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우린 지금까지 온라인 매체를 통해서 광고를 했지만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유입하지 않았어요, 즉 신규고객한테는 얼마든지 개선된 우리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는 거죠.”
“그래, 이미 부정적인 인식을 갖고 계신 고객들보다 새로운 고객의 마음을 잡는 게 더 중요해.”
수혁은 SH스터디에 회생할 수 있는 희망이 있다고 생각했다.
“회사 이미지를 바꾸려면 뭐부터 해야 될까?”
“먼저 콘텐츠를 갖춰야죠, 그리고 이전보다 더 효과적인 홍보 방향도 찾아봐야 되고요. 회사 콘텐츠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뭐라 해도 우수한 강사진이에요. 이게 담보되어 있어야 SH스터디의 미래가 보장될 수 있어요.”
“어떻게 해야 하지? 하, 사방팔방 뛰어다녀도 좋은 강사 만나기가 쉽지 않을 텐데.”
“그 부분은 제가 생각해볼게요. 형은 우선 제가 말했던 서비스 조기 종료 건 잘 처리해주세요, 기존 1타 강사들 것은 현행 유지하되 서서히 종료하는 방향으로 해주시고요.”
“그렇게 하면 아예 서비스를 종료하는 거 아니야?”
찬명은 여태껏 쌓아온 것이 무너진다는 생각에 자기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
“그러니까 우수한 강사진을 하루빨리 갖춰야 되요. 지금 상태로는 회사 이미지만 나빠져요. 저 믿고 그렇게 진행해주세요.”
수혁은 단호한 얼굴로 거듭 말했다.
“알겠어.......”
힘없이 대답한 찬명은 속이 탄지 맥주만 마실 뿐이었다. 그날 밤 그들은 새벽이 다 되도록 술을 마셨다.
‘하루빨리 방법을 생각해야해.’
새벽 3시가 돼서야 찬명과 헤어진 수혁은 귀가하면서도 생각을 멈추지 않았다.
* * *
어느 금요일 오후, 수혁은 머리를 감싸 안고 대책을 강구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칸타빌레에 간 그는 컴퓨터를 켜고 여러 방법들을 모색해봤다. 그러나 회귀하기 전과 달리 유명강사들의 인적사항은 아직 제대로 공개된 상태가 아니었고 아무리 궁리해도 방법은 요원했다.
‘설득을 하려면 강사들에게 접근을 해야 되는데 어떻게 하지? 그리고 만약 만나게 되면 어떻게 제안을 하면 좋을까? 계약금을 왕창 줄까? 휴, 그러기에는 아직 돈이 부족한데......’
사무실 책상에 앉아 종이에 이것저것 끄적이며 다각도로 고민해 봐도 도무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하, 내 꼴 좀 봐라. 어플이 있으면 다 해결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지금 상황에서는 무용지물이네.”
수혁은 혼잣말을 하며 얄궂은 어플만 실행했다 껐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맞아!”
머릿속에 불연 듯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른 수혁은 갑자기 의자에서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다. 그는 어찌나 기뻤는지 호들갑을 떨며 서점을 돌아다녔다.
“한정길, 한정길, 그래 찾았어.”
수혁은 한 남자의 이름을 되 뇌이며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한정길은 그의 전생에서 M스터디라는 회사를 만들어 사교육계의 혁명을 일으킨 사람이었다.
그는 수혁이 하는 것과 같은 온라인 강의를 최초로 도입하여 사교육 시장을 평정한 인물이었다.
‘한정길 그 사람이 회사를 설립했을 때 인터뷰를 기억해보면 양질의 강의를 적절한 가격에 공급해서 성공을 원하는 학생들에게 공평한 기회를 제공하고 싶다고 했었어.’
수혁은 정길이 회사를 설립할 때 표방했던 가치관을 떠올렸고 어쩌면 그를 쉽게 설득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조건 영입을 해야 돼.’
그는 정길이 회사에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단순히 정길이 교육사업에 관한 수완이 뛰어나서가 아니었다. M스터디 설립 당시 그는 대치동에서 유명한 강사였다.
명성학원 같은 대형 학원에 속해있지는 않았지만, 어머니들의 입소문을 타 학생들은 서로 앞 다퉈 그에게 배우려고 했다.
‘한정길 대표는 본인 자체도 강의력이 뛰어나지만 더 중요한 것을 가지고 있어.’
오랜 시간 강남에서 활동했던 정길은 시원시원한 성격으로 많은 사람들과 친하게 지냈다. 그는 특히 강남 인근에서 일하는 유명 강사들을 많이 알고 있었고 인맥을 이용해서 학원 시장에 쉽게 안착할 수 있었다.
‘회사를 살리려면 한정길의 네트워크가 필요하다. 어떻게 하면 만날 수 있을까?’
수혁은 인터넷을 아무리 뒤져봐도 그에 대한 정보를 찾을 수 없었다.
‘내가 직접 대치동에 가서 찾아봐야 하나? 아니야, 그럴 필요 없겠어.’
고민을 하던 수혁은 대치동에 가려고 준비를 하다가 뭔가 생각이 난 듯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여보세요.”
“네 여보세요.”
“미희야.”
전화를 건 상대는 다름 아닌 이미희였다. 수혁은 그녀가 고등학교 시절 수많은 학원을 다녔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그는 어쩌면 단서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에 연락을 한 것이었다.
“번호 보니까 수혁이 네가 맞긴 한데, 믿겨지지가 않네? 너 나한테 전화한 건 처음인 거 알지?”
미희는 수혁이 자신에게 전화를 한 사실이 믿겨지지 않은지 살짝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게 일부로 연락 안 한 건 아니었는데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
미희의 말을 들은 수혁은 괜히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괜찮아, 나도 너한테 연락한 적이 없었는데 뭘. 그런데 무슨 일이야?”
“혹시 대치동에서 학원들을 다녀본 적이 있어?”
“응 당연하지, 고3때부터는 자율학습 빠지고 맨 날 대치동 가서 공부했는걸?”
“그럼 혹시 한정길 선생님이라고 알아?”
“잘 알지. 난 그분한테 과외도 받은 적이 있어. 사회탐구 위주로 가르치시는데 다른 과목들도 잘 가르치는 걸로 유명한 분이야.”
“혹시 그분이 일하는 학원 위치랑 연락처를 알 수 있을까?”
“응 알겠어, 거기가 어디냐면......”
미희는 정길이 운영하는 학원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그리고 개인연락처는 엄마가 알고 계셔서 물어보고 다시 연락 줄게.”
“응, 알겠어.”
잠시 후 미희는 문자로 정길의 핸드폰 번호를 보냈다.
수혁은 연락처를 받은 후 그에게 어떤 말을 하면 좋을지 고민했다.
‘2000년 상반기면 한정길이 대치동에서 두각을 드러낼 때야. 지금도 업계에서 유명한데 만약 거물이 되면 설득이 아예 안 될지도 몰라. 최대한 빨리 연락해야겠다.’
해야 할 말들을 정리한 수혁은 고심 끝에 그에게 연락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핸드폰을 꺼낸 그는 곧장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네, 여보세요.”
“한정길 선생님 맞으신가요?”
“네 맞습니다.”
수혁은 전화를 받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
“미희 소개로 번호를 알게 되어서 연락드릴 수 있었습니다. 괜찮으시면 잠깐 통화 가능할까요?”
“미희요? 아, 그 선민고등학교 다녔던 여학생 말씀하시는 거죠?”
“네, 맞습니다. 좀 늦었지만 자기소개부터 하겠습니다. 저는 강수혁이라고 합니다.”
“강수혁? 아! 작년 수능에서 만점 받은 학생 맞으시죠?”
수혁이 만점 받은 사실은 이미 서울 학원 계에서는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었다.
“무슨 일이시죠? 설마 재수를 하려는 것은 아닐 테고. 지인 분 과외를 구하시는 거면 지금은 힘듭니다. 최근에 학원 일이 너무 많아져서 현재 과외는 안하고 있습니다.”
“그게 과외나 학원 때문에 연락드린 것은 아니고 시간이 되시면 잠깐 만나 뵙고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 해서 연락드렸습니다.”
“흠, 제가 조금 바빠서 그러는데 다음에 연락드려도 되겠습니까? 기분 나쁘실 수 있겠지만 최근에 일이 정말 많거든요.”
정길은 한창 주가가 올라가고 있었기에 누군가를 만날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그는 수혁에게 돌려서 말했지만 사실상 거절을 했다.
“많이 바쁘신 거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염치불구하고 한 번만 만나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대학교에 들어와 일을 하나 하고 있는데 선생님의 도움이 간절히 필요한 상황입니다.”
“이봐요, 학생. 제가 좋게 이야기했잖아요. 미안하지만 다음에 보도록 하죠, 이만 끊겠습니다.”
정길은 더이상 대화의 필요를 못 느꼈는지 전화를 끊으려고 했다.
“선생님, 과거 오산에 계실 때 돈 없고 희망 없던 학생을 도와준 이야기를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습니다. 그 학생에게 그러셨던 거처럼 저에게도 한 번만 기회를 주십쇼.”
“아니, 어떻게 그걸......”
정길은 무명시절 대학을 졸업하고 강사로 길을 정한 뒤 잠깐 오산에 살았던 적이 있다.
그때 그는 가난하지만 꿈이 있던 학생을 알게 되었다.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일을 하던 학생은 상황이 열악했지만, 공부에 대한 열망이 강했다. 감명을 받은 정길은 그를 있는 힘껏 도와 명문대에 진학할 수 있게 만든 적이 있었다.
“저 정확하게 무슨 말씀이신지…….”
정길은 목소리가 전에 비하여 많이 누그러진 상태였다.
그는 수혁이 자신이 오산에서 했던 행동을 알고 있는지 확실히 확인해 보려고 했다.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인해 학업을 중단하고 생업에 뛰어들어야 했던 학생을 우연히 만나 돈을 받지 않고 검정고시부터 대학진학까지 도와주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학생이 아주 어렸을 때 있었을 일인데 누구한테 들으신 겁니까? 오산에 사셨던 적이라도 있습니까?”
수혁의 요구에 조금은 귀찮은 마음이 들었던 정길은 어느새 그에게 강한 호기심을 느끼고 있었다.
‘한정길이라면 내가 잘 알지,’
수혁은 과거 생에서 그가 쓴 자서전을 읽은 적이 있었다.
책에 보면 정길은 자신이 회사를 세운 이유에 대해 언급을 하는데 오산에서 있었던 일이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고 말했다.
수혁은 그 내용을 기억하고 이를 이용한 것이었다.
“오산에 살지는 않았지만 우연치 않게 선생님의 행동을 듣고 크게 감명받았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열정이 있고 꿈이 있지만, 그것을 실현하는데 쉽지 않은 상황입니다. 한 번만 저를 만나주십쇼. 만나서 들어보시면 선생님께서도 헛걸음은 아니었다고 생각하실 겁니다.”
“.......”
수혁은 다시 한번 간곡히 부탁했다. 그리고 한 동안 수화기 너머로 어떠한 말도 들리지 않았다.
정길은 수혁의 말을 듣고 마음이 흔들렸고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는 그 일에 대해서 누구한테도 언급하지 않았는데 누군가가 알고 있다는 사실에 놀란 상태였다.
“선생님, 단순히 저만 생각해서 만나자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선생님께서 어려운 학생을 도와줬을 때 느꼈던 그 감정들을 같이 공유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공정한 기회를 줄 수 있는 일을 함께하고 싶어서 연락을 드린 겁니다.”
‘안 되겠어. 직접 보고 판단해야겠다.’
수혁의 이야기를 들은 정길은 오산에서의 경험을 통해 세웠던 교육에 대한 가치관이 지속적으로 언급되자 그를 만나기로 마음을 먹었다.
“음, 알겠습니다. 그럼 돌아오는 일요일에 보는 걸로 할까요?”
“네 좋습니다. 제가 선생님 계시는 쪽으로 가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러면 그 날 뵙죠.”
용건을 마친 수혁은 전화를 끊었다.
그는 정길을 만났을 때 어떻게 대화를 나눌지 나름의 전략을 세웠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 이틀 후인 일요일이 되었다.
* * *
수혁은 대치동의 한 카페에서 약속시간 보다 먼저 나와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과거 한정길 선생의 발언들을 떠올려보면 이야기를 나누는데 큰 도움이 될 거야.’
주문한 커피를 마시지도 않고 한참을 고민하고 있던 그 때 낯이 익은 남자가 카페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는 한정길이었다.
이전 생에서 티비로 봤을 때 보다는 젊은 모습이었지만 수혁은 그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일전에 연락드렸던 강수혁입니다.”
수혁은 정길에게 다가가 공손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한정길입니다.”
정길도 수혁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그는 카운터에 가서 커피를 시켜 받은 뒤 수혁이 앉은 자리로 갔다.
“하하, 저의 내밀한 과거를 알고 계신 분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정길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속내를 솔직하게 밝혔다
- 88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