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없는 회귀-149화 (149/316)

149화

“소프트웨어를 담당한다고 하셨는데 문제는 그것만이 아닙니다. 스마트 폰의 하드웨어를 만드는 건 쉬운 줄 아십니까?”

필재는 수혁이 번뜩이는 아이디어만 있을 뿐 세부적인 디테일을 갖추지 못했다고 판단했다.

‘일단 뭐라고 이야기하는 지 들어보자. 설명은 나중에 해도 돼.’

수혁은 WG와 협의한 사항을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입을 꽉 다물고 지켜보기로 했다.

“WG정도 되면 주요 부품 몇 개 정도는 조달할 수 있겠지만 완제품을 만드는 것은 어려울 겁니다. 반도체 하나 만들려고 얼마나 많은 비용과 인력이 투입되는지 아십니까? 어쩌면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것보다 훨씬 어려울 수도 있는 작업입니다.”

“왜 그렇게 열을 내서 말씀하시는지는 알겠습니다. 이건, 제가 준비한 문서인데 한 번 읽어보시죠.”

수혁은 이전에 작성한 사업 계획서를 필재에게 건네주었다.

“음, 말이 되긴 하는데......”

계획서 안에는 WG가 아웃소싱을 통해 스마트 폰을 제작할 수 있다는 내용이 서술되어 있었다.

“뭐, 부품들을 외부에서 공급받는 다는 발상이 괜찮긴 한데, WG가 그만한 네트워크가 될 까요?”

“현 회장님은 빈 말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의 인품이라면 타 기업들과 원만한 관계를 맺는데 별 어려움을 겪지 않았을 겁니다.”

“사업은 인품만으로 하는 게 아닐 텐데요?”

“일송에게 밀려서 그렇지 WG는 해외의 유수기업들에 뒤지지 않는 기술력을 갖고 있습니다. 다른 기업들은 WG를 훌륭한 사업 파트너라고 생각할 겁니다.

“그렇군요.”

수혁은 WG가 일송에 비해 인지도 면에서는 밀린다는 것을 알았지만 해외 글로벌 기업들과 돈독한 관계를 맺는데 문제가 없을 거라고 판단했다.

“소프트웨어는 어떻게 만들지 구상해보셨어요?”

“제가 프로그래밍에 대해 아는 것이 많지 않아서 작동모델만 구상해봤습니다.”

수혁은 스마트 폰이 작동되는 원리가 적혀있는 도안을 필재에게 건네주었다.

“대단하군요.”

한동안 문서의 내용을 살펴보던 필재가 처음으로 칭찬을 했다.

“용민이 말로는 필재씨께서 머릿속에 있는 아이디어를 프로그램으로 만드는 데 천재적인 실력을 가지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혹시 이 도안대로 소프트웨어 제작이 가능하겠습니까?”

“이거라면 시간을 확실히 단축시킬 수 있겠네요. 작동 방식에 대한 설계도가 있으니 프로그램을 만들기만 하면 되니까요.”

“후, 그래도 긍정적인 이야기를 듣게 돼서 다행입니다.”

필재의 말을 들은 수혁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현재 PC컴퓨터에서 활용되고 있는 MC소프트의 운영체계와 유사한 점이 많아 사람들이 쓰기에 무리가 없을 듯 보입니다. 그렇다고 딱히 MC소프트 측에서 태클을 걸기 힘든 컨셉이라 스마트 폰에 적용하기 아주 좋습니다.”

“스마트 폰을 처음 접해보는 고객들이 쉽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하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그 뿐이 아닙니다. 마우스와 키보드가 없는 핸드폰으로 다양한 기능들을 구현하는 게 가능할 줄은 몰랐습니다.”

시종일관 시니컬한 모습을 보였던 필재는 열정 넘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괜찮으시면 저희와 함께 해주시겠습니까? 조만간 스마트 폰에 들어갈 소프트웨어를 전문적으로 개발할 팀을 따로 꾸릴 생각인데 괜찮으시면 총괄팀장으로서 이 프로젝트를 맡아주시길 바랍니다.”

“워, 워 너무 빨라요. 아이디어가 좋기는 하지만 아직 결정은 못 했다고요.”

필재는 눈을 크게 뜨며 익살스럽게 말했다.

“그럼 시간을 드릴까요?”

수혁은 한시가 급한 상황이라 시간을 끌 여유가 없었지만 기다릴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마음 같아서는 들어가고 싶은데 프로젝트 규모가 워낙 커서 한 번 들어가면 발을 못 뺄 거 같아서 고민이네요. 제가 원래 어디 매이는 걸 싫어하거든요.”

그는 천성적으로 누군가의 지시를 받으며 일하는 것이 맞지 않는 사람이었다. 전생의 필재가 외국 기업에 잘 안착할 수 있었던 이유는 레녹스 회장의 극진한 대우와 개발에 대한 전권을 줘서 가능했던 일이었다.

“얽매이는 걸 싫어하시는 모양이군요. 사고를 전환하면 어떻겠습니까? 같이 힘을 모아서 세상을 변화 시킨다 이런 식으로 말입니다.”

“참여는 하고 싶은데 제 성격이 좀 지랄 맞아서 하는 말이에요. 저라고 이 매력적인 사업에 동참하고 싶지 않겠어요?”

‘하긴, 남 밑에서 일 할 성격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세계 최대 IT기업인 레녹스의 회장조차 필재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던 것을 고려하면 그의 자존심이 얼마나 강한지 알 수 있었다.

“저는 소프트웨어 개발에 대한 전권을 필재씨에게 드릴 생각입니다. 즉, 별일이 없으면 제가 새로운 개발팀에 관여하는 일은 없을 거라는 말입니다.”

“저 때문에 퇴사하는 직원들이 발생해도 상관없습니까? 저는 능력도 없는 놈이 말까지 안 들으면 못 참는 성격이거든요.”

필재는 도발적인 말투로 말했다.

‘확실히 한국의 기업문화에는 잘 적응을 못하겠군. 하지만 우리한테는 꼭 필요한 인재야.’

수혁은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재능을 가진 필재가 왜 한국을 떠날 수밖에 없는지 짐작이 되었다. 잠시 고민을 하던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합당한 지시에 거부하는 직원이라면 개발팀에서 내보낼 수 있는 권한을 드리겠습니다.”

“흠, 마지못해 말씀하시는 거 같아서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제 말을 들어주셨으니 함께 일하는 방향으로 생각을 해보죠.”

“용민이한테 이야기해서 새 팀을 꾸리라고 지시하겠습니다. 만약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전화하세요.”

수혁은 지갑 안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어 필재에게 주었다.

“아시겠지만 수천 명이 붙어서 만들어도 몇 년이 걸릴지 모르는 작업입니다. 하지만 제가 계획을 세워서 진행을 하면 수천 명을 수백 명 수준으로 줄일 수 있을지 누가 알겠습니까?”

“수백 명이라고 해도 우리 회사가 감당할 규모는 아닌 것 같군요. 조만간 대규모로 사람을 뽑아야겠습니다.”

“아니에요. 일단 있는 직원들하고 작업을 하면서 정확히 견적을 내고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필재는 까칠한 성격을 가졌지만 일을 할 때는 정확하게 하는 사람이었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좋아서 하는 거니까 감사할 거 까지는 없습니다.”

“훗, 알겠습니다.”

수혁은 끝까지 너스레를 피우는 필재의 모습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가을바람이 불어오는 선선한 어느 오후, 그들은 프로젝트에 대한 논의를 계속 해나갔다.

* * *

‘용민이는 왜 이렇게 연락이 없는 거야? 최필재 그 사람이랑 무슨 일을 하는지 궁금해 죽겠는데 먼저 연락하기도 그렇고.’

대화가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아 회사에 들어온 필재는 새롭게 편성된 특별개발팀의 총괄 팀장이 되었다.

그는 부 팀장 자격으로 프로젝트에 참여한 용민과 소프트웨어 개발에 대한 심도 있는 분석을 하고 있었다.

“응, 나 거의 다 왔어. 3분 후면 도착할 거 같아.”

“천천히 와도 돼. 다들 자유롭게 즐기는 분위기라 조금 늦어도 괜찮아.”

수혁은 차 안에서 보성과 통화를 하고 있었다. 이날은 대연 총회가 있는 날이었는데 그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학교로 향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이 옷을 입어보네? 귀찮긴 하지만 잠깐만 있다 오는 거니까 괜찮겠지?’

수혁은 안 그래도 훤칠한 키와 빼어난 외모를 갖추고 있었는데 고급정장까지 갖춰 입자 평소보다 더 빛나보였다.

그는 평소 길거리를 걸을 때면 많은 여성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으나 정작 본인은 외모 관리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 편이었다.

‘캠퍼스에 이런 곳도 있었나? 웨딩홀도 안에 있다고 들었던 거 같은데 확실히 크긴 크네.’

수혁은 모임장소인 한국대 동문회관 근처에 주차를 하고 차에서 내렸다. 회관은 캠퍼스 구석에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결혼식을 포함한 다양한 행사가 주최되는 장소인 만큼 큰 규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가족의 날은 또 뭐야?’

수혁은 회관 건물 입구에 대연 가족의 날이라고 적힌 현수막을 발견했다.

“수혁아 이쪽이야. 예상보다 빨리 왔네?”

주차장에서 기다리고 있던 보성은 차에서 내리는 수혁을 보고는 손을 흔들었다.

“생각보다 차가 안 밀리더라고. 그런데 총회 이름을 왜 가족의 날이라고 한 거야?”

“그게, 네가 부담될까 봐 말 못 했는데…….”

보성은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이미 왔는데 부담될 게 뭐 있어, 뭔데?”

“우리 총회는 원래 가족의 밤이라고 해서 결혼한 회원들은 자신의 배우자나 자식들을 데려올 수 있거든. 네가 참석하겠다고 이야기했을 때 바로 알려줬어야 했는데 마음이 바뀔까 봐 말을 못 했어.”

보성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야, 뭘 그런 걸 가지고 그래.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였어. 그리고 이 사실을 알았어도 참석할 생각이었으니까 신경 쓰지 마.”

“고마워 수혁아.”

수혁이 개의치 않는 모습을 보이자 보성의 얼굴은 금세 밝아졌다.

‘난 또 가족의 날이라고 해서 거창한 의식이라도 치룰 줄 알았는데, 진짜 가족들이 온다는 이야기였잖아?’

보성은 사교 모임을 즐기지 않는 수혁에게 거짓말을 해 미안한 마음이 가득했다. 그러나 당사자는 전혀 부담을 느끼고 있지 않았다.

“자 여기 앉아.”

보성은 테이블들이 세팅된 홀 안으로 수혁을 안내한 다음 앉을 곳을 알려주었다.

‘괜찮을 줄 알았는데, 어색한 건 어쩔 수 없네.’

수혁은 자신의 나이와 비슷해 보이는 또래 친구들과 중년의 어른들이 한데 섞인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지금부터 가족의 날 행사를 시작하겠습니다. 이 모임은 단순히 친목을 도모하는 것을 넘어 서로에 대해 더 깊이 알아가는 자리로서…….”

보성은 대연 재학생 회장으로서 행사의 시작을 알리는 의례적인 연설을 했다.

“지금부터는 자유롭게 돌아다니면서 그동안 만나지 못했던 선배 후배들과 자유롭게 대화를 나누기 바랍니다. 술과 음식은 특별히 동강식품의 회장을 역임하고 있는 김호인 선배께서 제공해주기로 했으니 마음껏 드시기 바랍니다.”

보성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호인아 고맙다, 잘 먹을게.”

“감사합니다, 선배님.”

사람들은 저마다 감사의 뜻을 표했다.

‘뭐야, 되게 거창한 자리인줄 알았는데 아니잖아?’

외부 사람들은 대연을 가입이 어렵고 대외적으로 홍보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엄선된 엘리트들이 들어가는 모임이라고만 알고 있었고 엄격한 규율과 관행이 존재할 거라고 추측했다. 그러나 그들의 예상과 달리 대연은 멤버들 간에 친밀한 관계를 가질 수 있는 편한 환경을 조성해 자연스럽게 인적 네트워크를 구축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모임이었다.

‘이명학에게 저런 모습도 있었어?’

수혁은 보통 때와 달리 선배들에게 깍듯이 대하는 명학을 보고 있었다. 그는 자신보다 나이가 많아도 하찮다고 여겨지면 사람을 함부로 대하는 타입이었으나 이 모임 안에는 적어도 우습게 볼만한 사람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수혁아, 가서 맛있는 것도 먹고 사람들하고 이야기도 나눠. 그리고 부담 갖지 마. 넌 오늘 특별게스트로 참여한 거라 사람들이 귀찮게 하지는 않을 거야.”

“귀찮게 하지 않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수혁은 보성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넌 잘 모르겠지만 멤버들끼리는 대화를 통해 사업상이나 정치적으로 의미 있는 협상을 하기도 하거든. 이곳에서는 대중들 모르게 중요한 안건들이 처리되기도 하는데 넌 멤버가 아니라서 귀찮게 하는 사람이 없을 거라는 이야기야.”

총회는 친목을 다지기 위한 자리이기도 하지만 서로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유용한 수단이 되기도 했다.

사업가, 법조인, 정치가 등 여러 분야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회원들은 친구나, 선배 혹은 후배에게 대연 멤버임을 이유로 여러 부탁을 하곤 했는데 웬만해서는 서로 거절하는 법이 없었다.

“난 비회원이니까 귀찮은 요구를 받을 일이 없다는 거구나? 그건 좋네.”

“그래도 이곳에서 네가 하는 일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몰라. 게스트라고 사람 사귀는 게 금지된 건 아니니까 잘 찾아봐. 난 먼저 일어날게.”

“그래, 좀 있다 보자.”

보성은 여러 선배들에게 인사를 하러 가야했기 때문에 급하게 자리를 떠났다.

- 150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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