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과연, 어떤 대답들이 나올까?’
병수는 내심 후배들의 세상을 보는 시야가 어떤지 알고 싶어졌다.
선배의 애정어린 질문에도 불구하고 테이블에 앉은 학생들은 처음 모인 자리의 어색함 때문에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명학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뭐, 평소에 하셨던 말씀들을 생각하면 어려운 질문도 아니네.’
명학은 식사자리에서 아버지와 병수가 대화를 나누는 것을 들은 적이 있었기 때문에 병수의 질문에 자신 있어 했다. 그는 깊게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바로 대답을 했다.
“제가 이야기할게요. 일송전자의 주력상품들로는 에어콘, 티비와 같은 가전제품도 있지만 지금 가장 주목해야하는 상품은 핸드폰이라고 생각해요.”
“어째서 그렇죠?”
병수는 흥미롭다는 듯이 명학을 쳐다봤다.
“기존 가전제품들은 이미 수요가 충분히 확보되어 있어 시장 성장률이 크지 않지만, 핸드폰은 날이 갈수록 시장이 폭발적으로 커지기 때문이죠.”
“그럼 회사는 어떤 비전을 갖고 핸드폰 시장에 임해야 할까요?”
병수는 계속해서 질문을 했다. 테이블에 앉아있는 학생들은 모두 명학을 바라보았고 그는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거침없이 대답을 이어나갔다.
“핸드폰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편리함이라고 생각해요. 현재의 핸드폰은 휴대하기에는 무게나 크기가 다소 적합하지 않은 부분이 있죠. 따라서 회사들이 핸드폰을 소형화하는데 힘을 쓰고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전반적으로 맞는 말입니다. 거기에 더하여........”
명학은 현재 핸드폰의 트렌드에 맞는 모범답변을 했다. 답변을 들은 병수는 말을 하려고 했으나 그 때 갑자기 수혁이 입을 열었다.
“소비자들이 편리함을 추구한다는 점에는 동의합니다. 그러나 단순히 핸드폰의 소형화를 추구하는 것은 먼 곳을 보지 못하는 근시안적인 견해라고 생각합니다.”
수혁은 자연스럽게 대화에 참여했다.
‘저 자식이 갑자기 왜 끼어든 거야?’
비록 정중한 말투이기는 하나 자신의 의견을 공격하는 것처럼 느낀 명학은 불쾌한 듯 인상을 찌푸렸다.
“오호, 후배님은 그럼 어떻게 보고 계신가요?”
병수는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명학을 내버려둔 채 수혁의 답변을 기다렸다.
“급격한 기술 발전과 글로벌화가 가속 되고 있는 흐름을 고려했을 때 사람들은 다양한 업무를 효율적으로 하기를 원하게 될 겁니다. 즉 한 번에 여러 업무를 처리할 수 있는 기기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는 거죠.”
“맞아요, 지금 전자회사들은 이미 은행들과 협력해서 핸드폰으로 은행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프로그램을 개발 중이고 거의 완성 단계에 있습니다.”
병수는 수혁의 말에 적극적으로 동의했다.
“단순히 뱅킹 서비스뿐만 아니라 앞으로 더 다양한 업무를 할 수 있게 하는 방향으로 개발이 이루어져야 됩니다. 화상회의나 일반 사무 등과 같이 일에 관련된 사항들도 처리할 수 있게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기술단계로는 많이 부족하지만 일리 있는 말이에요.”
병수는 그 뒤에도 이어진 수혁의 말을 경청했고 찬식을 포함한 다른 학생들도 그의 말에 빠져 들어갔다. 그리고 오직 명학만 굳은 얼굴로 테이블만 쳐다보고 있었다.
‘이 자식. 날 우습게 만들려고 일부로 그러는 거야.’
명학은 수혁의 말을 들을수록 그에 대한 적개심은 커져만 갔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멘토와의 시간은 마무리 되었고 학생회장은 다음 행사 진행을 계속했다.
“지금까지 멘토님들과 대화는 잘하셨습니까? 이제부터는 대화를 나누고 싶었지만 미처 인사를 못했던 교수님들과 선배들을 만날 수 있는 자리를 만들려고 합니다. 학생들은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선배들과 교수님들께 인사를 드리기 바랍니다.”
학생회장의 말이 끝나자 학생들은 테이블에서 일어나 자신들이 눈여겨 본 선배들에게 가서 인사를 드리고 대화를 나누었다.
수혁은 쉬고 싶었기 때문에 찬식에게 말하고 객실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 명학이 다짜고짜 시비를 걸었다.
“아까부터 되게 거슬리던데 조심해라.”
명학은 연회장을 나가려는 수혁을 붙잡고 말했다.
“뭘, 조심해?”
수혁은 싸늘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때 명학의 옆에 있는 남자가 대화에 끼어들어 그를 대변하듯 말했다.
“야, 너 뭐 좀 되냐? 명학이는 일송그룹 사람이야. 너 따위가 조금이라도 출세하고 싶으면 잘 보여야 되는 사람이란 말이야.”
“아 그래서 뭐? 별 시덥지 않은 이야기는 그만 해라.”
수혁은 마음 한구석에서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그래서? 말귀를 못 알아먹네. 야, 그만 하자 말이 안 통하는 놈이야.”
“능력이 없으면 유두리라도 있어야 되는데 참 불쌍하네.”
명학과 남자는 수혁을 노려보며 거드름을 피웠다.
“훗,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그러고 사냐? 어딜 가든 너희 같은 놈들은 꼭 하나씩 있구나.”
수혁은 냉소를 지으며 차갑게 말한 뒤 숙소로 돌아갔고 명학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건방진 놈, 저 자식 뭐하는지 나중에 알아봐야겠어.”
“그럴 필요 없어 옷 입은 것만 봐도 사이즈 나오는데 뭘.”
“하긴. 딱 봐도 천박한 녀석이야.”
명학은 사라져가는 수혁을 보며 비열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수혁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객실로 올라가는 중이었다.
‘역시 성인이 되니 돈이 힘이구나, 최대한 빨리 SH스터디 론칭에 힘을 써야겠어.’
수혁은 무례한 모습의 명학을 보면서 본격적으로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밤 학생들 간의 뒤풀이 자리가 있었지만 수혁은 객실에 남아 미래에 대한 계획을 구상하며 밤을 보냈다.
“수혁아 나중에 학교에서 보자.”
“그래.”
오티는 끝이 났고 학생들은 다시 버스를 타고 학교에 돌아왔다.
수혁은 간밤에 더 친해진 찬식과 번호를 교환하고 집에 돌아왔다.
아무도 없는 텅 빈 집에서 그는 사업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구상했다.
‘이거면 떼 돈을 벌 수 있지만 나한테는 자본과 기술이 없으니 무리겠지?’
수혁은 회귀할 때 가져온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며 고민을 했다.
처음에는 이 핸드폰을 전자회사 관계자에게 보여줘 돈을 벌어볼까 생각했지만 20년 후 미래의 첨단기술이 집약된 이 핸드폰을 보여주었을 때 생길 피곤한 상황들을 떠올리자 주저하게 되었다.
‘현재 수중의 돈이 3000만원 정도 되는데 이걸로는 온라인 강의사업을 할 수 없어.’
수혁은 지식인 협회에서 받는 정기적인 돈과 출간한 책들에서 나오는 인세로 돈을 벌기는 했지만, 온라인 강의 사업을 시작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는 개강까지 얼마 안 남은 시간동안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끊임없이 궁리했다. 그리고 며칠 후 드디어 개학날이 왔다.
* * *
첫 수업은 경영학 원론 수업이었는데 교수는 간단히 자기소개를 하고 앞으로 진행할 수업에 대해 간략한 설명을 한 뒤 수업을 마쳤다. 대학의 첫 주는 수강정정 기간으로 대다수의 수업들은 짧은 시간에 마무리 되었다.
“수업들은 벌써 다 끝났어?”
수혁은 마지막 수업을 마치고 막 경영관을 나오다가 우연히 유리를 마주쳤다. 그녀도 마침 수업이 다 끝나고 집으로 발걸음을 옮기려던 참이었다.
“응. 웬만한 수업들은 다 10분 안에 끝나더라고.”
“나도 그래. 후, 생각보다 허무하네.”
유리는 대학 첫 수업에 대한 기대를 잔뜩 한 상태였는데 생각보다 개학 첫날이 싱겁게 끝나자 기운이 없어 보였다.
“좀 걸을까?”
“그래.”
수혁은 유리에게 캠퍼스 산책을 제안했다.
그들은 아직 찬 기운이 조금 남아있는 초봄의 캠퍼스를 걸으며 대화를 나누었다.
한국대학교는 대한민국 최고의 학교답게 캠퍼스가 아주 넓었다.
캠퍼스는 조경이 아주 잘 되어 있어서 걷기에는 아주 그만이었다.
“저기 분수 좀 봐 진짜 예쁘다.”
유리는 학교 안에 설치된 인공분수대를 보고 감탄하고 있었다. 그녀는 캠퍼스의 풍경이 꽤나 마음에 드는 듯 했다.
“1학년이라서 조금 이른 질문일 수도 있는데 넌 이제 뭘 할 거야?”
유리는 한참을 걸으며 풍경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다소 진지한 주제를 꺼냈다.
“나는 사업을 할까 생각 중이야.”
수혁은 숨김없이 속내를 털어놓았다.
“나도 원래는 대학 와서 돈을 벌까 생각했는데 최근에 생각이 바뀌었어. 오티 때 시민단체에서 일하는 선배를 만났는데 정말 대단하신 분이더라고. 그 선배는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사법고시를 합격하신 분이셔.”
“우리 과에서도 종종 사시 합격자들이 나오지 않나?”
수혁은 사법고시 합격 사실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근데 그분은 돈을 벌기 위해서 법조인이 된 것이 아니라 법률적인 구조를 충분히 받지 못하고 있는 사회적 약자들을 도와주시는데 힘쓰시고 계시더라고. 선배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생각이 많이 변한 것 같아.”
“그렇구나.”
수혁은 유리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나는 경영학 말고도 사회복지학을 복수전공으로 해서 공부할까 해. 나중에 졸업하면 어려우신 분들을 많이 도와주고 싶어.”
“넌 잘할 수 있을 거야.”
수혁은 유리의 꿈을 응원해 주었다.
그들은 한동안 캠퍼스를 거닐며 대화를 나누다 저녁 어스름 무렵에 헤어졌다.
* * *
개강날로부터 2주가 지났다. 수혁은 그동안 학교에 다니며 열심히 수업을 들었다.
그는 대학 특유의 자율성을 느끼며 고교시절 때와 다른 자유를 느끼고 있었다.
‘전생에서 느껴본 거지만 오랜만에 대학에 오니 또 새롭다. 집이 먼 것만 제외하고는 괜찮은 것 같은데?’
수혁은 학교생활 중 불편함을 느끼고 있었다. 왜냐하면, 집과 대학이 거리가 상당하여 통학하는데 번거로웠기 때문이다.
그는 대학 근처의 원룸을 계약한 뒤 첫 주가 지난 시점부터는 원룸에서 통학을 했다.
‘오늘은 학교가 조금 시끄러운 걸?’
오전수업을 마치고 빠른 점심을 먹은 수혁은 학교 중앙에 있는 광장에 천막들이 쳐져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찬식의 말에 의하면 오늘부터 동아리 홍보기간이라고 했다.
많은 학생들은 각양각색의 콘텐츠를 가지고 자신의 동아리들을 홍보하고 있는 중이었다.
“여기는 테니스 동아리입니다. 공부에 지친 학우 여러분은 언제든지 환영입니다.”
“저희는 게임 동아리입니다. 게임에 관심 있으신 분들은 여기로 오세요.”
그들은 지나가는 학생들의 이목을 끌기 위해 적극적으로 동아리를 홍보에 나섰다.
수혁은 그들을 보며 오전에 있었던 찬식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수혁아 수업 몇 시에 끝나?”
“나? 수업은 일찍 끝나는데 오늘 지도교수님 면담이 있어서.”
“그럼 끝나고 동아리들 구경하러 가자.”
“응?”
“동아리 활동이 대학생활의 로망이잖아, 한 번 구경하러 가자.”
아침 수업 때 만난 찬식은 수혁에게 동아리 홍보를 구경하러 가자고 했다.
수혁은 내키지 않았지만 계속되는 부탁에 거절하지 못하고 같이 돌아다니기로 약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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