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솔직히 이 일에 대해서 우리랑 의논이나 하고 진행하셨습니까? 제가 알았다면 그렇게 무모한 행동은 하지 못하게 막았을 겁니다.”
규식은 찻잔을 들어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대표님 저야 그냥 SH스터디가 볼썽사나워서 한 행동 아닙니까? 그리고 다른 대표님들을 도와주려는 의도도 있었고요.”
덕수는 손을 들고 항변하는 듯한 제스처를 취하며 말했다.
“그런 거였더라면 왜 명성학원에는 연락을 안 하셨던 거죠?”
“그건…….”
규식이 눈을 가늘게 뜨고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하자 덕수는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맞아요, 저한테도 모의고사에 대한 연락은 없으셨던 거 같은데요?”
“생각해보니 그렇군요.”
모임 내에서 명성학원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학원 관계자들이 규식의 말에 동조하기 시작했다.
덕수는 신일학원과 연계가 된 학원들에게만 베껴서 만든 모의고사 문제를 제공했던 것이다.
그 이유는 명성학원이 사실상 신일학원보다 조금 더 우위에 있는 학원이었기에 견제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였다.
“뭐 그런 부분이 있었다는 거는 인정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강수혁 대표가 모의고사 표절문제 말고도 과거에 SH스터디를 비방한 것에 대한 증거들도 수집해서 폭로할 계획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뭐라고요?”
“그게 진짜입니까?”
덕수는 상황이 자신에게 불리하게 돌아가자 대화의 주제를 바꿔버렸고 학원대표들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뭐가 어쨌다는 겁니까? 아까부터 왜 신일학원이 한 행동으로 발생한 일들을 우리에게 덮어씌우려고 하십니까?”
규식은 다른 사람들과 달리 차분한 자세를 유지하며 차갑게 대꾸했다.
그는 덕수가 자신에게 떨어진 불똥을 다른 학원들에 확산시키려고 한다는 것을 간파하고 있었다.
“덮어씌운다니요? SH스터디 때문에 이 모임이 만들어졌고 저는 단지 모두를 위해서 정보를 알려준 것 뿐 입니다.”
“이 일은 신일학원에서 독단적으로 벌인 일이니 알아서 처리해주시길 바랍니다.”
“천 대표, 그런 식으로 나오면 다른 학원들이라고 무사할 것 같습니까?”
덕수는 규식이 계속 선을 긋자 다시 한번 다른 학원들을 걸고 넘어졌다.
“성 대표님 강수혁 대표랑 최근에 연락을 하셨다고 했는데 다른 학원들에 대한 언급은 있었습니까? 우리는 직접적인 피해가 있기 전까지는 움직일 생각이 없어요.”
“음……”
덕수는 규식의 질문에 제대로 답변을 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수혁이 신일학원과의 관계에 대해서만 언급을 했을 뿐 다른 학원들은 건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희 학원도 도와드리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이번 일은 성 대표님이 처리를 해주십시오.”
규식이 덕수에게 책임을 몰아가자 다른 학원 대표들도 맞장구를 치며 동조했다.
신일학원과 친분이 깊던 학원 대표들은 모임에서 보인 덕수의 태도에 실망을 했다. 그리고 신일학원이 안 좋은 여론에 의해 이탈자가 발생하자 반사적 이익을 보는 학원들도 있었기에 굳이 도와주려 하지 않는 것이었다.
‘치사한 새끼들. 단체로 나를 버리려고 하는군.’
덕수는 자신이 배제되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이만하면 성 대표님과 관련된 일은 대화가 잘 끝난 거 같으니 이제 좋은 이야기 좀 합시다.”
규식은 신일학원의 이탈자들 중 대부분이 명성학원으로 유입될 것으로 판단하고 모임 내에서 여론몰이를 한 것이었다. 그는 의도한대로 분위기가 조성되자 급하게 대화를 마무리하려고 했다.
‘성 대표한테는 미안하지만 비즈니스는 비즈니스일 뿐이라고.’
규식은 다른 대표들과 화기애애하게 서로 근황을 주고 받는척하면서 속으로는 계산을 하고 있었다.
덕수는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으며 그저 조용히 차만 마실 뿐이었다.
* * *
“대표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들어오세요.”
SH스터디 대표실에서 일을 하던 수혁은 점심이 막 지났을 무렵 노크를 하고 찾아온 찬명을 맞이했다.
“여러 언론사들과 접촉을 해봤는데 메이저 일간지 같은 경우는 학원 간 분쟁 문제로는 지면에 보도를 하는 것은 어렵고 인터넷 신문으로 올리는 정도만 가능하다고 하더군요. 이들에게는 이 사안이 그렇게 화제거리는 아닌가 봅니다.”
“하긴 연예, 정치, 스포츠 등 가십 거리가 넘치는 세상 속에서 신일과 우리와의 분쟁을 일간지 지면에 올리기는 어렵겠지요.”
수혁은 이런 상황을 예상하고 있었기에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그가 생각해도 신문지면을 장식하기에는 무리라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대신 이번 사건에 적극적인 기자를 한 명 찾았습니다. 서울 투데이의 이혜선 기자라는 사람인데요. 대표님과 단독 인터뷰를 시켜주면 큰 비중은 아니지만 지면에도 사건을 넣어주고 인터넷 신문에는 대대적으로 보도하겠다고 했습니다.”
“투데이 서울 정도면 나쁘지 않죠.”
수혁은 전생의 기억들 속에서 투데이 서울을 생각해냈다.
투데이 서울은 1991년도에 창립한 신생 언론사였는데 젊은 기자들을 중심으로 서울지역에서 활동하는 지역 주간지였다.
서울 내에서 적극적인 영업활동으로 상당히 많은 구독자를 확보하였고 후에 인터넷 신문 시장이 커졌을 땐 나름 영향력을 행사하는 언론사로 발돋움하는 회사였다.
“그런데 기자가 조금 깐깐해 보입니다. 자신의 언론사는 공정보도를 원칙으로 하기 때문에 아무 근거 없이 편향적인 보도는 어렵겠다고 하더군요. 최근엔 신일학원에도 인터뷰를 요청했다고 하는 걸 보면 양쪽의 입장을 동등하게 다룰 것 같습니다.”
“상관없습니다. 저도 대중들이 볼 때 공정한 기사가 실리기를 바라고 있는 사람입니다. 투데이 서울과의 인터뷰 일정을 최대한 빨리 잡아주세요.”
수혁은 별 고민도 없이 결단을 내렸다.
“네, 알겠습니다. 이혜정 기자는 당장 오늘도 가능하다고 하는데 금일 저녁으로 알아볼까요?”
“빠르면 빠를수록 좋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하죠.”
“알겠습니다. 대표님.”
찬명은 수혁의 지시를 받고 방을 나갔다. 그리고 그는 하던 일을 멈추고 예상 질문들과 책상 위에 올려진 여러 자료들을 취합하며 인터뷰를 준비했다.
찬명은 대표실을 나가자마자 혜선에게 곧장 연락을 했고 인터뷰는 광화문 근처의 한 카페에서 저녁 7시에 하기로 했다.
* * *
저녁 6시 50분쯤이 되었을까, 수혁은 서류가방을 들고 광화문 거리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는 인터뷰가 예정된 카페로 발걸음을 옮기는 중이었다.
10월 중순의 서울 거리는 해가 저물어 어둠이 깔려 있었고 광화문에 있는 가로수들은 단풍이 들고 있었다.
‘찾았다.’
수혁은 광장 근처에 위치한 카페를 발견하고는 곧장 다가가 문을 열고 내부로 들어갔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 주세요.”
모던한 느낌이 드는 카페에는 재즈음악이 흐르고 있었고 퇴근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많지 않아 평화로운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수혁은 커피를 받고 안으로 들어가는데 한 여자가 접근하는 것을 발견했다.
“안녕하세요, 서울 투데이 기자 이혜선이라고 합니다. 강수혁 대표님 맞으시죠?”
“네, 안녕하세요. 강수혁입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앉아서 하도록 하죠. 일로 오세요.”
머리를 한데 묶고 세련된 오피스룩을 입은 혜선은 한눈에 보아도 지적이고 세련돼보였다. 옅은 금테로 된 안경을 쓰고 있었는데 안 그래도 도도해 보이는 그녀의 이미지를 더욱 부각시키고 있었다. 그녀는 수혁을 미리 잡아놓은 자리로 데리고 왔다.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방금 전에 신일학원을 다녀왔는데 만족스럽지 못한 답변을 들어서 실망이 큰 참이었거든요. 대표님께서는 허심탄회에게 의견을 말씀해주셨으면 좋겠네요.”
“오늘 신일학원에 가셨습니까?”
혜선은 수혁의 인터뷰에 앞서 상대방의 입장을 확인해 볼 필요를 느꼈기 때문에 오후에 신일학원을 다녀왔었다.
“네, 학원 관계자한테 며칠 전부터 계속 연락을 했는데 끝까지 취재를 거부해서 그냥 말없이 찾아갔었어요. 하지만 대표님 얼굴은 보지도 못하고 데스크에 있는 직원에게 원칙상 취재는 불가하다는 말만 듣고 왔습니다.”
“실망이 컸겠군요.”
수혁은 말을 들으며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혜선은 이야기를 하면서 그를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다.
‘젊은 줄은 알았지만 너무 앳 되 보이는데? 그건 그렇고 되게 잘생겼네? 목소리도 좋고.’
수혁은 일전에 히든퀘스트를 수행하고 받은 보상의 영향으로 이전에 비해서 외모와 목소리가 상향 보정된 상태였다.
그녀는 그런 수혁의 모습을 기자로서의 본분도 잊어버린 채 넋을 놓고 쳐다보고 있었다.
“그럼 인터뷰를 시작할까요?”
“아, 네 그럼 바로 인터뷰를 시작하죠.”
수혁이 마시던 커피를 내려놓고 입을 열자 혜선은 화들짝 놀라며 대답했다.
‘정신 차리자, 공정한 보도를 위해서는 사적인 감정은 배제해야 돼.’
그녀는 인터뷰를 위해 주머니에서 녹음기를 꺼냈다.
“대화내용을 녹음하고 싶은데. 괜찮으세요?”
“상관없습니다.”
“그러면 질문하겠습니다.”
혜선은 원래 노트북으로 수혁의 말을 타이핑하려고 했지만, 집중력이 흩어질 수 있다는 생각에 노트북을 덮고 수첩과 볼펜을 손에 든 채 질문을 했다.
“현재 학생들과 학부모들 사이에서 신일학원과 SH스터디 간의 불미스러운 사건에 대해 말들이 많은데 회사의 공식적인 입장은 무엇입니까?”
“우리 회사의 공식입장은 이렇습니다. 신일학원이 불법적인 방법으로 저작물로 간주될 수 있는 모의고사 문제를 무단 도용했기에 이에 합당한 조치를 고민 중에 있습니다. 그리고 예전부터 있었던 근거 없는 모략과 비난에 대해서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고요.”
“입장에 대한 구체적인 증거는 가지고 계십니까?”
“여기 있습니다.”
수혁은 서류가방에서 준비해 둔 증거물들을 꺼낸 다음 혜선에게 보여주었다.
그녀는 수혁이 건네준 자료들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이 자료가 사실이라면 회사 입장에서 법적인 대응을 고려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군요.”
혜선은 찬명이 지금까지 수집해놓은 악성비방에 대한 자료와 표절 문제가 제기된 모의고사를 확인하고는 말했다.
“이 외에도 학생들의 증언을 기록한 자료들도 있습니다.”
수혁은 가방에서 추가 자료들을 꺼내어 혜선에게 주었다.
“이 사안을 그냥 넘어가기는 어려울 것 같은데....... 혹시 대표님은 신일학원을 고소할 생각이 있으십니까?”
그녀는 자료들을 모두 읽은 뒤 수혁에게 물었다.
“선택은 본인들에게 달려 있는 거지요. 저는 기자님이 가능하면 이 사안을 샅샅이 공개하여 많은 사람들이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게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사건의 진상을 공개 하려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들의 행위 속에서 대중들에게 교육적 혜택을 제공하려는 우리 회사의 방침을 무너뜨리려는 의도가 보이기 때문입니다. 비방의 내용들을 보시면 근거 없이 온라인 강의를 비하하는 내용이 많은데 이는 우리 회사의 선의를 왜곡하는 아주 악질적인 선동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수혁은 혜선의 질문에 차분히 대답했다.
“비방의 내용들을 보면 신일학원 하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조직적인 움직임이 있었던 것 같은데요? 다른 학원들에게는 대응하지 않을 생각이십니까?”
“저는 기본적으로 불필요한 혼란은 막고자 하는 사람입니다. 비방에 참여한 모든 학원들을 공개 한다면 교육시장에 미치는 파장이 너무 클 것 같습니다. 저는 그저 신일학원을 본보기로 삼아 재발을 방지하는 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수혁은 잠시 생각을 정리한 뒤 신중하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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