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수혁아 오랜만이야.”
“어, 그래 다들 잘 지냈어?”
수혁은 학교 수업이 모두 끝나자 개강총회가 예정된 장소에 도착하여 동기들과 회포를 풀었다.
사람들은 친한 동기들과 그동안의 근황을 이야기하며 왁자지껄 떠들었다.
‘저놈이 웬일로 조용하지?’
수혁은 동기들과 술잔을 기울이다가 명학을 보며 생각했다.
평소 그는 모임을 주도하며 분위기를 이끌었으나 이날은 한쪽 구석에서 말없이 술만 마시고 있었다.
“쟤 뭔 일 있어? 왜 저렇게 구석탱이에 쳐박혀 있는 거야?”
수혁은 맞은편에 앉은 찬명에게 조용히 물어봤다.
“누구? 아, 명학이 말하는 거구나. 휴 말도 마 지금 제 속이 말이 아닐 거야.”
“왜, 무슨 일인데?”
찬명은 행여 누가 들을까 작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말했다.
“지난 학기에 명학이가 사업 시작한다고 했잖아? 그런데 잘 안 된 거 같더라고.”
“하긴, 잘 됐으면 사방팔방 말하고 다녔겠지. 어쩐지, 저 녀석 답지 않게 얌전히 있더라.”
“조용히 해 수혁아, 듣겠어.”
찬명은 다른 아이들이 들을까 싶어 수혁을 자제시켰다.
“후, 피곤하다 나 먼저 갈게.”
수혁과 찬명이 한참을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술을 마시던 명학이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가게?”
“명학아 많이 피곤해?”
“씁, 피곤한 건 아니고 그냥. 오늘은 네가 애들 잘 통솔해라.”
“알았어, 걱정하지 마.”
명학은 부분반장 역할을 맡고 있는 친구에게 당부를 한 뒤 술집을 떠나려고 했다.
‘하, 재수 없는 자식. 꼴도 보기 싫네.’
그는 나가는 길에 수혁의 뒷모습을 보자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SH스터디가 승승장구하고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유명해진 반면에 회사 경영한 실패한 명학은 강한 질투심이 들었다.
‘그냥 가자, 현재 상태에서 괜히 건들이면 쪽만 당하겠어.’
명학은 한숨을 푹푹 쉬며 자리를 빠져나갔고 수혁은 이날 밤 동기들과 늦은 밤까지 술을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 * *
‘공교롭게 됐네.’
수혁은 대표실에서 매물로 나온 여러 회사들을 살펴보다가 고민에 빠졌다.
그가 눈여겨보고 있는 회사는 지오닷컴이라고 작년에 생긴 신생회사였다. 그런데 이 회사가 하필이면 명학이 운영하던 사업체였던 것이다.
‘가격도 괜찮고 사이트 구성도 잘 되어있어서 딱 내가 찾고 있던 회산데 어떻게 하지?’
한참을 고민하던 수혁은 결국 지오닷컴을 인수하기로 결정했다. 지오닷컴은 일송이 적극적으로 지원해준 덕분에 포털 회사로서 필수적으로 갖춰야 하는 것들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포털 사이트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은 검색엔진인데 타 사이트랑 연동이 잘 되어있어서 자료가 풍부한 게 가장 큰 장점이야.’
일송은 지오닷컴이 설립됐을 당시에 그룹차원에서 많은 지원을 해줬다. 그리고 언론사들을 비롯한 여러 기업들은 앞다투어 지오닷컴과 제휴를 맺었는데 이는 순전히 명학의 배경에 일송이 있어서 벌어진 일들이었다.
‘조금 찔리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어.’
수혁은 언론사들과의 협약이 잘 맺어져 있어서 인터넷 뉴스 보도 시스템을 잘 갖추고 있는 지오닷컴을 포기할 수 없었다.
“저 부대표님, 제 방으로 와주실 수 있으세요?”
수혁은 수화기를 들어 찬명을 불렀고 잠시 후 대표실에 들어왔다.
“대표님 부르셨습니까?”
“네, 다른 게 아니라 제가 지분 중에 5퍼센트만 정리하려고 하는데 SH스터디 이름으로 매입을 해주세요.”
“아, 그런 것이 가능합니까?”
찬명은 금융에 대한 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수혁에게 물었다.
“SH스터디는 법인이기 때문에 회사 이름으로 재산을 갖는 것이 가능합니다. 직원들을 시켜서 이 부분에 대해서 알아보고 진행해주세요.”
“또 시키실 일은 없습니까?”
“딱히 없습니다. 원장님, 죄송한데 지분을 정리한 돈으로 할 일이 있으니 빨리 좀 부탁드립니다.”
“직원을 시켜 바로 매입하겠습니다.”
찬명은 지시를 받고 대표실을 나갔다. 지오닷컴의 인수 가격은 70억이었는데 현재 수혁의 수중에는 그 동안 모아놓은 10억이 있었고 나머지는 지분을 정리하여 자금을 확보하려고 했다.
‘지분가가 100억이니까 세금내고 하면 인수자금 확보에 문제없을 거야. 그러면 지금부터 사업계획을 본격적으로 세워볼까?’
수혁은 지오닷컴에 관련된 자료들을 뽑은 뒤 회사의 발전 방향과 향후 추진할 여러 사업 계획들을 만들어 보았다.
* * *
개학 후 3주의 시간이 흘러 어느새 3월 말이 되었다. 수혁은 지분을 정리하여 성공적으로 자금을 마련했고 곧바로 지오닷컴을 인수했다.
“이야기 들었어? 대표가 회사를 매각했다는데?”
“하, 일송에서 밀어주는 프로젝트 사업이라고 해서 다른 회사들을 마다하고 왔는데 정말 실망이다.”
“그래도 어떻게 하겠어? 자기들 입장에선 돈이 안 되는데 계속 할 수는 없었을 테지.”
선릉 역에 위치한 지오닷컴 사무실은 회사가 매입되었다는 소문이 돌자 어수선했다.
“인수가 굉장히 비밀스럽게 이루어 졌나봐. 거래 성사 직전까지 매입하려던 사람이 신분을 밝히지 않았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누가 회사를 인수한 건데?”
“SH스터디 강수혁 대표라고 들어봤어? 그 사람이 우리 회사의 새로운 대표라던데?”
수혁은 인수 사실을 명학이 알면 차질이 생길 것을 염려하여 최대한 조용히 협상을 했다. 명학은 나중에 그 사실을 알았지만 이미 계약이 완료되었던 터라 더이상 손쓸 방법이 없었다.
“후, 젊은 사람이 회사 운영하는 거 별로지 않아?”
“나도 동감이야. 이명학 대표가 우리 회사에서 한 일이 뭔지 잘 모르겠어. 그냥 가끔씩 와서 얼굴만 비췄지 직원들과 제대로 소통한 적도 없잖아.”
직원들은 명학을 두고 설왕설래하며 수혁에 대한 의구심을 드러냈다.
그는 일송그룹 기획팀이 짜준 사업계획서를 토대로 회사를 운영했지만, 일선에 나서기 보다는 일송에서 데려온 심복들을 시켜 간단한 지시만 내리고 나 몰라라 했었다.
“그래도 한 번 지켜봐야 할 거 같아. 들어보니까 인수할 의사가 있었던 사람들 중에서는 현재 대표가 회사경영에 대한 가장 적극적인 의지를 보였데.”
“맞아,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SH스터디를 성공적으로 경영했던 것을 보면 난 조금 기대도 돼.”
수혁은 스타트 업을 해서 큰 성공을 거둔 사람이었기 때문에 비즈니스 업계에서는 인지도가 나쁘지 않아 직원들 중에는 호감을 갖는 사람들도 있었다.
‘여긴가?’
한편 수혁은 수업이 끝나자 선릉에 위치한 지오닷컴 사무실로 향했다. 그는 오늘 직원들과 첫 만남을 갖고 회사 경영에 필요한 사안들을 파악하기로 마음을 먹은 상태였다.
“저 누구시죠?”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부산스러운 사무실 안에 낯선 남자가 들어오자 직원들 중 하나가 다가가 물었다.
“안녕하세요, 강수혁입니다.”
“네? 그러면 설마.......”
이름을 들은 직원은 깜짝 놀랐다.
“네, 제가 여러분들의 새로운 대표입니다. 다들 안녕하십니까?”
수혁은 사무실을 돌며 사람들에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대표님.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환영합니다. 대표님. 열심히 하겠습니다.”
직원들은 갑자기 등장한 수혁으로 인해 얼떨떨했지만 금세 대표라는 호칭을 쓰며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생각보다 호감이잖아.’
‘인상이 좋은데?’
직원들 입장에선 처음 보는 수혁은 경계할 수도 있었으나 33에 달하는 그의 매력 수치는 사람들의 경계심을 허물어뜨리기에는 충분했다.
“자세한 이야기는 내일 회의에서 하도록 하죠. 제가 일할 곳은 어딘가요?”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직급이 제법 있어 보이는 직원 한 명이 수혁을 데리고 대표실로 향했다.
‘보아하니, 여기서 뭘 했는지 훤히 보이는군.’
수혁은 대표실 내부를 둘러봤다.
넓은 방 안에는 고급 책상이 하나 있었고 옆에는 술병들을 놓을 수 있는 장식대들이 있었다. 구석에는 간단하게 골프를 연습할 수 있는 인조잔디로 된 연습기구도 있어 경영에 임하는 명학의 태도를 엿볼 수 있었다.
“사람 불러서 이것들을 다 버려주세요.”
수혁은 골프연습기구와 술병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현재 회사에서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랑 처리해야 할 안건들을 정리해서 전부 저한테 가져다주세요. 오늘 밤을 새서라도 현안들을 파악할 생각이니까 퇴근하시기 전까지 서류들을 가져다 주시길 바랍니다.”
“넵.”
수혁은 본격적으로 일 할 준비를 했다
“저, 대표님 말씀하신 거 가지고 왔습니다.”
직원은 수혁이 지시한 서류들을 가지고 대표실로 들어왔다.
“책상 위에 놔두고 가주세요. 아, 그리고 아까는 말씀 못 드렸는데 직원들 인적사항에 관한 것들도 다 가지고 오세요.”
“알겠습니다. 그런데 저, 죄송하지만 살펴보실 것이 있습니다.”
“뭡니까?”
“그게, 저.......”
직원은 품 안에서 봉투 다발을 꺼냈다.
“이것들은 사직서가 아닙니까?”
수혁은 봉투 겉면에 쓰인 글자들을 보고 말했다.
“맞습니다. 회사 인수 소식을 들은 몇몇 직원들이 퇴사 의사를 밝혔습니다. 오늘 처음 뵙는 거라 미처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
직원은 민망한지 머리를 긁으며 말했다.
“인적사항에 관한 서류들을 최대한 빨리 가져와 주세요. 퇴사 처리를 위해서 참고해야 합니다.”
수혁은 회사의 중요 인력은 잡아야 된다고 판단했고 이를 위해서는 정보들이 필요했다.
“대표님, 인적사항에 관한 서류들을 모두 가져왔습니다. 이것들은 퇴직 희망자들의 정보가 기입된 문서입니다.”
직원은 서류들 중에서 일부를 골라낸 뒤 수혁에게 주었다.
“수고하셨습니다. 나가보세요.”
수혁은 직원이 건네준 종이들을 받은 뒤 사직서들과 인적사항들을 살펴보았다.
‘하, 왜 회사를 그만두려고 하는지 대충은 알겠다.’
사직서를 낸 사람들의 인적사항을 꼼꼼히 확인한 수혁은 이들이 이전에 일송에서 근무하던 인력들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아깝긴 하지만, 알아서 나가주는 것이 훨씬 편할지도 모르겠어.’
퇴사 의사를 밝힌 사람들 대부분은 고급인력이었으나 괜히 껄끄러운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고 생각한 수혁은 이들을 포기하기로 했다.
‘용민이한테 연락을 해두었으니까 인력 수급은 금방 할 수 있을 거야. 뭐 여차하면 새로 사원들을 뽑으면 되니까 걱정하지 말자.’
수혁은 공백이 생긴 자리를 용민과 그의 친구들로 채울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 사람은 왜 퇴사를 하려고 하는 거지? 일송사람도 아닌 것 같은데? 그리고 이름이 낯이 익는데 누구지?’
수혁은 사직서 사이에서 박유신이라는 이름을 발견하곤 생각에 잠겼다.
‘설마, E-Salon의 박유신?’
한동안 박유신의 정체를 두고 고민하던 수혁은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다.
유신은 국내 최대의 커뮤니티 사이트인 E-Salon을 만들어 성공을 한 사람이었다.
그는 사람들의 관심사 별로 카테고리를 두고 자유롭게 발언할 수 있는 게시판을 만들어 국내에 마니아 문화를 정착시키는데 큰 공헌을 한 인물이었다.
‘박유신이 확실한 건가? 만약 같은 사람이라면 절대 놓쳐선 안 돼.’
수혁은 동명이인일 가능성이 있으므로 확인을 해보기로 했다.
그는 직원이 가져온 서류들을 샅샅이 읽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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