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승대는 밀물이 미치지 않는 해안가 근처에 자신이 가져온 간이텐트를 쳤다.
수혁은 옆에서 텐트 치는 모습을 보면서 요령을 익힌 후 그를 보조해주자 설치는 금방 끝났다. 그리고 승대는 해안가 뒤편에 펼쳐진 숲 안으로 들어가더니 나뭇가지와 갈색 풀들을 잔뜩 가지고 나왔다.
“그거는 뭔가요?”
수혁이 풀들을 보고 물었다.
“불을 피우려고. 밤이 되면 해안가는 제법 쌀쌀하거든 그리고 이것들을 태우면 이상하게 모기나 해충들이 잘 접근하지 않더라고.”
승대는 가져온 것들을 활용해서 불을 피웠고 수혁과 우진은 그곳에 둘러앉아 전투식량으로 저녁을 해결했다.
그들은 내일, 해가 뜨면 바로 움직이기로 결정하고 일찍 잠에 들었다.
승대는 뱀이 싫어하는 백반가루를 텐트 주변에 뿌려놓고 침낭 속으로 들어가 잠을 청했다.
“그럼 가볼까?”
새벽과 아침의 경계가 모호한 이른 시각, 이들은 탐사를 위한 도구들을 챙기고 길을 나섰다.
해변 밖에는 울창한 수풀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수혁은 정글 칼을 손에 쥐고 앞장서서 걸었다.
“그거 쓸 줄 알아? 보기보다 쉽지 않을 텐데?”
승대는 미심쩍어했지만 수혁이 능숙하게 풀을 쳐내는 것을 보고 이내 입을 다물었다.
“마을은 쉽게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이 섬에 산이 있기는 하지만 위치를 보면 산에다 마을을 세우진 않았어요.”
수혁은 지도를 살펴보고 있었다.
“사람들은 보통 거주할 곳으로 평야를 선호하지, 산은 개간하기도 쉽지 않고 해충들도 많아서 보통은 피하기 마련이야.”
우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들은 산을 오르지 않고 산 둘레 주변으로 탐사를 계속했고 생각보다 섬이 크지 않은 덕분에 금방 마을을 찾을 수 있었다.
“이쪽에 뭔가 있어요.”
수혁은 수풀을 헤치며 걷다가 목책을 발견했다.
목책은 마을의 울타리 용도로 세워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오랜 세월의 영향으로 나무는 거의 다 썩어서 형체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이럴 수가....... 마을이 진짜 있었어.”
목책을 따라 걷던 우진은 입구를 찾았고 눈앞에 펼쳐진 마을 터를 보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마을은 십여 호 수준으로 간신히 살아남은 소수의 귀족들이 가족들을 데리고 정착한 곳이었다.
“여기가 마을 창고였나 봐요.”
“건물의 양식을 보니까 고려 말에 지어진 것이 틀림없어.”
수혁과 우진은 낡은 가옥들을 지나 목제 건물 앞에 다다랐다.
“기둥과 서까래를 얹은 방식을 보니까 틀림없어. 이것들은 고려시대 양식의 가옥들이야 그런데 솜씨들은 형편없군.”
전문목수가 아닌 귀족들이 스스로 지은 탓에 건물들은 한 눈에 보아도 어설퍼보였다.
수혁과 일행들은 노동이라고는 해보지 않았을 그들이 생존을 위해 쏟았던 노력들을 마을 곳곳에서 느낄 수 있었다.
“이것 좀 보세요.”
수혁은 창고로 추정되는 건물 안에서 곡식을 담는 자루를 발견했다.
자루에는 곡식은 남아 있지 않고 부스러기만 조금 남아있었는데 이미 다 썩고 건조된 것들뿐이었다.
“집 안에 가재도구들이 조금 남아있네요.”
그들과 떨어져있던 승대는 폐가들을 살펴보다가 의자와 책상을 발견했다.
“고려 말부터 좌식생활을 하긴 했지만 많은 고려인들은 입식생활을 하였지. 저 의자와 책상은 옛 시대를 엿볼 수 있는 역사적 유물이네.”
우진은 감격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승대가 찾은 것들을 면밀히 살펴보고 있었다.
마을을 다 돌아본 수혁은 이들에게 다가와 용건을 말했다.
“제가 아직 말씀 못 드린 것이 있는데 칠부도의 위치를 알려 준 고려인이 집안의 가보를 따로 모아놨다고 합니다. 장소는 이 근처에 있고요.”
“그런 곳이 있었어?”
우진은 집안 곳곳에 있는 유물들을 정신없이 보고 있다가 뒤를 돌아 수혁을 바라봤다.
“가보라면 귀중한 물건일 확률이 높겠군. 어디다 숨겨놨을까?”
승대는 팔짱을 낀 채 골돌히 생각했다.
“지도를 봤을 땐 이 마을에는 없는 것 같고 산을 올라가야 할 것 같네요. 다행인건 저자가 지도를 상세하게 그려놔서 찾는 데는 크게 어려움이 없을 겁니다.”
“그래? 그럼 여기서 식사를 하고 출발하자.”
승대는 자신의 가방에서 전투식량들을 꺼낸 뒤 흔들어 보였다.
해는 어느새 중천에 떠 있었고 산을 타려면 에너지가 필요했기 때문에 그들은 밥을 먹고 이동하기로 했다.
“이쪽으로 오게. 이곳은 문화 유적지로 잘못하다가 훼손이라도 하면 벌금을 크게 맞는 다네.”
우진은 수혁과 승대에게 손짓을 했고 그들을 마을 가운데에 있는 우물가로 데려갔다.
“이것도 점점 물리네요.”
우물 옆에 자리를 잡은 수혁은 전투식량을 먹으며 말했다.
“슬슬 그럴 때도 됐지.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낫잖아.”
“옛날에 비하면 많이 나아졌지, 나 때는......”
우진은 옛 생각이 났는지 어려웠던 나라 사정과 끼니를 해결하기 힘들었던 지난날을 회상하였다.
‘괜히 말을 꺼냈어.’
수혁은 자신이 실수한 것을 깨달았지만 이미 말 보따리가 터진 우진은 한참동안 옛날이야기를 했다.
“교수님 말씀 잘 들었습니다. 이제 가볼까요?”
“그래요, 그만 일어나시죠.”
수혁은 대화가 예상보다 길어지자 적당한 타이밍에 말을 꺼냈다. 그러자 승대도 수혁의 의견에 동조하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우진은 아쉬워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끝내 일어나 그들의 뒤를 따라갔다.
“저거 혹시 무덤 아니야?”
마을을 나와 산을 타고 올라 간지 얼마 안 된 시점에 승대는 무언가를 발견하고 소리를 질렀다.
수혁은 정글 칼을 휘두르며 풀줄기를 쳐내다가 그의 말을 듣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오르막길이 계속되는 산언덕 중간에 비교적 평탄한 구간이 있었는데 거기에 10개가 넘는 무덤들이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죽으면 여기다 묻었나보군.”
우진은 공동묘지에 가까이 다가가 풀이 무성하게 자란 무덤을 손으로 만지며 말했다.
“무덤마다 나무로 비석을 세워놨군요.”
수혁은 각 무덤별로 세워진 나무비석을 발견했다. 세월에 으스러져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그 중에 몇 개는 비교적 깨끗하게 보존되어 있었다. 나무 비석에는 죽은 자의 본관과 이름이 적혀져 있었다.
“화려하게 살았던 귀족들이 나라가 망한 뒤 상상도 못한 외딴 섬에서 죽었을 때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승대는 왠지 모르게 마음이 먹먹해졌다.
“우리 다 같이 묵념하세.”
우진은 승대의 말을 듣고 손을 모은 뒤 고개를 숙여 묵념을 했다. 그리고 수혁도 우진을 따라 경건하게 묵념을 하다가 다시 길을 떠났다.
산은 그다지 높지 않았으나 섬의 대부분을 차지할 정도로 컸기 때문에 저자의 가보가 숨겨둔 곳을 찾는 것은 예상 외로 어려워 보였다.
‘하, 분명히 정상부근에 표시가 돼 있는데 도대체 어디 있지?’
수혁은 어느새 정상에 거의 다다랐지만 도무지 단서를 찾을 수 없었다.
‘책에는 분명히 정상 인근에 가게 되면 가보를 숨긴 곳이 어딘지 바로 알 수 있을 거라고 했는데......’
“수혁아, 아직 못 찾았어?”
우진은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는 수혁에게 물어보았다.
그는 아침부터 이어진 탐사에 많이 지친 상태였다.
“분명 여기 근처인데 도무지 찾을 수가 없네요. 잠깐 쉬고 계실래요? 제가 한 번 더 살펴보고 올게요.”
“난 교수님이랑 있을게.”
“네.”
수혁은 우진과 승대를 정상 부근에 있는 커다란 바위에 앉아서 쉬게 했다. 그리고 그들한테서 떨어져 근처를 뒤지기 전에 도움말을 켰다.
‘전에 산삼을 찾았을 때도 도움을 받은 적이 있는데 아는 게 있을지도 몰라.’
수혁은 도움말을 켠 후 가보가 어디 있는지 물어봤다. 그러나 도움말의 답변은 이전과 같이 단서를 주는 답변이 아니었다.
<사용자의 운은 최근에도 꾸준히 상승하여 어느새 25에 달하였습니다. 이 정도 운이면 굳이 우리의 도움이 없더라도 가보가 숨겨진 장소를 찾을 수 있을 겁니다.>
그는 목걸이의 영향으로 21까지 상승했던 운 스텟이 어떤 이유에선지는 모르겠지만 최근 몇 달 동안 더 오른 상태였다.
이는 사실 수혁이 만나는 사람들과 관련이 있었는데 그의 주변에 귀인들이 늘어나자 자연스럽게 운이 올라가고 있는 것이었다.
‘아 뭐야. 그냥 나보고 찾으라는 이야기잖아, 하. 막막하네.’
수혁은 위치가 표시된 곳 부근을 돌아다니며 단서를 찾아보았다.
사방은 온통 풀이 우거져있었기 때문에 올라올 때와 마찬가지로 계속 정글 칼을 휘둘러야 됐고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인내심은 점점 바닥이 나고 있었다.
‘진짜 못 해먹겠네.’
수혁은 정상 근처에 있는 언덕 밑에서 찾는 것을 포기하고 말았다.
그는 잠시 쉬려고 했으나 사방은 키가 크고 억센 풀줄기들로 가득했다.
“아휴 진짜.”
수혁은 베고 베도 끝이 없는 풀들에 질렸는지 애꿎은 풀줄기에다가 정글 칼을 휘둘렀다. 그런데 칼끝에 이상한 촉감이 느껴졌다.
‘뭐지?’
그는 풀줄기 뒤에 뭔가가 있는 것을 직감하고 정글 칼을 휘둘러 식물들을 걷어내었다. 그러자 토굴이 그 모습을 드러냈고 입구에는 오래된 나무판자가 막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드디어 찾았다.’
수혁은 토굴을 막고 있는 나무판자를 걷어내고 안으로 들어갔다.
꽤나 깊숙이 파져 있는 토굴의 중간중간에는 다 썩어가는 나무기둥이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토굴의 끝에 다다르자 뭔가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수혁은 가방에 들어있는 랜턴을 꺼내어 동굴 안을 비춰보았다.
‘이건 뭐지?’
토굴 안에는 책에서나 볼 수 있었던 보물 상자들이 여러 개 있었다.
수혁은 상자를 하나씩 열어보았다.
‘대박이다.’
수혁이 처음으로 연 상자 안에는 여러개의 고려청자들과 각종 장신구들이 있었고 다른 상자에는 고려시대에 유통되었던 동전들이 가득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상자에는 책이 한권 있었는데 확인해보니 망중록을 쓴 저자의 족보가 기록된 책이었다.
‘홧김에 휘두른 칼 덕분에 이곳을 찾다니 이게 어플에서 말하던 운의 영향인건가? 오랜 세월 자란 풀들만 아니었으면 글쓴이 말대로 쉽게 찾을 수 있었겠어.’
수혁은 엉겁결에 찾은 보물들을 바라보며 미소를 짓고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는 토굴 밖을 나와 다시 우진과 승대가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뭘 하다가 오는 거야? 이렇다가 늦겠다고.”
승대는 손목시계를 가리키며 말했다. 시간은 어느새 오후 4시를 가리키고 있었고 해의 위치는 눈에 띄게 낮아져 있었다.
“방금 전에 보물을 찾았습니다. 이제는 귀가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정말 잘됐구먼. 그런데 여기서 발견한 유적과 유물들은 어찌할 건가?”
“당연히 문화당국에 신고를 해야지요.”
우진의 질문에 수혁은 고민도 안하고 바로 대답했다.
“좋은 생각이야, 난 자네가 여기 있는 유물들을 개인 소장 할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는데 기우였구먼.”
잠시 대화를 나누던 그들은 수혁의 인도에 따라 토굴에 들어가서 보물들을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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