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그러면 나랑 오랜만에 성욱이나 보러갈까? 그 친구가 밥이나 먹으러 오라고 연락이 와서 말이야.”
“할아버지 친구 분이십니까?”
“예전에 양주에 가서 사주도 보고했던 거 기억 안나? 임 선생 말이야, 옆에는 소영이라고 수제자도 한 명 있었잖아.”
성욱은 일전에 수혁이 운에 대하여 고민했을 때 평우가 소개시켜줬던 인물이었다.
한 번 만났을 뿐이고 벌써 2년 전의 일이었기에 수혁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
“아, 누군지 기억납니다. 어르신은 잘 지내십니까?”
“그 친구야 뭐 항상 그대로지. 목소리도 여전히 크고 기력도 어찌나 왕성한지 받아주기가 힘들 정도야. 가끔 네 안부를 묻고는 했는데 같이 오면 좋아할 거야.”
“저도 좋습니다. 시간도 거의 다 됐는데 가 볼까요?”
수혁은 평우를 데리고 사무실 밖을 나왔다.
“수혁아 잠시만 기다려라.”
평우는 핸드폰을 꺼내 기사에게 연락했다. 잠시 후 검은색 세단이 예전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앞에 나타났고 이들은 차에 탑승했다. 그리고 평우가 기사에게 몇 마디 말을 하자 차는 곧 양주로 출발했다.
서울 시내를 빠져나와 외곽도로를 진입을 하자 수혁은 옛 추억에 빠져들었다.
‘어르신을 찾아뵙을 땐 한창 조성준에 대해서 신경 쓸 때였지, 그 이후로 많은 일이 있었구나.’
수혁은 창문 밖으로 보이는 낯익은 풍경들을 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곧 양주 근처에 있는 산에 도착한 그들은 산길을 따라 성욱의 저택인 운월당으로 갔다.
“다 도착했다. 저 집 기억나니?”
평우는 차에서 내린 뒤 손가락으로 한옥 집을 가리켰다.
“네 예전 모습 그대로네요.”
수혁은 한옥을 보자 과거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들은 저택 인근에서 내린 뒤 대문으로 걸어갔다. 평우는 대문을 두들기려는 하는데 갑자기 문이 열리더니 한 여인이 나타났다.
“어르신 오셨습니까. 안에서 선생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녀는 성욱의 제자인 소영이었다.
단정하게 한복을 입고 수혁과 평우를 맞이하러 온 모습이 이전과 똑같았다.
“이 아이를 기억하는가? 2년 전에 한 번 들린 적이 있었는데.”
“네, 기억이 납니다. 그때는 학생이었던 것 같은데 세월이 참 빠르군요.”
소영은 수혁을 알아보았고 그는 말없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그녀는 간단한 대화를 나눈 뒤 그들을 별채로 안내했다.
“손님이 와 있나?”
평우는 소영에게 물었다. 별채 안에서는 성욱의 목소리 외에도 다른 남자의 목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네, 현재 일엽스님이 와계십니다.”
“허허 일엽이가 와있어? 반가운 이름이야. 수혁아 친구가 한 명 더 있는데 불편하지 않겠어?”
평우는 일엽이 왔다는 이야기를 듣자 반가워하며 수혁의 기분을 살폈다.
“네, 괜찮습니다.”
“다행이군.”
수혁은 괜찮다는 의사를 밝혔고 그들은 별채 안으로 들어갔다.
“아니 이사람 점심을 먹자고 해놓고 지금 몇 시 인가?”
성욱은 일엽과 마주 보고 대화를 하다가 수혁과 평우가 들어오는 것을 발견했다.
그의 큰 목소리와 호탕한 성격은 시간이 지났어도 여전했다.
“수혁이랑 같이 오느라 좀 늦었어. 알아보겠어? 자네가 예전에 점사를 봐준 적이 있잖아.”
“하하하 당연하지, 그건 그렇고 일이 잘 풀리는 모양이야, 얼굴의 기색이 좋고 안광에 힘이 뻗치는 게 무슨 일이든 잘 되겠어. 신기하구먼, 그새 또 관상이 변하다니.”
성욱은 예리한 눈빛으로 수혁을 쳐다보며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선생님 오랜만입니다. 일전에 귀한 말씀 듣고 다시 찾아뵈려고 했는데 많이 늦었습니다.”
수혁은 성욱에게 인사를 하고 옆에 스님으로 보이는 일엽에게도 인사했다.
“스님 안녕하세요.”
“하하 나는 무슨 꿔다놓은 보릿자루 알았는데 젊은 청년이 먼저 알아봐 주는구먼.”
일엽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성격도 급하기는 자네한테도 소개를 하려고 했어. 그런데 무슨 일로 여기에 있는 거야?”
평우는 일엽에게 물었다.
그는 승복 대신 작업복을 입고 있었는데 성욱의 집에 찾아온 이유와 관련이 있어 보였다.
일엽이 평우의 질문에 답을 하려는 순간 성욱은 소영을 부르기 시작했다.
“소영아 여기 상 좀 차려라, 벌써 1시가 넘었어. 다들 시장 할 테니 자세한 이야기는 밥 먹으면서 하자고.”
“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소영은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성욱의 말을 듣고 부엌으로 상을 차리러 갔다. 그리고 잠시 후 전통 한식의 방식으로 차려진 맛있는 밥상이 나왔다.
“술 좋아하는 친구가 무슨 일로 밥만 먹는가?”
평우는 성욱과 술잔을 기울이다가 일엽에게 물었다.
수혁도 이제 성인이 되었기에 가볍게 술을 마시고 있었다.
“나는 조금 있다가 일을 해야 되서 그러네.”
“일? 무슨 일 말인가?”
평우는 궁금한 듯 물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성욱이 대신 대답했다.
“이 친구가 이래 봐도 장승명인 아닌가? 내가 우리 집에 와서 장승 좀 만들어달라고 부탁 좀 했어.”
“아, 그래서 이 친구가 여기에 있는 거구만.”
평우는 이해가 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일엽은 스님임과 동시에 인간문화재이기도 했다.
그는 어떤 이유로 중년의 나이에 뒤늦게 스님이 됐는데 젊었을 때는 장승을 잘 만드는 것으로 유명하여 국가에서 전승지원금을 받는 인간문화재로 선정됐었다.
“허허, 이 친구가 최근 몇 달 동안 내가 있는 절에 틈만 나면 찾아와서 밥도 먹이고 그러는 것 아니겠는가? 속셈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런 이유일 줄은 생각도 못 했지.”
일엽은 너털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이 산이 음기가 강한 편인데 가끔씩 꿈자리가 사나울 때가 있더라고. 내 나름 산의 기운을 누를 방도를 생각해봤는데 장승이 터의 기운을 누르는 데는 그만이거든. 그래서 이 친구한테 부탁을 좀 했지.”
성욱은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했다. 수혁은 그들의 대화를 차분히 듣고 있는데 갑자기 어플이 활성화 되면서 퀘스트 창이 그의 앞에 떴다.
‘잊을 만하면 퀘스트가 발생하네.’
수혁은 이번에도 별 고민을 하지 않고 퀘스트 내용을 확인했다.
<사용자에게 히든퀘스트가 발생했습니다. 일엽을 도와 장승을 만드시오.>
퀘스트는 일엽과의 만남을 통해서 생성된 것이었다.
수혁은 마침 일정도 여유로운 편이었기 때문에 단번에 퀘스트를 수락했다.
“여기 와서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르네. 산에서 동백나무를 찾는 것부터 기본이고 이틀 동안 톱이랑 대패로 나무를 다듬었어. 휴, 이곳에 온 지도 벌써 5일 째야.”
일엽은 쓴웃음을 지으며 평우에게 말했다.
“내가 다 미안하구먼. 나이도 적지 않은 자네를 이 뜨거운 여름날 일을 시켰으니 말일세. 허참 사례를 하겠다니까 그것도 안 받는다고 하고.......”
성욱은 평소 보여줬던 쾌활한 성격과 어울리지 않게 일엽에게 미안한 기색을 보였다.
“친구한테 무슨 돈을 받는가? 그냥 날이 더우니까 기력이 조금 달려서 그렇네. 나무는 거의 다 다듬었으니 이제 밑그림을 그리고 조각을 해야 되는데 빨리 끝낼 수 있을까 걱정이야.”
일엽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우리도 이제는 몸을 조심해야 되는 나이야. 무리하지 말고 천천히 하게.”
평우는 일엽을 바라보며 말했다.
“제가 도와 드리면 어떨까요? 마침 제가 예술에 관심이 있어서 그림이나 조각을 즐기는 편이거든요.”
수혁은 원래 예술에 관심이 없었지만 퀘스트를 위해서 거짓말을 했다.
일엽을 돕기 위해서는 그의 허락이 필요한데 경험이 미천하다고 하면 그와 함께 일하는 것이 허사가 될 확률이 높았기 때문이다.
“정말이냐? 수혁아. 그거 잘 됐구나. 그러면 오늘만 내 친구 일 좀 도와주거라. 나이도 있는데 고생하는 것 같아서 걱정이야.”
평우는 수혁의 말을 듣고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건 안 될 말이야. 시간이 얼마나 걸리더라도 작품을 만들 때는 심혈을 기울어야 돼. 장승 제조는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한 작업이야.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일반 조각하는 사람들하고 다른 방식으로 일하기 때문에 안 되네.”
일엽은 수혁의 실력이 파악되지 않은 상황에서 같이 작업을 하는 것이 영 못 미더웠다.
“스님, 제가 비록 장승을 만들어보지는 않았으나 가르침을 주시면 옆에서 따라 할 정도는 됩니다. 기회를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수혁은 만능도구 이용 프로그램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잘할 자신이 있었다.
“내가 보증하겠네. 수혁이를 옆에서 몇 번 지켜봤지만 허언을 하는 아이가 아니야. 나도 고서를 보관하는 사람으로서 의심한 적이 있었지만, 수혁이는 자신의 실력을 여지없이 증명해 보였네. 어찌 보지도 않고 사람을 판단하는 건가?”
수혁에 대한 신뢰가 깊은 평우는 일엽을 설득하려고 노력했다.
“내가 저 아이 솜씨는 판단 못 하겠으나 하나 확실한 것이 있어. 저 친구는 지금 진심으로 자네를 도와주려하고 있고 자신감도 넘쳐 보이네, 허세를 부릴 사람은 아니다 이 말일세.”
성욱도 옆에 있다가 평우의 말을 거들고 나섰다.
“허허, 이 사람들이 그렇게 한다고 될 문제가 아니라니까.”
“내 말 믿고 한 번만 같이 일 해보게. 거짓말 할 애가 아니래도.”
일엽은 손을 저으며 거절의 의사를 밝혔으나 평우는 친구가 걱정되어 거듭 말했다.
‘허참, 다들 알지도 못하면서 왜 이렇게 말들이 많은지. 저 친구한테 기회를 줘야 되나?’
일엽은 이들의 말에 뭐라 항변하려 했으나 곧 마음을 다잡고 입을 열었다.
“말들이 통할 것 같지 않으니 어쩔 수 없군. 그러면 먼저 테스트를 해봐야겠어.”
일엽은 품속에서 여러 차례 접힌 한지를 꺼냈다.
“상을 치우게.”
“알겠네.”
일엽은 성욱에게 상을 치워달라고 부탁했고 잠시 뒤 소영이 와서 상을 내갔다. 그리고 그는 한지를 바닥에 펼쳤다.
커다란 한지에는 장승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이보게, 여기 이만한 종이 하나 더 있는가?”
“잠시만 기다려보게.”
일엽은 성욱에게 종이를 부탁했고 그는 창고에 가서 커다란 한지 하나를 꺼내왔다.
일엽은 한지를 처음 꺼낸 종이 옆에 똑같이 펴고 수혁에게 말했다.
“이 장승 그림을 똑같이 그려보게. 나무에 대고 그리는 거랑은 다르지만 기본적인 실력을 파악하는 데는 이만한 것이 없지.”
장승을 조각하기 전에는 나무에다 스케치를 먼저 하는데 일엽은 우선 수혁의 스케치 실력을 확인하고자 했다.
“그럼 바로 그리겠습니다.”
“잠깐만.”
테스트 내용을 확인한 수혁은 붓을 쥐고 그림을 그리려 했다. 그 순간 일엽은 뭐가 못마땅한지 수혁을 만류했다.
“어차피 나무에 그릴 때는 붓이 아니라 연필로 그리니까 연필을 사용하여라.”
일엽은 심이 두꺼운 연필을 하나 주었다.
“괜찮습니다. 스님께서도 붓으로 그림을 그렸으니 저도 똑같이 하겠습니다.”
“나중에 딴소리 하지 말게.”
“네.”
수혁은 자신 있게 붓을 들었다.
통상적으로 같은 그림이라도 연필보다는 붓으로 그리면 더 어려운 법이다. 그러기에 일엽은 수혁을 말렸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도구를 가릴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붓에 먹을 묻힌 다음 막힘없이 그림을 그려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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