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내일부터 노량진으로 나와.”
“네, 선배님.”
찬명은 알음알이 동아리 방에서 후배들과 이야기하고 있었고 수혁은 같이 회사를 가기 위해서 기다리고 있었다.
“학원 학습교사 정도는 직원들 시켜서 뽑으면 되지 않나요?”
수혁은 후배들이 나간 것을 확인한 뒤 입을 열었다. 학습교사는 학생들이 모르는 문제가 있으면 알려주는 보조 교사역할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래도 학원 연지 얼마 안 됐는데 학습교사도 신중하게 뽑아야지. 겸사겸사 동아리 후배들도 도와주고.”
찬명은 말했다.
“하긴 한국대학교 학생이 학습교사라고 하면 우리 학원에 나쁠 건 없죠.”
수혁은 그의 말에 동의했다.
“그건 그렇고 이제 너한테 반말하는 게 너무 어색한데?”
“저는 분명히 편하게 하라고 말씀드렸어요.”
“공과 사는 엄격히 구분을 해야지. 저기, 택시 온다.”
택시를 탄 수혁과 찬명은 학교를 빠져나와 바로 노량진으로 갔다. 이날 오후에는 임직원 회의가 예정되어 있었다.
“신규 고객들의 온라인 강의 수강과 새로 오픈한 학원에서 나온 수익 덕분에 8월 한 달 동안 매출 100억을 달성하게 되었습니다.”
직원은 매출이 기록된 서류를 보면서 발표했다.
“날이 갈수록 학원이 번창하니 다행입니다.”
정길은 밝게 웃으며 말했다.
“앞으로 갈 길이 많이 남았기는 하지만 지금까지 상황은 좋아 보입니다.”
수혁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며칠 전 대표님이 지시하신 고등학교들과의 모의고사 계약도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현재까지 100곳이 넘는 학교와 계약을 맺었고 연락을 못 한 학교가 아직 많이 남아 있습니다.”
“시간이 지체되면 학교 측에서 기분이 상해 계약을 맺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서두르세요.”
“네, 대표님 바로 조치하겠습니다.”
찬명은 설명회가 끝난 후 직원들과 쉬지 않고 전화를 돌려 계약을 맺었다. 그러나 워낙 많은 고등학교에서 문의를 해왔기 때문에 연락을 돌릴 학교가 많이 남아있는 상황이었다.
“다음 보고 사항 들어보겠습니다.”
수혁은 안건들을 빠르게 처리하며 회의를 진행했다.
* * *
9월 말 어느 주말, 이날은 서울학원 협회의 모임이 있는 날이었다.
보통 때와 마찬가지로 학원의 대표들은 모여 소소한 안건들을 처리한 뒤 회의를 마무리했다.
정길과 협회장 그리고 대부분의 학원 관계자들은 모임이 끝나면 바로 각자 회사로 돌아갔지만, 명성학원과 신일학원을 비롯한 몇몇 학원 대표들은 자신들만의 모임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이들은 협회 사무실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강남의 한 찻집에서 모였다.
“이게 말이 됩니까?”
웬만한 일에는 언성을 높이지 않는 규식은 평소와 달리 흥분을 하고 있었다.
“천 대표님 명성학원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어요?”
한 남자가 격앙된 모습의 규식을 바라보며 물었다.
“9월 중순에 있었던 입시설명회가 끝나고 난 뒤 갑자기 50곳이 넘는 고등학교에서 더이상 우리에게 사설모의고사를 받지 않기로 했습니다.”
“아니, 어쩌다 그런 일이.”
“다 누구 때문이겠어요? 이게 다 강 대표가 뒤에서 수작을 부렸기 때문이죠. 직원 말을 들어보니까 학교 선생들이 다른 학원과 새 계약을 맺었다고 전했는데 알고 보니까 그 학원이 SH스터디지 뭐에요? 큰일이에요 큰일.”
규식은 한탄을 하며 말했다.
“모의고사 계약은 그때그때 하는 거니까 다음에 만회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남자는 그를 위로해줄 요량으로 말했다.
“아무래도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SH스터디에서 내놓은 문제들이 질이 엄청나게 좋은 모양이에요. 소문에 의하면 수능출제위원이었던 사람들이 모의고사 문제들을 수정, 검토해준다고 하더군요.”
규식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하면 거의 반칙이나 다름없지요. 그런 꼼수를 쓰다니 너무하군요.”
“맞아요, 여러모로 강 대표는 문제에요 문제.”
자리에 앉은 사람들은 규식의 사연을 듣고 SH스터디를 규탄했다.
그들에게 위로를 받으며 분을 삭이고 있던 규식은 오늘따라 조용한 덕수에게 눈길이 갔다.
“성 대표, 이번 일로 신일학원도 타격이 없지는 않을 텐데 괜찮습니까?”
규식은 아무 반응이 없는 덕수를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타격이 없긴요, 우리도 거래처를 40곳 이상 잃었습니다. 현재 상황을 보았을 때 앞으로 더 큰 손실이 예상 되고요.”
덕수는 말하는 내용과 어울리지 않게 덤덤한 자세를 보이고 있었다.
“아니 학원 상황이 그런데 어찌 그렇게 평온하게 말할 수 있는 겁니까?”
규식은 그를 의뭉스럽게 여기며 물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교수들까지 끌어 모아서 문제를 만드는데 속수무책이지요.”
“그러게 말입니다. 어디서 그런 인맥까지 끌어 모았는지, 참 알 수 없다니까요. 어쩌면 우리가 강 대표에 대해서 너무 가볍게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천 대표님 무슨 대책 없으십니까? 뭔가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
덕수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그의 말에 동의하면서 규식에게 대책을 세우자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별 수가 생각이 나지 않아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강수혁, 네가 계속 이런 식으로 나에게 피해를 주면 더 이상 얌전하게 있을 수만은 없지.’
무표정한 얼굴로 별 반응을 하지 않는 덕수는 겉으로 보기에는 평정심을 지키는 것처럼 보였으나 속내는 달랐다. 그는 다른 학원 대표들과 자신의 생각을 공유하지 않고 뭔가를 꾸미고 있었다.
* * *
9월이 거의 다 끝나가는 어느 날, 수혁은 한국대학교에서 수업을 듣고 있었다.
1학기 때 교양 위주의 수업을 들었던 거와 달리 2학기 때부터는 전공수업들을 듣기 시작했다.
“마케팅에서 가장 기본적인 개념인 4P에 대해서 이야기해 볼 사람?”
30대 정도로 밖에 안 보이는 남자 교수는 마케팅에 관한 이론을 가르치고 있었다.
이 수업은 마케팅 관리론이라는 수업이었는데 전공 필수 과목으로 졸업하기 위해서는 무조건 들어야했다.
수혁은 마케팅이 경영에서의 활용도가 높다는 것을 몸소 느꼈기 때문에 다른 수업들에 비해 더 집중해서 듣는 편이었다.
“오늘 수업은 조금 일찍 끝내겠습니다. 대신 남은 시간 동안 중요한 공지를 하려고 하니까 잘 들으세요.”
교수는 수업 종료까지 20분이 남은 시점에서 갑작스럽게 공고를 했다.
“수업계획서를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저는 중간고사와 기말고사를 보지 않습니다. 대신 기말에 레포트가 하나 나가는데 그걸로 여러분들을 평가하기에는 부족하지요.”
한국대학교는 다른 대학과 달리 중간과 기말고사를 보지 않는 교수들이 종종 있었다.
간혹 가다가 독특한 수업과 평가방식을 고수하는 교수들이 있는 것을 보면 확실히 한국대학교는 다른 대학과 차별화 되는 면모가 있었다.
“마케팅에서 유통, 판매촉진, 가격 모두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누가 뭐라 해도 판매하는 상품입니다. 2주의 시간을 줄 테니, 저와 학우들을 고객이라 가정하고 매력적인 상품을 찾아 우리에게 소개해주세요.”
“평가 방식은 어떻게 됩니까?”
앞에 자리를 잡은 학생이 손을 들고 질문했다.
“평가는 오롯이 여러분들 몫이에요. 저 또한 한명의 고객으로서 평가를 할 거지만 여러분들과 동등한 비중이랍니다. 현재 제 수업을 듣는 학생이 30명인데 공정한 평가를 위해서 여러 날에 걸쳐서 발표를 진행할 겁니다.”
교수는 말을 하다가 목이 탄지 보온병 뚜껑을 열어 물을 마신 뒤 다시 입을 열었다.
“평가지를 전 학생들에게 나눠줄 거고 5점 만점을 기준으로 여러분들이 자율적으로 발표자들을 평가하면 됩니다. 물론 저도 같은 평가지를 쓸 거고요. 그러면 오늘 바로 발표 순서를 정할 테니 원하는 날을 미리 고민해 보세요.”
교수는 세 번에 걸쳐 발표를 진행하겠다고 했다.
이 수업은 마지막 교시에 위치해 있었는데 교수는 원활한 발표진행을 위해서 수업이 다소 늦게 끝나더라도 양해해달라고 부탁했다.
“한 사람당 최대 20분씩 발표를 진행할 겁니다. 그러다 보면 수업이 200분 이상 진행이 될 텐데 나중에 휴강을 많이 할 예정이니까 너무 스트레스 받지 마세요. 자 그럼 발표 순서를 결정할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교수는 학생들에게 순서를 정할 수 있게 5분의 시간을 주었다. 칠판에는 발표날짜가 적혀져 있었고 날짜 밑에 발표 순서를 기입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언제 하는 게 좋을까?”
“내가 볼 때 먼저 하는 것이 좋아. 가면 갈수록 애들이 대비를 더 많이 해서 평가가 박해질 수 있단 말이야. 어차피 평가는 당일에 이루어지지 뒤에 사람들 거에 영향을 받지 않잖아.”
“그거 말 되네. 처음에 하면 기준치가 없으니까 점수 받기도 좋을 거고. 어차피 점수는 5점 만점 이니까.”
“아니야, 나중이 더 나아. 더 많이 준비할 수 있잖아.”
학생들은 저마다의 의견을 펼치며 순서를 정하려고 했다.
반면에 수혁은 아무 날이나 해도 상관없다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느긋하게 앉아있었다.
“자, 그러면 여기에 보드마카들을 둘 테니까 나와서 순서를 적으세요.”
교수의 말이 끝나자마자 학생들은 서로 앞다투며 먼저 적으려고 했다.
수혁은 중간쯤에 앉아있었고 별로 신경 쓰지 않았기 때문에 천천히 나갔다.
앞에 학생이 자신의 순서를 적고 수혁에게 마카를 주었다.
‘어디로 하면 좋을까?’
첫 번째와 두 번째 날은 이미 꽉 다 차 있었고 수혁에게는 세 번째 날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그는 아무 생각 없이 셋째 날 다섯 번째에다가 이름을 기입했다.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 뒤에서 수혁의 이름 바로 위에다 자신의 이름을 적어 넣었다.
“좋아.”
명학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칠판을 바라봤다. 그는 일부러 수혁이 이름을 쓸 때까지 기다린 다음 본인의 이름을 위에 적은 것이었다.
“뭐하냐?”
수혁은 황당해하며 물었다.
“발표 준비를 철저히 하는 게 좋을 거야. 나한테 끝내주는 아이디어가 있거든. 대충 준비했다가는 아마 피 볼 거다.”
명학은 자신만만한 얼굴로 수혁에게 말했다.
최근에 그는 아버지한테 사업 자금을 받고 인터넷 사업을 추진 중이었는데 이를 토대로 발표를 하면 고득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수업을 활용해서 수혁의 콧대를 눌러주고 싶은 마음도 강하게 작용했다.
“후, 귀찮은 녀석, 마음대로 해라.”
수혁은 한숨을 쉬며 자리로 돌아왔다. 순서가 모두 정해지자 교수는 수업을 끝마쳤고 그는 가방을 챙기고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별거 아닌데 자꾸 신경 쓰이네.’
수혁은 명학의 도발을 무시하려고 했지만, 마음속에서는 은근히 승부욕이 생기고 있었다.
‘조금 신경을 써볼까?’
수혁은 교수와 학생들에게 소개할 좋은 상품을 구상하며 강의실 밖을 나서고 있었다. 그러던 그때 퀘스트 창이 활성화 되었다.
<히든 퀘스트가 발생하였습니다.>
수혁은 수업과 관련된 퀘스트라는 것을 직감하고 바로 확인 버튼을 클릭했다.
<학생들에게 가장 매력적이게 느껴질 상품을 소개하십시오.>
‘잘 됐어. 이명학 일을 처리 하면서 퀘스트도 같이 진행하면 되겠어.’
수혁은 일말의 고민도 없이 퀘스트를 수락했다.
‘무엇으로 하면 좋을까?’
수혁은 발표 때 소개할 상품을 고민하며 강의동 건물 밖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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