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이런 젠장, 사장님한테는 뭐라고 보고 드리지?”
원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사무실 안을 왔다갔다 거리며 초조함을 감추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사람을 찾아보겠습니다.”
과장은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하고 조심스럽게 팀장에게 말했다. 그러나 원진은 대답을 하지 않고 우왕좌왕할 뿐이었다.
이날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송유관 교체 계약을 하러 사람이 오는 날이었는데 거래 규모만 해도 몇 조에 달해 차질이 생기면 회사에는 큰 피해가 발생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아랍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을 어디서 구하지? 허, 참. 아니 도대체 일들을 어떻게 하는 거야!”
“........”
원진은 연거푸 한숨을 쉬며 고함을 질러댔고 직원들은 그저 고개를 숙이며 침묵을 지켰다.
오늘 회담에는 사장을 포함한 고위 임원진들이 대거 참가했기에 한 치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저렇게 직원들 탓을 하면 되나? 아무리 봐도 함량 미달이야.’
수혁은 강 건너 불구경하는 기분으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그에게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내가 통역 일을 도와주면 되겠네.’
그는 언어이해프로그램이 있었기 때문에 사우디어를 하는 것은 큰 문제가 없었다.
“제가 아랍어를 할 줄 압니다.”
수혁은 난감해하는 직원들 사이에서 불쑥 나타나 말했다.
“진짜에요? 그러면 우리 좀 도와주세요.”
연주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 되어 수혁에게 말했다.
“그걸 어떻게 믿어? 지금 새파란 인턴한테 이런 중요한 일을 맡기자는 거야?”
원진은 불신이 가득했다.
“팀장님, 저도 강수혁 인턴의 말이 의심스럽긴 하지만 1시간 후에 회사로 클라이언트가 옵니다. 우선은 믿고 맡겨야 할 거 같습니다.”
“아니, 회사 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한테 무슨 통역을 맡겨!”
과장은 고육지책으로라도 수혁에게 통역을 부탁하자고 권했지만, 원진은 완강하게 나왔다.
“계약해야 할 사안에 대한 정보를 저한테 주시면 시간 내에 다 익히겠습니다. 그리고 통역이라는 것이 있는 그대로 전달해주는 거 아니겠습니까? 믿고 맡겨주세요.”
“수혁씨 제가 프린트 해놓은 자료들이 있는데 이걸로 보세요.”
연주는 책상 서랍에서 문서를 꺼내 수혁에게 건넸다.
“아오 진짜, 이거야 원. 저런 시원찮은 놈한테 이런 중요한 일을.”
원진은 수혁이 못 미더워 계속 궁시렁거렸다. 그러나 마땅한 해결책이 없었기 때문에 그저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두고 보자.’
수혁은 원진이 심기를 자꾸 건드려 화가 났지만, 꾹 참고 회담에 필요한 기본 지식을 익히는데 집중했다. 그리고 잠시 후 클라이언트가 도착했다.
“안녕하십니까? 먼 길 오시느라 힘드셨죠? 이쪽으로 오세요.”
한영건설의 회장 박병석은 사우디에서 온 고객을 맞이하기 위해 1층 로비로 나왔다.
원래는 사장이 접객을 하려고 했으나 거래 규모가 워낙 컸기에 병석이 직접 나서기로 했다.
“아닙니다. 한국에 볼 일이 있어 온 김에 들렀습니다.”
사우디에서 온 남자는 정중하게 말했다.
그는 사우디 왕실의 일원으로 국가를 대표해서 한국에 왔다. 수혁은 남자의 말을 통역하여 병석에게 알려줬다.
“하하, 잘 오셨습니다. 그러면 이쪽으로 오시죠.”
병석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꼭대기 층에 있는 회장실로 남자를 안내했다. 그러자 수혁을 비롯한 임직원들도 그들의 뒤를 따랐다.
회장실 안에는 손님들이 앉을 수 있는 의자가 마련되어 있었고 프레젠테이션을 할 수 있는 기구도 설치되어 있었다.
‘회담 장소를 여기로 한 이유가 있었네.’
수혁은 내부를 둘러보면서 생각했다.
“계약을 체결하기에 앞서 짧은 브리핑이 있겠습니다. 계약 내용은 다 아시겠지만 간략하게 설명을 드리고자 합니다.”
일행을 따라 들어온 심 과장은 사람들 앞에서 사회를 맡았다. 그리고 곧이어 수혁을 소개했다.
“오늘 발표를 맡아줄 분은 강수혁 통역사입니다.”
“안녕하십니까, 강수혁입니다.”
과장은 불필요한 잡음을 없애기 위해서 인턴 신분인 수혁을 통역사로 소개했다. 그리고 그는 기존의 통역사가 하기로 되어있던 간단한 프레젠테이션을 사우디어로 훌륭하게 소화했다.
설명을 듣던 남자는 마음에 드는지 고개를 끄덕이다가 중간중간 말을 했고 이를 수혁이 통역해주었다.
“회장님, 귀빈께서 사우디 정부가 한영을 선택한 이유는 그동안 쌓여왔던 깊은 신뢰 덕분이라고 하십니다.”
“맞습니다. 이전에도 우리 회사에서 여러 국책사업을 도맡아 상호간에 커다란 발전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병석은 만족스러운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이렇게 회담은 훈훈한 분위기에서 진행됐고 한영은 무사히 계약을 마칠 수 있었다.
병석은 남자를 1층까지 배웅하고 직원들과 함께 엘리베이터에 탔다.
“자네, 강수혁이라고 했던가? 오늘 수고가 많았네. 그런데 이름이 어디서 많이 들어본 거 같구먼.”
“그럴 리가요. 저는 지금 건축 사업본부 인턴으로 근무하고 있을 뿐입니다.”
“인턴이라고? 뭔가 낯이 익는데…….”
병석은 오늘 계약 성사에 큰 공헌을 한 수혁을 유심히 쳐다보며 말했다.
그는 경제계에 있었기 때문에 SH스터디를 이끄는 수혁의 이름을 여러 차례 들었던 상태였기에 의아해했다.
“내가 지인에게 들었는데 한국대학교를 다니는 젊은 청년이 온라인 강의로 교육업계를 선도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혹시 누군지 아는가?”
병석은 인턴자격으로 회사에 있는 수혁의 정체가 의심쩍어 은근슬쩍 떠보았다.
“맞습니다. 제가 SH스터디 대표 강수혁입니다.”
수혁은 더 이상 숨길 수 없다는 판단이 들자 차분하게 대답했다.
“수혁씨가 SH스터디 대표세요?”
과장은 말을 듣자 토끼 눈이 되어 물어봤다. 그리고 엘리베이터 내에 있는 다른 임원들도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
“내 자식 놈도 강 대표님 학원에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만나게 되니 반갑습니다.”
“정말 신기하네요. 강 대표님이 우리 회사 인턴으로 오다니요.”
“사업 수완을 갖춘 분이 언어 실력까지 이렇게 뛰어나다니 놀랍습니다.
이제껏 병석 앞이라 말을 아끼던 임원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하하, 역시 내 예상이 맞았구먼, 괜찮다면 나랑 같이 이야기나 좀 하지.”
병석은 호쾌하게 웃으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수혁은 짧게 대답했다. 그리고 잠시 후 임원들과 직원들은 자신이 일하는 부서로 돌아갔고 병석은 그를 데리고 다시 회장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자네, 아니 강 대표. 술은 할 줄 아는가?”
병석은 선반 위에 있던 양주병과 유리잔을 들고 오며 말했다.
“아직 근무시간이라 조심스럽습니다.”
“허허,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나랑 같이 마신다는데.”
그는 수혁의 말에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면 조금만 마시겠습니다.”
“그래, 한잔 하지.”
수혁과 병석은 회장실 안에 있는 소파에 앉아 술잔을 기울였다.
“강 대표, 내 지인에게 대충 들었지만 참 기가 막힌 아이디어로 학원을 차렸던데 이야기 좀 해보게.”
“과찬의 말씀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생각했던 사업이 운 좋게 성공했을 뿐입니다.”
“그러지 말고 편하게 말해보게.”
병석은 젊은 나이에 큰 성공을 한 수혁을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 그는 민망하여 대답을 주저했지만 얼마 있지 않아 사업을 시작하고 발전시켰던 과정에 대해서 간략하게 말해주었다.
“내 볼 때 강 대표께서 훌륭한 혜안을 가진 듯 보이네. 사실, 오늘 수고해준 보상으로 특별채용을 하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안 되겠어.”
병석은 수혁이 긴박한 상황에서 통역 역할을 대신 수행해준 사실을 알았고 그 공으로 그를 정규직으로 채용하려고 했으나 이루어질 수 없음을 직감했다.
“마음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수혁은 병석의 마음을 헤아리고 감사의 뜻을 표했다.
“아무래도 이대로 그냥 넘어가긴 그렇고 혹시 소원이라도 있나? 내 무리가 안 된다면 보상을 해주고 싶네.”
병석은 보상을 핑계로 수혁과 관계를 맺고 싶어 제안을 했다.
“소원은 딱히 없고 조금한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말해보게.”
수혁은 이번 기회를 통해 원진에 대해 이야기하기로 마음먹었다.
“제가 속해 있는 부서의 상사가 직원들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있습니다. 저는 회장님께서 이 부분을 해결해주셨으면 합니다.”
“자세히 이야기해보게.”
병석은 예상외의 말이 나오자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건설 회사 특성상 직원 간의 위계질서가 엄격한 것은 이해합니다. 그러나 이원진 팀장은 직원들에게 야근을 강요하고 이에 따른 수당을 지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수혁은 자신이 사무실에서 일하면서 봤던 원진의 부당한 행위를 샅샅이 이야기했다.
“외람되지만, 회장님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들려드릴 게 있습니다.”
“뭔가?”
수혁은 녹음기를 꺼냈다.
그는 그동안 근무하면서 보았던 원진의 갑질들이 기록된 녹음파일을 실행했고 병석은 말없이 경청했다.
“우리 회사 특성상 군대식 문화가 형성되어 있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였는지는 몰랐어. 이 같은 사실을 알려줘서 고맙구먼. 내 바로 시정조치에 들어가겠네.”
그는 턱을 괴고 앉아있다가 소파 옆에 있는 수화기를 들었다.
“어, 거기 김 전무 좀 연결해봐.”
병석은 회사 인사를 총괄하는 담당자에게 연락했다. 그리고 수혁이 속해있는 팀에 대한 전수조사를 지시했다.
“괜찮다면 녹음파일을 김 전무에게 보내줄 수 있겠는가?”
“전무님이나 회사 메일 주소를 알려주시면 바로 보내드리겠습니다.”
이후에도 그는 한참동안 수혁이 인턴을 하면서 느꼈던 사내에 형성된 관습에 대해 들으며 고쳐야 할 점들에 관해 상의했다.
“오늘 강 대표 덕분에 많은 것을 배웠네. 난 부탁이라고 해서 격려금 같은 것을 예상했는데 완전히 빗나갔어.”
“제 말을 듣고 바로 조치를 취해주신 회장님의 결단이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병석은 씁쓸한지 술을 마시며 이야기했다. 그들은 그렇게 대화를 나누다가 퇴근 시간이 되자 헤어졌다.
‘후, 직원분들한테는 죄송하지만, 회사를 위해서는 이편이 더 나을 거야.’
수혁이 회장실을 나와 사무실에 돌아 와보니 원진을 비롯한 몇몇 직원들은 조사를 받으러 인사팀에 가 있었다.
“괜히 시끄럽게 만들어서 죄송합니다.”
“휴, 아니에요. 언젠간 터질 일이었어요.”
“맞아요, 수혁씨 잘못이 아니에요.”
그는 사무실에 남아있는 직원들에게 사과했으나 사람들은 의외로 덤덤한 반응을 보였다.
병석의 지시로 시작된 전수조사는 3일에 걸쳐서 진행되었고 한영건설은 원진에게 적절한 징계를 내렸다.
“이원진 팀장님이 타부서 과장으로 좌천되셨다던데?”
“안타깝지만 자업자득이지 뭐.”
직원들은 회사에서 내려온 공고문을 보며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원진의 빈자리는 심 과장이 차지하게 되었다.
“팀장님 축하드립니다.”
“아닙니다. 최근에 회사가 조금 시끄러웠는데 우리는 그런 거 신경 쓰지 말고 앞으로 더 잘해봅시다.”
직원들은 평소 신망이 높던 심 과장이 팀장이 되자 모두 만족스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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