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없는 회귀-131화 (131/316)

131화

“이런, 비가 올 것 같은데요?”

수혁이 매운탕을 가스레인지 위에 올려놓는 순간 하늘에서 빗줄기가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럴 때 쓰려고 준비해둔 게 있습니다.”

신욱은 마당 뒤편으로 가 커다란 파라솔을 가져왔다. 그는 테이블 가운데에 있는 홈에 파라솔을 끼워 넣었다.

“빗소리를 들으며 술을 마시니까 운치도 있고 좋네요.”

신욱은 캔맥주를 벌컥벌컥 마시며 말했다.

“분위기가 좋으니 음식이 더 맛있네요.”

수혁은 회를 입 안에 넣으며 말했다. 그는 차를 가지고 왔기에 술은 마시지 않고 있었다.

“대표님은 술을 안 드시나 봐요?”

“마시긴 하는데 돌아갈 때 운전을 해야 돼서 좀 그렇네요.”

“집에 남는 방이 있는데 괜찮으시면 하룻밤 주무시다 가세요.”

신욱은 오랜만에 온 손님에게 자고 갈 것을 권했다.

“감사합니다. 하루만 신세 지겠습니다.”

“신세라니요,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해주셨는데 당연하죠.”

“사실, 비가 많이 와서 돌아가는 길이 걱정되었는데 다행입니다.”

수혁은 안 그래도 신욱과 좀 더 대화를 나누고 싶었기 때문에 반색을 드러냈다.

“자, 그럼 문제는 해결됐으니까 술 한잔하세요.”

신욱은 종이컵에 소주를 가득 부은 뒤 수혁에게 건넸다.

“감사합니다.”

수혁은 두 손으로 술잔을 받았다.

“매운탕도 거의 다 된 거 같으니까 국물이랑 같이 드세요.”

“네, 작가님. 매운탕이 입맛에 맞을 진 모르겠네요.”

“하하, 야외에서는 라면도 맛있는데 매운탕이면 오죽하겠습니까?”

그들은 술잔을 기울이며 식사를 했다. 식사를 하는 와중에 많은 대화가 오갔지만, 수혁은 되도록 일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상황 봐서 계약 이야기를 하긴 해야 되는데......’

수혁은 신욱과 즐겁게 대화를 나누었지만 가슴 한편에는 일에 대한 부담감이 있었다. 비교적 이른 시간부터 시작된 술자리는 밤이 되도록 계속 이어졌다.

“제 만화를 좋아하신다고 그러셨는데, 어떤 점이 마음에 드셨나요?”

술기운에 얼굴이 벌게진 신욱은 수혁에게 물었다.

‘이 질문에 잘 답변하면 자연스럽게 계약 이야기도 꺼낼 수 있겠어.’

기회를 포착했다고 판단한 수혁은 생각을 정리한 다음 입을 열었다.

“첫 작품으로 쓰신 행복한 이웃들이 다른 만화들과는 확연히 다른 색채를 가지고 있는 것에 감명을 받았습니다.”

“다른 색채요?”

신욱은 술잔을 내려놓고 수혁의 말을 경청했다.

“작가님도 아시겠지만 만화 출판사들이 선호하는 작품들을 보면 대부분 무협, 판타지, 아니면 학원 액션물이 많더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다양한 소재가 존중되어야 하는데 인기 장르가 한정되어있어서 그림을 그리는데 에로사항이 적지 않습니다.”

공들여 그린 작품들이 연달아 거절당한 경험을 갖고 있는 신욱은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일본의 유명 만화들과 달리 국내 작가들이 그리는 만화에서 자신만의 색깔을 찾기 어려웠는데 장신욱 작가님의 작품은 다르더군요.”

“어떤 점이 말입니까?”

신욱은 수혁의 말에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다른 작가들의 작품을 보면 독자들의 취향에 너무 신경을 쓰는 것 같더라고요. 그림을 선정적으로 그린다던가, 스토리를 자극적으로 진행해서 시선을 끄는 방식으로 말이죠. 하지만 작가님은 본인이 보여주고 싶은 이야기를 담백하게 그리신다고 느꼈습니다.”

“맞습니다. 돈을 많이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대중들에게 메시지를 던질 수 있는 작가가 되고 싶었습니다. 만화라고 꼭 자극적인 소재만 다루라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술자리 내내 실실거리며 웃던 신욱은 어느새 진지한 자세로 대화를 하고 있었다.

“작가님 말씀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무릇 작가라면 독자들을 즐겁게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표현하고자 하는 가치관이 있어야 작품에 깊이가 생기거든요.”

“휴, 그러면 뭘 합니까? 결과를 내지 못하는데....... 요즘은 다른 작가님들처럼 독자들이 좋아하는 것 위주로 만화를 그릴까 고민하고 있어요. 이제 저도 제 밥벌이는 해야 하니까요.”

신욱은 만화를 그리며 받았던 스트레스를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저는 작가님이 지금보다 더 적극적으로 본인의 색깔을 살려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작가님의 만화는 진지한 내용을 부담 없이 전달하는 매력이 있거든요.”

수혁은 신욱이 그렸던 만화들을 생각하며 말했다.

“그래도 될까요? 대표님한테 말씀드리지 않았지만 저는 첫 작품에서 선보였던 거보다 더 과감하게 그릴 의향이 없지는 않습니다. 물론 생계에 대한 부분이 해결돼야 가능한 이야기지만요.”

“네, 저는 오히려 작가님의 작품이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가 있어서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행복한 이웃들만 해도 상대적으로 소외된 계층의 사람들이 저마다 꿈을 갖고 사는 모습을 아름답게 그린 작품이 아닙니까?”

“잘 아시네요. 행복한 이웃들을 통해 독자들에게 따뜻한 여운을 남기고 싶었는데 마냥 실패한 건 아니었군요.”

신욱은 혼신의 힘을 다해 그린 작품이 인정을 받자 흥이 나기 시작했다.

“저는 작가님께서 사회를 아름답게 만드는데 기여할 수 있는 작품들을 많이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항상 응원하겠습니다.”

“대표님…….”

술기운이 잔뜩 오른 신욱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는 수혁에게 감동을 받아 가슴이 먹먹해졌다.

“외람되지만 조언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네, 괜찮습니다.”

“작가님의 만화는 종이보다는 인터넷으로 연재할 때 더 큰 공감을 받을 것 같습니다. 그림체 자체가 기성작가들과 달리 아기자기하고 소탈한 맛이 있거든요.”

“사실 저도 다른 분들과 비슷하게 그리라면 그릴 수 있지만 제가 원하는 감성을 담으려면 현재 유행하고 있는 그림체가 어울리지 않더군요. 대표님께서 제 의도를 알아주시니 기분이 좋습니다.”

“제가 그런 의미에서 작가님을 위해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웹툰을 그리는데 필요한 도구들인데 2주일 내로 보내드리겠습니다.”

수혁은 인터넷으로 주문한 물건들을 신욱에게 줄 생각이었다.

“안 그래도 본격적으로 웹툰을 그리려고 준비하던 중이었는데 고맙습니다.”

신욱은 수혁의 배려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빨리 보내드리고 싶은데 해외사이트를 통해 주문 한 거라 시간이 좀 걸리네요.”

“저, 대표님. 죄송하지만 웹툰 제작에 필요한 도구들은 이미 다 가지고 있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예상치 못한 대답을 들은 수혁은 순간 당황했다.

“국내에서 웹툰 서비스가 시작되자마자 도구들을 구매했거든요.”

“웹툰 연재에 대한 계획이 이미 있으셨군요.”

“네, 하지만 대표님의 그 마음은 감사히 받겠습니다.”

신욱은 감사한 마음을 표시하기 위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이러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는 그저 작가님이 좋은 작품들을 많이 그리셨으면 하는 바람뿐입니다.”

수혁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강 대표님은 정말 좋으신 분 같습니다. 이제 와서 이런 말씀드리는 게 조금 민망하지만 조건만 맞으면 SH커뮤니케이션과 같이 일하고 싶습니다.”

“저희는 언제든지 환영입니다.”

신욱은 대화가 길어질수록 수혁에 대한 호감이 커져가는 것을 느꼈고 급기야 SH커뮤니케이션과 함께 하고 싶다는 마음까지 생겼다.

“작가님, 괜찮으시다면 계약 조건에 대해서 말씀드리고 싶은데 어떻습니까?”

수혁은 조심스럽게 계약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먼 데에서 오셨는데 이야기를 들어야 예의겠지요.”

신욱은 처음 전화할 때와 다르게 열린 자세를 보여줬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 회사와 계약을 하시면 연재하는 기간 동안 매달 700만원의 고정급을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일정 수준 이상의 수익이 발생하면 그에 따른 인센티브도 보장하겠습니다.”

“700만원이요?”

수혁이 회귀하기 전에 신욱이 받는 고정급은 한 달에 3000만원에 달할 정도로 고액이었으나 2001년이라는 시점과 무명이라는 그의 위치를 생각하면 700만원의 고정급은 굉장히 큰 액수였다.

“네, 마음 같아서는 더 챙겨드리고 싶습니다만 신생 회사라 재정 상황이 넉넉하지 못해서 아쉽게 됐습니다.”

수혁은 눈이 휘둥그레진 신욱을 보며 말했다.

“뭐 때문에 저를 높게 평가해주시는 겁니까?”

“작가님의 잠재력을 보고 판단한 것도 있지만 팬으로서 작가님을 제대로 대우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습니다.”

수혁은 이런 상황에서는 논리적인 말보다는 감성적인 접근이 더 효과적인 것을 알고 있었다.

“계약하겠습니다. 현재 그리고 있는 작품이 있는데 내일 오후 중에 메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렇게 급하게 안 보내주셔도 됩니다. 천천히 하세요.”

“아닙니다. 대표님께서 이 정도로 성의를 보이는데 저도 이에 감응해야지요.”

“감사합니다.”

신욱은 수혁과 함께 일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한 말씀 더 드리면 행복한 이웃들을 웹툰화 해서 대중들에게 보여주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괜찮을까요?”

“네, 스토리는 그대로가고 그림체만 웹툰에 맞게 적절히 수정하신다면 대중들의 반응이 뜨거울 겁니다.”

수혁은 ‘행복한 이웃들’의 리메이크 버전이 크게 흥행했다는 것을 떠올리며 말했다.

“여러모로 기쁜 날인데 한 잔 하시죠.”

그는 일이 일사천리로 풀리자 기분이 좋아졌다.

“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수혁도 이에 화답하며 술을 마셨다. 이날 밤 수혁과 신욱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더욱 친해질 수 있었다.

* * *

“나중에 시간 되면 또 찾아뵙겠습니다.”

“네, 조심히 가세요. 메일은 바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잘 쉬다 갑니다.”

신욱은 집 앞에 나와 수혁을 배웅했다. 늦은 시각까지 술을 마신 수혁은 낮 12시가 다 되어서 일어났고 샤워만 간단히 한 뒤 차를 타고 서울로 향했다.

<히든 퀘스트가 완료되었습니다.>

수혁이 막 춘천을 빠져나가고 있는데 어플이 활성화 되었다.

‘퀘스트가 잘 끝난 거 보면 작가님과 계약은 문제없겠어. 그런데 뭔가 이상하네?’

화면에 뜬 내용을 확인하던 수혁은 뭔가 마음에 들지 않은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퀘스트를 깼는데 왜 보상이 없는 거야?”

보통 때와 달리 퀘스트 완료와 함께 주어지는 스텟보상이 없는 것을 확인한 수혁은 볼멘소리로 물어봤다.

<사용자의 사업에 도움을 드린 것 자체가 이 퀘스트에 대한 보상입니다.>

“그게 뭐야? 이제까지 이런 적이 없었잖아.”

수혁은 차를 타고 있었기 때문에 눈치보지 않고 어플과 대화를 나누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퀘스트를 해결함으로써 사업적으로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별도의 보상은 없습니다. 만약 보상을 하게 되면 이는 이중 보상입니다.>

도움말은 평소와 달리 수혁에게 냉정하게 말했다.

‘하긴 이 녀석 말도 일리는 있지. 지금 딱히 관리해야 할 스텟들이 있는 것도 아니고.’

수혁은 금세 납득이 됐는지 프로그램을 종료하고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운전을 했다.

* * *

“본부장님, 웹툰부서 팀장님에게 말해서 장신욱 작가에게 메일이 왔는지 확인하라고 하세요.”

“네, 알겠습니다.”

수혁은 서울에 도착하자 곧장 회사로 왔고 유신을 호출했다.

“그리고 이건 제가 만든 계약선데 조만간 작가님과 정식 계약을 추진하라고 전해주세요.”

“언제 이런 걸 준비하셨습니까?”

유신은 계약서를 받아들고 천천히 훑어보며 말했다.

“대표님, 죄송하지만 계약조건이 우리 회사에 너무 불리한 거 같습니다.”

“그 분의 가치를 생각하면 충분히 감수할 수 있습니다. 두고 보세요. 투자한 금액이 전혀 아깝지 않을 겁니다.”

“대단하신 분인가 보네요.”

신욱은 확신에 찬 수혁을 보며 말했다.

“나중에 다 알게 될 겁니다. 그럼 가서 일 보세요.”

“넵, 일이 마무리 되면 바로 보고 드리겠습니다.”

신욱은 문을 닫고 나갔다. 대표실에 혼자 남은 수혁은 책상 서랍을 연 뒤 용민이 준 문서들을 꺼냈다.

‘장신욱 작가 말고도 눈에 띠는 작가들이 있었어. 다른 회사에서 채가기 전에 우리가 먼저 잡아야 돼.’

수혁은 작가들의 연락처가 적힌 문서들을 샅샅이 살펴보기 시작했다.

- 132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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