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거침이 없네 그려.”
“조용히 하게. 집중하는데 방해 되니까 말이야.”
성욱이 그림에 열중하는 수혁을 보고 논평을 하자 평우는 그를 조용히 시켰다.
일엽은 그들의 대화는 무시한 채 수혁의 그림을 관찰하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지나자 그림이 완성 되었다.
“그림 실력은 이만하면 됐어. 훌륭해.”
일엽은 수혁이 그린 장승을 세밀하게 살펴보며 말했다.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자네가 그린 그림과 똑같지 않은가?”
평우는 일엽의 그림과 수혁의 그림을 번갈아 보면서 말했다. 성욱도 수혁의 솜씨에 혀를 내두르고 있었다.
“그럼 다음으로 가지.”
“뭘 또 하려고?”
일엽이 다음 과제를 언급하자 평우는 궁금해 하며 물었다.
“나무에 그림을 그리는 것은 장승을 만드는 과정에서 시작일 뿐이야. 조각을 제대로 할 줄 알아야 자격이 있다고 볼 수 있겠지. 따라오게.”
일엽은 수혁에게 눈짓을 한 뒤 별관 밖으로 나갔고 그들의 뒤를 평우와 성욱도 따라나섰다.
“이걸로 내가 만든 장승을 만들어보게.”
일엽은 현재 일하고 있는 작업실에 데리고 간 다음 대패질이 된 작은 나무토막을 건네주었다. 그리고 자신이 조각한 장식용 장승을 수혁에게 보여주었다.
“아니, 이 사람. 뭐를 알려주고 시켜야 하지 않겠어? 장승 조각을 안 해본 아이에게 너무 무리한 요구를 하고 있지 않은가?”
평우는 터무니없다는 투로 일엽을 쏘아붙였다.
“방법을 알려주지. 네가 들고 있는 나무에 장승을 그린 다음 조각을 하면 된다. 단 칼은 이것을 쓰거라.”
일엽은 여러 조각칼이 들어있는 가죽 함을 열어 보여주었다.
“네가 들고 있는 정도의 나무 크기면 이것을 쓸 필요는 없을 거다.”
일엽은 한눈에 보아도 날이 상당히 큰 조각칼을 들었다. 그는 칼을 3개를 꺼낸 다음 차분히 설명했다.
“우선 나무에 대강의 형상을 새길 때는 이것을 쓰고 얼굴의 부위를 조각할 때는 이 칼을 그리고 글자를 새길 때는 이것을 써라.”
일엽은 설명에 따라 각기 다른 칼들을 수혁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너무 대충 설명하는 것 아닌가? 허참.”
“아닙니다. 충분히 알아들었습니다.”
평우는 다시 한번 불만을 토해냈지만, 수혁은 일엽의 말을 금세 알아듣고 나무 위에 스케치를 먼저 했다. 그리고 알려준 방법대로 조각을 시작했다.
“아니, 이럴 수가......”
스케치하는 것을 볼 때만 해도 무덤덤한 표정을 지어 보였던 일엽은 수혁이 거침없이 나무를 파 내려가자 놀라움을 감추지 않았다.
“한눈에 보아도 엄청난 속도구먼 잘하고 있는 건가?”
옆에 있던 성욱이 일엽에게 물었다.
“지금 저 친구가 들고 있는 조각칼은 일반적인 조각칼보다 손잡이가 뭉뚝하고 두꺼워 많이 쓰지 않는 칼이라 일반 사람은 다루기 어렵다네. 근데 저 친구는 자유자재로 조각칼을 사용하고 있어.”
“허허, 그게 가능한 일인가?”
일엽의 말을 들은 성욱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30분이 지나자 수혁은 어느새 작은 장승의 얼굴부분을 조각하고 있었다. 그때 일엽이 말했다.
“멈춰라! 그만하면 나랑 같이 일할 만 하다.”
“네 알겠습니다.”
수혁은 일엽의 말에 조각칼을 내려놓고 작업을 멈췄다.
“어디서 장승 만드는 법을 배운 적이 있어?”
“배운 적은 없으나 스님이 깎아 만든 장승을 어떻게 조각을 하는지 유추해보았습니다.”
“대단하구나.”
일엽은 수혁의 말에 감탄했다.
수혁은 도구 이용 프로그램과 높아진 통찰력을 활용해서 작은 장승의 결을 보고 어떻게 조각을 했는지를 금세 파악하고 그대로 조각한 것이다.
“바로 작업을 시작하지. 이 아이의 조각속도는 나보다도 훨씬 빠르군, 어쩌면 금방 끝날 수도 있겠어. 따라와라.”
“네.”
일엽은 수혁을 자신이 지금까지 다듬어 놓은 커다란 동백나무 앞으로 데려갔다.
“얼마나 걸릴 것 같나?”
일엽은 나무를 보여준 뒤 수혁에게 물었다.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반나절이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수혁은 나무를 보고 시간을 가늠해보았다.
“자네가 보여준 실력과 속도면 충분하지. 그러면 작업에 바로 들어가자. 자네들은 날이 더우니 안에 들어가서 쉬고 있어. 나는 여기서 이 아이와 조각을 하고 있을 테니.”
“알겠네, 그러면 좀 있다가 보지.”
평우와 성욱은 별관 안으로 들어갔다.
“이번에는 좀 더 큰 칼을 이용해야 해. 이 칼들을 써 봐.”
성욱은 보관함에 들어있는 조각칼들 중 가장 큰 칼 4개를 주었다.
“방법은 굳이 설명 안 해도 되겠지? 어차피 원리는 앞선 조각한 장승과 다를 것이 없어. 단지 사이즈가 좀 더 커졌을 뿐이야.”
“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그러면 자네는 이 나무를 조각하게. 나는 조각하던 나무가 이미 있으니 그쪽을 먼저 작업 하겠네.”
“넵.”
일엽은 수혁에게 작업을 지시한 뒤 작업을 하고 있던 나무 옆으로 가서 조각을 시작했다. 그 사이 수혁은 연필을 든 다음 나무에 스케치를 했다.
‘이제 제대로 한 번 해 볼까?’
스케치를 마친 수혁은 가장 큰 조각칼을 들어 나무 테두리를 거침없이 파내려 갔다.
작업에 집중한 그들은 시간의 흐름도 잊은 채 조각에 몰두했고 해는 어느새 저물어 가고 있었다.
“이 사람들아 벌써 7시야. 밥들은 먹고 해야지.”
별관에서 기다리던 평우는 작업실로 와 수혁과 일엽에게 말했다.
“할아버지 잠시만요. 지금 거의 다 끝났어요.”
수혁은 장승의 얼굴 조각까지 끝내고 글씨를 파고 있는 중이었다. 일엽은 수혁의 작업속도에 다시 한번 놀랐다.
“천재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말이었구먼, 조금만 기다리지 곧 있으면 끝날 것 같아.”
일엽은 체력이 떨어지고 허기가 져 작업을 멈추고 평우와 함께 수혁을 기다렸다. 그리고 30분 후 수혁은 장승 하나를 조각해 내었다.
“많이 기다리셨죠? 들어가서 식사하시죠.”
수혁은 선반 위에 있는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말했다.
“염치없지만 난 아직 조금 남아있네. 얼굴은 완성했으나 글씨는 이제 막 새기고 있는 중이야.”
일엽은 머리를 긁으며 멋쩍게 말했다.
“식사하고 와서 바로 도와드릴게요. 피곤하실 텐데 들어가죠.”
수혁은 일엽과 평우와 함께 별관으로 돌아가서 저녁을 먹었다. 맛있게 차려진 저녁을 다 먹자마자 다시 작업실로 와서 일엽이 작업하고 있던 장승에게 다가가 글씨를 파내려갔다.
“난 딱히 할 일이 없겠어.”
“그러니까 내가 믿어보라고 하지 않았나?”
식사를 마친 일엽과 평우 그리고 성욱은 작업을 하는 수혁의 옆에 서서 그를 지켜보았다.
밤은 깊어져만 갔고 밤 11시 30분 쯤 되었을 때 수혁은 작업을 마쳤다.
“모두 끝났습니다. 이제 들어가서 쉬셔도 됩니다.”
수혁은 손으로 땀을 훔치며 말했다.
“아직 끝나지 않았어. 조각이 다 된 장승에 도료로 칠을 해야 하는 작업이 있네. 그리고 각진 부분들은 정밀하게 다듬어야 되고.”
“도료를 이용해서 칠하는 법을 알려주십쇼. 제가 밤을 새서라도 다 하겠습니다.”
수혁은 아직 체력이 많이 남았기에 오늘 안에 작업을 마무리하려고 했다.
“됐네, 나머지는 내가 해도 충분해. 힘이 많이 들지도 않고 그나마 제일 간단한 작업이니까.”
일엽은 엷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 수혁아 오늘은 이만 하고 그만 돌아가자. 벌써 밤이 늦었다.”
평우가 수혁에게 말했다.
“오늘 밤은 늦었으니, 여기서 다들 자고 가. 자동차로 이동한다고 하지만 산의 밤길은 위험하다고. 내일 아침에 일찍 출발하게.”
성욱은 수혁과 평우에게 말했다.
“네, 알겠습니다.”
수혁은 그날 밤 한옥에서 자고 가기로 결정했다. 평우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기사를 불러 성욱에게 잠자리를 부탁했다.
“소영이가 안내해 준 방에서 자도록 해.”
성욱은 먼저 안채로 들어갔고 소영은 평우와 수혁을 객실로 안내했다.
그날 밤 수혁은 침대 옆 창가에 커다랗게 보이는 보름달을 구경하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잠에 들었다.
다음 날이 되었다. 수혁은 아침을 먹은 뒤 서울로 가기 위해 평우와 함께 주차해 놓은 자동차로 향했다.
성욱은 멀리 나오지 않았고 일엽만 홀로 나와 그들을 배웅했다.
“조심히 들어가. 다음에 또 볼 날이 오겠지?”
일엽은 평우를 보며 아쉬운 듯 말했다.
“무슨 생이별을 하는 사람처럼 말을 하나? 건강관리나 잘하게, 조만간 다시보지.”
평우는 덤덤하게 대꾸했다.
“수혁이라고 했지? 어젯밤은 너무 늦어 말을 미처 못 했는데 자네 혹시 인간문화재 이수자가 될 생각은 없나?”
일엽과 같은 인간문화재는 전수자라고 해서 전통문화 보존을 위해 누군가에게는 자신의 기술을 전수해야 했다.
전수자에게 기술을 전수받은 자를 이수자라고 하는데 일엽은 수혁을 이수자로 만들고 싶었다.
“현재도 하는 일이 많아, 그러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수혁은 사업에 열중하고 싶었기 때문에 다른 무언가에 에너지를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인간문화재라고 해서 그렇게 바쁜 건 아니야. 나 보면 모르나? 스님을 하면서 전수자로서 활동도 하고 있지 않은가?”
일엽은 다시 한번 수혁을 설득하려고 했다.
“거 참. 수혁이가 죄송하다고 하지 않는가? 아이가 불편할 테니 그만하게.”
평우는 대화를 지켜보다가 일엽에게 일갈했다.
“크흠, 자네 말을 듣고 보니 내가 실례를 저지른 것 같군. 내 그만 말 하지. 조심히 들어가고 기회 되면 나중에 또 보세.”
일엽은 평우의 말을 듣고 생각을 거두어 들였다.
그들은 짧게 인사를 주고받은 다음 헤어졌고 곧바로 차에 탔다. 기사는 시동을 걸어 출발을 하였고 수혁은 바깥 풍경을 바라보며 상념에 잠겼다.
‘어제 하루 동안 많은 일이 있었어. 휴, 이렇게 가끔 밖에 나와서 기분 전환하는 것도 좋은 것 같아.’
사업에만 매달려 다른 것들을 잊고 지냈던 수혁은 다른 일에 집중을 하면서 스트레스가 많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평우는 피곤한지 옆자리에서 자고 있었다.
수혁은 다시 창 바깥을 구경하고 있는데 갑자기 퀘스트 창이 활성화 되었다.
<히든 퀘스트를 완료하였습니다. 보상으로 정신력과 운이 각각 2씩 올랐습니다.>
수혁은 화면을 통해 오른 스텟들을 확인한 후 창을 종료했다.
‘조각을 할 때 끊임없이 집중을 했는데 그것이 정신력을 올리는데 도움이 되었나 봐. 그런데 운은 왜 올랐을까?’
수혁은 평소 하던 대로 스텟이 오른 이유에 대해 생각을 하며 차 속에서 시간을 보냈다.
얼마 있지 않아 차는 서울에 도착했고 그들은 간단한 인사를 나눈 뒤 헤어졌다.
노량진에서 내린 수혁은 사무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셨습니까? 대표님. 안 그래도 연락을 드리려던 참이었습니다.”
직원은 수혁이 사무실에 들어오자마자 헐레벌떡 다가왔다.
“무슨 일이라도 있어요?”
“네. 어제저녁에 신문사에서 기자가 왔었습니다. 최근에 우리 회사가 교육사업으로 빠르게 성장하는 것을 주목하고 취재하기 위해서 왔다고 합니다.”
“신문사에서요?”
수혁은 언론사에서 취재가 왔다는 말을 듣자 고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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