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만나 뵙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바쁘신데 귀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오는 길을 보니 날씨가 좋아서 괜히 기대가 되더군요.”
그들은 날씨라든지 근황과 같은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수혁은 슬슬 본론을 꺼내었다.
“제가 이 자리를 마련한 이유는 선생님과 공정한 세상을 만들고 싶어서였습니다. 사실 자질은 뛰어나지만 제대로 된 기회를 얻지 못하는 학생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맞습니다. 예전에 전화로 말했던 오산의 일도 그렇고 저는 강사 생활을 하면서 형편이 어려워 적절한 교육을 받지 못한 학생들을 숱하게 봐왔습니다.”
“선생님의 그런 현실 인식에 대해서 깊게 공감합니다.”
수혁은 정길의 이야기를 들으며 동의를 표했다.
“그런데 어떻게 공정한 세상을 만든다는 겁니까?”
“그건, 흠.......”
수혁은 핵심이 될 수 있는 질문을 듣자 잠시 뜸을 들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는 현재 SH스터디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인 학원이라고 생각하면 되지만 조금은 특별한 회사지요.”
“저도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인터넷으로 강의를 한다면서요? 최근에 저도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 회사 대표셨군요.”
정길은 SH스터디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아신다니 이야기가 편해지겠군요. 혹시 그러면 저희와 같이 일해보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선생님같이 실력도 있으시고 뜻이 있으신 분이 우리 회사와 함께하면 정말 좋을 것 같습니다.”
수혁은 조심스럽게 제안을 했다. 정길은 수혁의 말을 듣더니 잠시 생각에 잠긴 눈치였다.
“열악한 환경에 있는 수많은 학생들에게 양질의 교육을 제공하여 돈 있고 잘 사는 학생과 동등한 기회를 준다. 저는 이것이 공정한 사회를 만들어 가는데 밑거름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수혁은 과거 정길의 인터뷰를 떠올리며 열변을 토했다. 그리고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옳은 말씀입니다.”
정길은 침묵을 깨고 말했다.
“사실 최근에 일도 잘되고 돈도 벌 만큼 버는데 왠지 모르게 허전함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대표님과의 통화 이후 저를 돌아보게 되었고 오늘 또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니 마음이 뜨거워지네요.”
정길은 아까보다 더 진중하고 진지한 자세로 말했다.
“이야기가 되는 것 같아서 다행입니다. 저는 선생님을 우리학원 대표강사 겸 총괄이사로 모시고 싶습니다. 부디 우리 학원에 오셔서 많은 학생들에게 희망을 주시기 바랍니다.”
“좋습니다. 마침 지금 있는 학원과 계약 기간이 거의 만료되어 갑니다. 같이 일을 하는 방향으로 추진해보겠습니다.”
정길은 수혁의 제안에 처음으로 긍정적인 자세를 취했다.
“선생님같이 뛰어난 분을 모시게 되어서 다행입니다. 저는 선생님처럼 바른 가치관을 가졌거나 능력 있는 분들이 우리 회사에 더 계셨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수혁은 과거 정길이 강남에서 이름을 날리던 강사들을 규합해서 학원을 만든 것을 생각했다.
그는 본인 자체도 뛰어난 강사였지만 본인 못지않은 훌륭한 강사들과 끈끈한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었다.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오늘 밤부터 되는 대로 연락을 돌릴 생각입니다. 아마 적지 않은 강사들이 함께 움직일 겁니다.”
“총괄이사님 편한 대로 하십시오, 학원에 관한 전반적인 부분과 강사 영입에 관련된 것은 대부분 이사님에게 맡기겠습니다. 앞으로 학원 일을 논의하고 싶으시면 저나 박찬명 원장과 연락하시면 될 겁니다.”
수혁은 자연스럽게 정길을 총괄이사라고 부르고 있었고 그의 반응을 보니 거부감을 느끼지 않고 받아들인 듯했다.
“알겠습니다. 지금 있는 학원을 정리하고 바로 연락드리겠습니다. 앞으로 잘해봅시다.”
정길은 자리에서 일어나 수혁에게 악수를 청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수혁은 정길의 손을 잡고 악수를 하며 말했다.
성공적으로 미팅을 마친 수혁은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향했다.
‘내일부터 많이 바빠지겠어.’
그는 SH스터디가 처한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활로를 찾은 기쁨을 만끽하며 원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다음 날이 되었다. 수혁은 학교를 마치자마자 바로 노량진 회사로 갔다. 그는 이미 출근하여 일을 하고 있는 찬명을 불러 대화를 나누었다.
“강사 문제는 조만간 해결될 거니 더 이상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다행입니다. 뭔가 좋은 방법을 찾으신 모양이군요.”
오랜 기간 답답해하던 찬명은 수혁이 희망적인 이야기를 하자 기분이 좋아졌다.
“이제는 본격적으로 학원홍보에 나서야 할 것 같습니다. 인터넷으로 홍보를 했을 때와 달리 이번에는 학부모와 학생들을 만날 수 있는 자리를 만들려고 합니다.”
“어떤 걸 생각하고 계십니까?”
찬명은 어려운 문제에 직면할 때면 수혁이 묘수를 찾아낸다는 것을 알았기에 기대에 가득 차 물었다.
“이번 달 중순경에 대치동과 목동에 큰 세미나 실을 하나씩 예약하세요, 저는 학원 설명회를 열어서 고객들에게 다가가 적극적으로 홍보할 생각이에요.”
“좋은 생각이십니다. 우리가 목표하는 주요 고객층과 직접 만나보려고 하시는 거군요. 바로 알아보겠습니다.”
찬명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가 내놓은 대책에 감탄했다.
“세미나 실을 잡으면 공공기관에 연락해서 곳곳에 포스터를 부착할 수 있도록 하고 학원사이트 공지사항에도 설명회에 관한 공지를 올리세요. 학생들이 많이 오게 하려면 유인이 필요한데 뭐가 있을까요?”
수혁은 찬명에게 물어봤다.
“당장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설명회 참석자들에게 상품을 나눠주는 겁니다.”
“괜찮은 아이디어네요. 설명회 참석자들에게 온라인 강의를 무료로 수강할 수 있는 2주짜리 상품권을 지급하세요, 그리고 홍보내용으로 합리적인 가격과 실력 있는 강사진이라는 내용을 강조하시고요.”
“가격 같은 경우는 타 학원에 비해 40~50퍼센트 수준이라 문제가 없지만, 강사들의 실력은 어떻게 증명하죠?”
찬명은 확실하지 않은 정보를 함부로 홍보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중요한 질문이군요. 만약 누군가가 강사들에 대해 문의하면 그냥 강남 유명 강사진이고 자세한 것은 설명회 때 소개해준다고 하세요. 궁금증을 자극하면 더 많은 사람들이 올 수도 있으니까요.”
“그럼, 강남 강사진이라는 문구만 사용하고 자세한 사안은 기입하지 않겠습니다.”
“좋습니다. 그건 그렇고 예전에 이야기했던 강의들은 어떻게 처리했습니까?”
수혁은 지난번에 지시했던 사항에 관해서 물었다.
“실력이 미달된다고 판단되는 대부분의 강사들은 계약을 중단 했지만 몇몇 선생들이 강의를 끝까지 마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혀서 난항을 겪고 있습니다. 조만간 정리하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처리하세요, 설명회에 관심을 가진 고객들이 우리 사이트에 접속해서 질 낮은 강의를 접하게 되면 일을 망칠 수 있으니까요.”
“넵 알겠습니다.”
수혁은 그 뒤에도 설명회에 대한 디테일한 사항들에 대해서 지시를 했고 찬명은 여러 사안들을 자세히 메모한 뒤 일을 하러 자리로 돌아갔다.
‘이제는 연락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겠어.’
수혁은 정길의 연락을 기다리며 차후의 계획들을 고민했다.
* * *
6월의 어느 오후, 수혁은 한창 회사의 여러 업무들을 처리하고 있는데 갑자기 핸드폰이 울렸다.
그는 폰을 꺼내어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십니까 대표님, 저 한정길입니다.”
첫 만남을 가진지 3일이 지났을 무렵, 그는 약속대로 수혁에게 연락을 했다.
“네, 이사님 안녕하세요.”
“대표님과 헤어진 뒤에 잘 아는 강사들에게 연락을 돌렸는데 참여 의사를 밝힌 사람들이 생각보다 적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7명의 강사에게서 확답을 얻었고 논의 중인 강사들도 여럿 됩니다.”
정길은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저는 지금 홍보를 위해서 설명회를 열 계획을 짜고 있습니다. 6월 중순 경에 대치동과 목동에서 설명회를 열려고 하는데 어떻습니까?”
“좋지요, 학원바닥은 입소문이 중요합니다. 그중에서도 학부모들과 학생들의 평가가 학원 평판에 크게 영향을 미치지요.”
정길은 수혁의 의견에 적극적으로 동의했다.
“강사 분들 섭외가 어느 정도 진행되면 이사님을 포함해서 신규 강사님들을 만나고 싶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섭외를 마무리하고 자리를 마련하겠습니다. 안 그래도 강사들 중에 대표님을 뵙고 싶어 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래요?”
수혁은 강사들이 자신을 보고 싶어 한다는 소리에 호기심이 들었다.
“네 이렇게 좋은 취지로 학원을 운영하는 사람이 어디냐고 하면서 대표님에 대해 칭찬을 늘어놓더군요. 제가 대표님이 젊은 사람이라고 미리 언급은 했지만, 막상 봤을 때 20살 청년인 것을 알면 크게 놀랄 겁니다.”
정길은 호쾌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 후 이들은 설명회 일정에 앞서 미팅날짜를 조율하고 서로 격려를 한 뒤 전화를 끊었다.
‘일이 잘 풀리는 것 같아서 다행이야.’
수혁은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은 뒤 설명회 때 쓸 발표 자료를 만들기 시작했다.
‘먼저 PPT를 만들자, 설명에 도움이 되는 괜찮은 영상자료도 찾아야 돼. 휴, 또 한동안 바빠지겠군.’
수혁은 그날 밤 새벽이 다 되도록 사무실에 남아 작업을 했다.
* * *
새로운 강사진과의 첫 미팅 날이 되었다.
수혁은 말끔히 차려입은 뒤 일찌감치 사무실에 도착해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곧 들어올 겁니다. 강사들이 현재 건물 앞에 도착했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정길은 회사 회의실에 수혁과 함께 있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아, 그리고 제가 이사님한테 부탁드리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수혁은 자신의 서류가방에서 종이다발을 꺼냈다.
그것은 예전에 형석과 법무법인 사무실에서 만들었던 고용 계약서였다.
“자세히 안 봐서 모르지만 계약서 같군요.”
정길은 수혁이 꺼내는 종이다발을 쳐다보며 말했다.
“과연, 눈썰미가 좋으시네요. 오늘 미팅이 끝나면 강사들에게 이 계약서를 나눠주고 사인을 받아주세요. 계약 조건이 다른 학원들이 비해 나쁘지 않아서 거부감은 별로 없을 겁니다.”
“그 부분은 저한테 맡겨 주세요, 그런데 저는 따로 계약서를 쓰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이사님한테는 많진 않지만 일정량의 지분과 괜찮은 보수를 지급할 예정입니다. 그리고 이에 대해서 약정서는 작성할 예정이나 따로 계약서는 없습니다. 저는 이사님을 믿으니까요.”
수혁은 일전에 찬명에게 했던 것처럼 정길에게는 따로 계약서를 받지 않았다.
정길 정도의 인물이라면 쉽사리 사람을 배신할 것으로 보이지 않았고 무엇보다 그와의 관계는 계약보다는 신뢰로 쌓는 것이 훨씬 안전하다고 판단했다.
“하하 그렇게 해주시니 더 열심히 해야겠는데요.”
정길은 수혁의 그런 제안에 기분이 나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리고 잠시 뒤 노크소리와 함께 직원이 들어왔다.
“대표님, 지금 손님들이 도착하셨습니다.”
“다들 이쪽으로 모시세요.”
수혁은 직원에게 말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열다섯 명의 강사들이 회의실로 들어왔다.
“생각보다 많이들 와주셨네요.”
많은 강사들로 가득 찬 회의실은 꽉 찬 느낌이 들었다. 정길이 데려온 강사들을 보니 이전 생에서도 이름을 날렸던 강사들이 많이 있었고 낯이 익지 않은 사람들도 중간 중간 눈에 띄었다.
‘뭔가 이전 생의 기억과 약간 다르긴 한데.’
수혁이 처음 보는 사람들은 정길이 예전부터 유심히 지켜보던 신인 강사들이었다. 이들은 유명세는 부족했지만 강의력이 뛰어나 정길이 설득하여 데려온 사람들이었다. 예전부터 그는 강사를 보는 안목으로 유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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