을 한데 모아 채점을 했다. 채점은 얼마 걸리지 않았고 그녀는 결과에 대하여 논평을 하기 시작했다.
“성적이 나쁘지는 않아, 그런데 이 성적으로는 한국대학교를 가기에는 많이 부족한 것 같아.”
“응.”
“다행히도 네가 언어에 감각이 있는 것 같아. 언어는 성적을 좀 더 올려야 하긴 하지만 상위권 점수고 외국어는 만점이야, 그리고 사탐도 가능성이 충분해 보이고.”
수혁은 기말고사 준비를 하면서 사회탐구에 대한 부분이 많이 발전된 상태였다.
“문제는 과학이랑 수학이야. 어느 정도 개념은 있는 것 같긴 한데 한국대를 노리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상태야.”
이때 당시 수능의 탐구과목은 사회와 과학을 같이 보았다. 따라서 문과임에도 불구하고 수혁은 과학을 공부해야 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
“우선, 사탐은 내가 과목별 암기노트 줄 테니까 그 부분을 다 외우면 될 것 같아. 그리고 과학이랑 수학은 시간이 많이 없으니까 문제를 풀면서 모르는 개념을 잡아가는 방식으로 하자.”
“알았어.”
“진단평가는 방학 중간에 한 번 개학하기 전에 한 번 더 볼 거야. 중간 중간 실력을 점검해야 공부방법을 수정할 수 있으니까 귀찮더라도 한 번 해보자.”
수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리는 각 과목별 공부 방향에 대한 설명을 한 뒤 수혁을 데리고 밖에 나가 저녁을 먹었다.
그 후 그녀는 다시 돌아와 각 과목별로 과제를 내주고 수혁이 모르는 문제가 있으면 상세하게 알려주었다.
“수혁아, 너 공부에 소질이 있는 것 같아.”
“선생님이 훌륭하니까 그렇지 뭐.”
“아니야, 이해력도 그렇고 암기도 잘하는 것 같아.”
유리는 수혁에게 수학을 가르치는 중이었다.
그녀는 막히는 문제를 갖고 온 수혁에게 해당 문제에 필요한 개념과 풀이 방법을 설명해주었다. 그러면 수혁은 바로 이해를 했고 다른 문제에 금방 적용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시간은 흘러 밤이 되었다. 그들은 학교를 나와 각자 집 방향으로 헤어지려던 참이었다.
“앞으로 공부는 당분간 이런 방향으로 할 거야. 오전, 오후는 사온 문제집을 풀고 밤에는 틀린 문제를 점검하는 식으로 말이지. 수고했고 내일도 8시에 보자!”
“응.”
수혁과 유리는 서로 인사를 한 뒤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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