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현월당에서의 사건 이후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갔다.
수혁은 수능이 얼마 남지 않자 다른 일들은 제쳐두고 공부에 매진했다. 그는 이미 시험에 대해 자신이 있었으나 기왕 보는 거 최고의 상태로 치르고 싶었다.
‘후, 이제 제법 쌀쌀한데?’
어느덧 10월이 지나가고 11월이 되었다. 학생들은 목요일 날 치르는 수능에 대비하여 마지막 스퍼트를 올리고 있었다.
수혁도 요즘은 학교에 남아 자율학습시간에 공부를 하곤 했다.
수능을 이틀 앞둔 그는 이날도 학교에서 늦게까지 공부하고 유리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와, 이제 수능이네......”
그녀는 스트레스가 심한 지 탄식하는 투로 말했다.
“그러게, 시간 참 빠르다. 조금만 있으면 겨울인 걸 보면 학교생활이 얼마 안 남은 것 같아.”
계절은 어느새 늦가을에 접어들어 밤공기는 제법 쌀쌀했고
길가에 세워진 가로수들 아래에는 점점 쌓여가는 낙엽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평소대로 하면 문제없을 거야.”
수혁은 다소 긴장해 보이는 유리를 안심시키기 위해 말을 건넸다.
“고마워. 아, 그리고 내일은 오전수업만 한다고 하니까 컨디션 관리 잘하자.”
“그래, 너도.”
유리와 수혁은 갈림길에 다다르자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다음 날이 되었다. 수혁은 오전 수업을 마치고 모든 책들을 집에 가져온 뒤 공부했던 내용들을 빠르게 정리하였다.
“이것까지 하면 수능만 3번째 보는 건가?”
수혁은 자신의 방에서 혼잣말을 하고 있었다.
과거 생에서 검정고시 전형으로 대학을 갔을 때도 한 번에 가지 못하고 재수를 했던 수혁은 생각에 잠겨있었다.
‘이번에는 한 번에 가야지.’
마음을 다 잡은 수혁은 자세를 고쳐 앉고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이날 밤 그는 컨디션 관리를 위하여 일찍 잠에 들었다.
* * *
대망의 수능 날이 되었다.
“선배님 힘내세요!”
“시험 잘 보고 화이팅 해라!”
수혁은 집에서 지하철로 4정거장 쯤 떨어진 인문계 고등학교에 배정되었다.
아침 일찍 길을 서둘러 학교에 가보니 선배들을 응원하기 위해 나온 학생부터 학부모들 그리고 선생들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교문 앞에서 수험생들을 격려하고 있었다.
“수혁아. 일찍 왔네?”
중년의 여성이 수혁을 알아보고 다가와 말을 걸었다.
“네 선생님 추운데 고생하시네요.”
그녀는 3학년 1학기 때 담임을 맡았던 이경자였다.
경자는 주머니에서 초콜릿 하나를 꺼내서 주었다.
“문제 풀다가 당 떨어질 것 같으면 쉬는 시간에 먹으면서 해.”
“감사합니다. 덕분에 시험을 잘 치를 수 있을 것 같아요.”
수혁은 짧게 대화를 나눈 뒤 고사장으로 들어갔고 얼마 있지 않아 시험은 시작되었다. 학생들은 긴장된 표정으로 시험지를 교부 받은 후 열심히 문제를 풀었다.
그는 모의고사를 볼 때와 같은 차분한 마음으로 시험을 치렀다.
시간은 흘러 어느새 마지막 교시가 끝나고 학생들은 학교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고교생활이 드디어 끝났구나.’
짧다면 짧고 길면 길 수 있는 그런 기간이었다. 과거로 돌아와 고2 여름부터 1년 6개월에 가까운 시간 동안 참 많은 일이 있었고 수혁은 모든 어려움을 잘 극복했다.
‘지금까지 잘 해온 것처럼 앞으로도 멋지게 살아보자.’
수혁은 회귀한 이후 거뒀던 성과들을 떠올리며 뿌듯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왔다.
번호 키를 누르고 집에 들어가자 부모님께서 기다리고 있었다.
“가게는 어쩌시고 이 시간에 집에 계세요?”
“이런 날까지 일 하는 건 너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수혁아 가서 중국 음식이나 먹자.”
“잠시만요 옷만 갈아입고 올게요.”
선웅과 혜정은 가게를 잠시 직원에게 맡겨 놓은 뒤 일찍 와서 수혁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사복으로 환복을 하고 부모님과 중식당에 갔다.
“오늘은 먹고 싶은 거 다 시켜줄 테니까 부족하면 언제든지 말해라.”
혜정은 주문한 요리들이 상에 차려지자 먹을 것을 권했다.
“지금 이것들도 다 먹을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아무튼 잘 먹겠습니다!”
선웅과 혜정은 탕수육, 깐풍기 등 맛있는 음식을 푸짐하게 시켜놓은 상태였다.
“아들이 이만큼 잘 커 줬는데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지. 자, 다들 먹자고.”
선웅은 젓가락을 들고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시험 끝나고 먹으니까 꿀맛인데?’
수혁은 수능을 마치고 가족과 식사를 하는 소소한 행복을 느끼고 있었다.
* * *
다음 날이 되었다.
선민고등학교 학생들은 어제 본 수능을 가채점하러 반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수혁도 이날은 특별반이 아니라 원래 자신이 속해 있던 반에서 가채점을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학생들은 가채점을 당일이 아니라 다음 날 학교에서 했던 시절이었다.
“아, 뭐야. 답안지를 밀렸나 점수가 왜 이래?”
“야, 난 생각보다 잘 나온 거 같아.”
학생들은 저마다 채점이 끝나고 나온 점수에 대해 희비가 엇갈리고 있었다.
수혁은 시험 때 적어온 수능의 가 답안을 답안지와 비교해보았다.
‘채점을 잘 못 했나? 이럴 리가 없는데?’
수혁은 자신이 맞은 점수가 믿어지지 않아 다시 가채점을 해보았다. 그러나 점수는 계속 똑같이 나올 뿐이었다.
“수혁아, 시험 잘 봤어? 나는 아무래도 좋은 대학 가기는 글렀다.”
경현은 울상을 지으며 다가왔다.
“난 생각보다 점수가 잘 나온 것 같아.”
수혁은 친구의 기분이 행여 상하지 않을까 싶어 조심스럽게 말했다.
“왜? 몇 점 나왔는데?”
“답안지가 정확하다면 만점이야. 믿기 힘들어서 몇 번을 확인해도 계속 만점으로 나오더라고.”
“진짜야? 대박이다 수혁아!”
경현은 그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는지 자기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
“다른 애들한테는 굳이 알리고 싶지 않으니까 조용히 있자.”
수혁은 소란을 피하고 싶었기 때문에 경현을 자제시켰다.
“야, 진짜 대단하다. 그럼 넌 어디 갈 생각이야?”
“난 이번에 한국대 경영학과 지원할 거야.”
“그 점수면 합격은 따 논 당상이지.”
경현은 아까와 달리 다른 사람들이 듣지 못하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넌 어느 대학 생각하고 있어?”
수혁은 궁금하여 물었다.
“이 점수로는 서울 내의 대학은 갈 수도 없고 지방 국립대도 노리기 힘들어. 난 그냥 대학 안가고 일이나 배우려고.”
“아무리 그래도 대학은 나오는 게 좋지 않을까? 우리나라는 학벌 사회잖아.”
그는 크게 놀랐지만 티를 내지 않고 덤덤하게 말했다.
“우리 아버지가 부동산으로 돈을 크게 버시고 나서 아예 부동산 투자전문 회사를 차렸거든. 한동안 잊고 지냈는데 안 본 사이에 회사가 많이 성장했더라고. 그래서 차라리 그냥 아버지 밑에서 일을 배우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
“오, 그러다가 나보다 먼저 부자 되겠는데?”
수혁은 과장된 제스처를 하며 농담을 했다.
“두고 봐, 나중에 어떤 식으로든 보탬이 되는 친구가 될 거니까. 너 대학가도 나랑 연락 할 거지?”
“뭘 그런 당연한 소리를 하냐?”
수혁과 경현은 이후에도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한참 동안 나누었다.
잠시 후 담임은 반에 들어왔고 경자는 학생을 한 명씩 불러 가채점 결과를 받아 적었다.
그는 자신의 차례가 되자 앞으로 나가 점수를 알려줬고 그녀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수혁아 장하다. 해낼 줄 알았지만, 이 점수는.......”
“다 선생님이 잘 지도해주신 덕분입니다. 감사합니다.”
그녀는 다른 학생들 때문에 수혁을 길게 잡지 못하고 자리로 돌려보냈다.
이 날 담임은 점심시간이 되기 전에 학생들을 하교시켰다.
학교는 방학이 될 때까지 오전수업만 할 예정이었다.
사실상 수업보다는 주로 영화를 보거나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말이다.
며칠이 지나 12월 초가 되었고 수능 점수는 발표되었다.
‘채점한 대로 나와서 다행이다.’
수혁은 예상한대로 만점을 받았다.
“와, 이게 말이 되냐? 우리 학교에서 전국 1등이 나오다니.”
“왜? 이전에도 계속 전국 등수 안에 들었었잖아. 난 그것보다 만점 맞은 게 더 대단한 거 같아. 하나도 안 틀린 거잖아.”
수혁은 전국 1등을 한 것을 계기로 학교에서 다시 한번 화제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 후 여러 언론사에서도 인터뷰제의가 들어왔지만, 모두 거절했다.
괜히 소문이 나서 피곤해지는 것은 싫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수혁이 사는 지역에는 수능 만점자가 나왔다는 소문이 퍼졌고 이 사실을 안 부모님은 무척 기뻐했다.
“하하, 수혁아 네 덕분에 살맛이 난다. 오늘 어떤 손님께서 오시더니 나한테 자식 잘 키웠다고 그렇게 칭찬을 하고 가더라고.”
“그러게, 고생많았다. 대학갈 때까지 푹 쉬어라.”
선웅과 혜정은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흐뭇해했다.
그는 부모님 외에도 학교에서 유리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에게 축하를 받았으며 즐겁게 고교생활을 마무리 했다.
‘대학 가기 전까지 사업 준비를 제대로 해야겠다.’
하루하루 행복하게 보내던 수혁은 어느새 방학을 맞았다.
그는 집에서 휴식을 취하며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기보다는 칸타빌레에 가서 번역 작업을 하거나 사업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짰다.
‘회사 이름은 SH스터디로 해야겠어. 그리고 대략적으로라도 사업견적을 뽑아서 사업자금이 얼마나 필요한지 확인해봐야겠다.’
그는 온라인 강의 회사를 차리기 위해 관련 자료를 살펴보며 준비해야할 것이 뭐가 있는 지 철저히 알아보았다.
1월이 되자 수혁은 정시 원서를 넣다. 물론 그는 한국대 경영학과를 지원했다.
‘이제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정시 결과 발표는 보통 2월 초에 하기 때문에 수혁은 경영학 도서를 읽거나 인터넷 사업을 하는데 도움이 되는 지식들을 공부하며 시간을 보냈다.
* * *
“하 요즘 많이 피곤하네.”
요즘 따라 선웅의 몸 상태가 조금 이상했다.
그는 1월 들어 피곤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고 항상 졸린 표정으로 다녔으며 안색도 좋지 않았다.
“아버지, 좀 쉬면서 하세요. 이러다가 큰일 나겠어요.”
“물 들어올 때 노 저어야지, 이런 기회는 쉽게 오는 것이 아니야.”
수혁은 휴식을 취하라고 몇 번이나 권했지만, 그때마다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러다 1월 중순에 일이 터졌다. 선웅은 출근시간이 다 되어감에도 불구하고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골골 대었다.
“쉬고 있어. 어차피 홀 관리는 다른 직원들이랑 수혁이가 하면 되니까.”
혜정은 그를 안쓰럽게 쳐다보며 말했다.
“맞아요, 오늘은 저희가 알아서 할 테니까 집에서 쉬세요, 국이랑 반찬은 다 해놨으니까 때 되면 차려서 드세요. 무슨 일 있으면 가게로 바로 전화주시고요.”
“수혁아 늦었다 가자.”
“네.”
그들은 선웅을 남겨둔 채 집을 나섰다. 현월당에 간 수혁은 엄마를 도와 열심히 일했다. 그리고 퇴근 시간이 되자 가게 문을 닫고 집에 돌아왔다.
“저희 왔어요.”
수혁은 집에 오자마자 아버지의 상태를 확인하러 방에 들어갔다.
가보니 선웅은 이불을 깔고 누워서 티비를 보고 있었다.
“몸은 좀 괜찮아?”
혜정은 짐을 풀며 선웅에게 물었다.
“하, 움직일 수는 있는데 몸에 힘이 없어. 왜 그러지? 몇 주 전부터 잠을 자도 개운하지 않고. 온 몸이 천근만근이야.”
“안 쉬고 계속 일만 하셔서 그럴 거예요. 이참에 좀 쉬세요. 당분간 제가 엄마를 도와서 가게를 잘 운영하고 있을 게요.”
‘뭐지?’
수혁은 수척해진 선웅을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퀘스트 창이 활성화되었다.
그는 물을 마시러 간다고 하고 방 밖에 나와 퀘스트를 클릭 했다.
<히든퀘스트가 발동되었습니다. 일에 지쳐 만성 피로에 시달리는 아버지의 기력을 되찾아주시기 바랍니다.>
‘무슨 퀘스트가 이래?’
그는 처음엔 퀘스트 내용을 보고 의아한 기분이 들었지만, 곧 퀘스트를 수락했다.
어차피 수혁 본인도 아버지가 요즘 지치신 거에 대해 걱정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결정하는데 별로 고민하지 않았다.
수혁은 퀘스트를 어떻게 해결할까 고민을 한 뒤 혜정과 선웅이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엄마, 아버지 잠깐 드릴 말씀 있어요.”
수혁이 저렇게 말할 때는 항상 중요한 이야기가 나온다는 것을 아는 선웅과 혜정은 대화를 멈추고 그를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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