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이제 슬슬 돌아가자. 간다고 이야기는 해야겠지?’
오후 6시부터 시작한 대연 총회는 어느새 끝을 달리고 있었다. 모임은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음식과 술을 먹고 즐기는 것 외에 특별한 프로그램은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에 다소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자네가 정평우 어르신이 그렇게 아낀다는 사람인가?”
보성에게 인사를 하고 회관을 떠나기로 마음을 먹던 그 때, 6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장년의 남성이 말을 걸어왔다.
‘아니, 이 사람은 강현제 대표잖아? 무슨 용건으로 나한테 온 거지?’
수혁은 회귀하기 전에 티비에서 많이 보던 유력 정치인 말을 걸어오자 신기했다. 그는 나중에 국회의장과 국무총리도 역임하여 정치적으로 큰 성공을 거뒀던 인물로 일상 생활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자가 아니었다.
“안녕하십니까, 강수혁입니다.”
수혁은 고개를 숙이고 공손하게 인사했다.
“반갑네, 내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 소문대로 인물이 훤칠하구먼.”
“저를 아십니까?”
“정평우 어르신께 자네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네.”
현제는 미소를 지으며 수혁을 알게 된 연유를 알려주었다.
“실례가 안 된다면 할아버지와는 어떤 사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수혁은 그가 평우를 어떻게 알게 됐는지 무척 궁금했다.
“중요한 정치적 결정을 앞두고 헤맬 때면 어르신께 종종 해답을 묻곤 했었네. 그리고 자네랑도 아예 인연이 없었던 것은 아니고.”
“저랑 만나신 적이 있습니까?”
“만난 적은 없지만 자네의 일에 간접적으로 개입한 적은 있다고 할까?”
‘누구시지? 알 거 같기도 한데?’
수혁은 아리송한 기분이 들었다.
“조일오 의원이라고 기억하는가?”
‘아!’
현제의 말을 들은 수혁은 그와 어떻게 인연이 되는지 단번에 이해했다.
“그때는 경황이 없어서 말씀을 못 드렸는데 정말 감사했습니다.”
고교 시절, 조성준이 입원한 병원에 방문했을 때 일오를 만난 기억이 떠올랐다. 사과를 하라며 기세등등했던 일오는 현제가 사건에 개입하자 꼬리를 말았고 수혁은 성준과의 악연을 수월하게 매듭지을 수 있었다.
“감사는 이쪽에서 해야 할 것 같아. 자네가 알지는 모르겠지만 조일오 의원이 자진 사퇴를 한 후, 그자의 비리에 관한 사실이 언론에 접수되어 한동안 떠들썩했었어. 적절한 시기에 제명을 하지 않았다면 당에 큰 피해가 발생할 수 있는 상황이었네.”
“그때는 공부에 매진했던 때라 세상 소식에 어두웠습니다. 피해를 막을 수 있었다니 다행입니다.”
수혁은 당시 뉴스나 신문 같은 것을 보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친구들 또한 공부에 전념하며 학교에 잘 다니고 있던 수혁에게 구태여 성준의 소식을 전하진 않았었다.
“공부하는 입장에서는 차라리 모르는 편이 나을 수도 있었겠지. 조일오 의원은 결국 감옥에 들어갔다네. 다만 자네와 마찰이 있었던 아들 녀석은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군.”
‘어머니는 안 계셨던 거로 아는데…… 그 자식, 그럼 혼자 지내는 건가?’
까맣게 잊고 지냈던 성준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수혁은 마음이 복잡해졌다.
“내가 괜한 말을 한 모양이야. 신경 쓰지 말게. 자네가 잘못한 건 없지 않은가?”
“네, 조금 놀라긴 했지만 개의치 않고 있습니다.”
수혁은 덤덤하게 대답했다.
“수혁 군, 아니. 강 대표라고 해야 하나?”
“대표님이 편하신 대로 부르셔도 됩니다.”
“우리 정부 측에서는 강 대표처럼 IT 사업을 하는 분들에게 많은 관심을 갖고 있네. 알다시피 대통령께서 인터넷과 무선통신사업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지 않는가?”
현제는 손에 들고 있는 와인을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음, 어쩌면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겠는데?’
차분히 이야기를 듣던 수혁은 집권여당의 대표인 현제가 사업에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 정부의 노력으로 우리나라는 세계의 어느 나라보다 높은 인터넷 보급률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높은 보급률에 안주할 것이 아니라 새로운 통신 환경을 조성해 여러 나라의 모범이 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흠, 뭔가 할 말이 있는 거 같구먼.”
현제는 잔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수혁의 말을 경청했다.
“대표님은 와이파이에 대해서 들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미국의 전자기술자협회에서 만든 기술인데 무선으로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게 해 주는 기술입니다.”
“처음 듣는 이야기로군. 계속 이야기해 보게.”
“지금이야 이 기술은 존재만 할 뿐 대중화가 되지 않아 필요성을 잘 못 느끼시겠지만 우리나라가 선도적으로 무선 인터넷 환경을 구축하고 개발·발전시킨다면 나라에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수혁은 무선 인터넷 개발을 통해 국제 표준을 선점하게 되면 국가 브랜드 제고에도 도움이 되고 기업과 국민들에게도 이익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내가 현재 과학기술위의 위원장 겸 당 대표의 직책을 맡고 있기 때문에 자네의 의견을 행정부에 이야기하기 용이한 건 사실이네. 그러나 공공정책도 어느 정도의 수익성이 확보되어야 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지금 나누는 말로는 의견을 전달하기 어렵다네.”
현제는 수혁의 아이디어가 마음에 들었으나, 정부에 의견을 제시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청사진이 필요했기 때문에 선뜻 받아들이지 못했다.
‘스마트 폰을 유통시키기 위해서라도 내 제안을 받아들이게 만들어야 돼. 어떻게 하면 좋을까?’
애매모호한 태도를 보이는 현제를 설득하기 위해 고민을 하던 수혁은 해결책을 생각해냈다.
“마침 WG 그룹의 현명길 회장께서 제가 말한 아이디어로 통신 사업을 추진할 계획이 있는 거 같던데, 이야기를 한번 해 볼까요?”
“그렇게 되면 좋을 거 같기는 한데, 다른 사람들이 볼 때 어떨지 마음에 걸리는군. 아무래도 정치하는 사람이 기업가와 긴밀한 관계를 맺는다는 게 모양새가 좋지 않아서 말이야......”
현제는 기업과 유착하고 있다는 인상을 대중에게 심어 주기 싫었기 때문에 신중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기업 공모전 형태로 의견을 받으면 잡음이 발생하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유착이랄 게 뭐 있습니까? 나라에 이득이 되는 의견을 청취하신 것 뿐이지 않습니까?”
“공모전이라....... 정부 부처와 상의하면 그 정도의 기회는 제공할 수 있을 것 같네.”
현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하는 제스처를 보였다.
‘현명길 회장님께서 마음에 들어 하실 거야. 나중에 부탁할 일이 생겨도 큰 걱정은 없겠어.’
명길은 스마트 폰을 개발하기에 앞서 무선 인터넷 통신망을 구축하는 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여당에 아는 인맥이 없어 정책적인 지원을 받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이었다.
“아이디어를 드리는 대신 조건을 하나만 달아도 되겠습니까?”
“허허, 배포가 제법 크구먼. 나한테 조건을 운운하다니 어디 한 번 말해보게.”
현제는 무선인터넷을 통해 국가경쟁력을 올린다는 방안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선선히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공모전의 주제를 추상적으로 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쪽에서 아이디어를 냈는데 다른 기업들에게 쉽게 단서를 준다면 조금 억울할 것 같아서요.”
“무슨 말인지 알겠군. 그러면 주제를 ‘한국 IT산업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사업 모델’로 정해서 타 업체들이 우리가 논의한 아이디어를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겠네. 대신 심사는 공정하게 이루어질 테니 혹시 떨어져도 서운해 하지 말게나.”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제 의견을 수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 그리고 이것을 드리겠습니다.”
수혁은 지갑에서 명길의 명함을 꺼내 현제에게 주었다.
“조금 당황스러운데? 내가 분명 기업인들과 개인적인 관계를 맺는 건 쉽지 않을 거 같다고 이야기했는데 말이야.”
“통신 환경을 새로 구축하게 되면 정부에서도 수익성과 비용적인 부분 말고도 다방면으로 의견을 구할 일이 생길 겁니다. 그럴 때를 대비해서 명함을 드리는 것이니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수혁은 현제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차분히 전달했다.
“하하, 심사에서 당연히 통과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군, 대단한 자신감이야. 일단은 받아 두고 지켜보도록 하지.”
현제는 수혁의 말투에 확신에 차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통신 사업의 경우 사기업과 정부가 긴밀히 협력해야 하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에 그의 말을 마냥 무시하고 넘길 수는 없었다.
“친구의 초대로 이곳에 와서 많은 분들과 인사를 나눴지만 지금 대표님과의 만남이 가장 소중할 것 같습니다.”
수혁은 보통 때와 달리 상대를 치켜세우는 말을 했다.
“허허 이 사람, 넉살도 좋구먼.”
현제는 수혁의 어깨를 두들기며 기분 좋은 감정을 드러냈다. 이후 두 사람은 제자리에 서서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고 얼마 있지 않아 헤어졌다.
‘후. 여기서 시간이나 낭비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안 좋았는데 강 대표를 만나게 돼서 다행이야. 더 이상 할 건 없는 것 같고 이제 집으로 가자.’
뜻밖의 수확을 얻은 수혁은 보성에게 인사를 하고 회관을 빠져나왔다.
* * *
다음 날이 되었다. 회사에 출근한 수혁은 명길에게 전화를 걸었다.
“회장님. 잠깐 통화 괜찮으십니까?”
“네, 말씀하세요.”
“어제 우연히 강현제 대표님을 만났는데 무선인터넷 사업에 관심이 많아 보여서 WG에 대해 짧게 언급을 했었습니다.”
수혁은 어제 일에 대해 솔직하게 말했다.
“안 그래도 현 정부에 아는 사람이 거의 없어 곤란하던 참이었는데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서로 돕고 사는 거지요. 아, 그리고…….”
수혁은 공모전에 관한 정보와 현제에게 명함을 줬다는 사실도 이야기했다.
“우리에겐 좋은 기회로 보입니다. 조만간 WG 텔레콤에 연락을 해서 작업에 들어가겠습니다.”
명길은 공모전에 대비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현재는 무선 인터넷에 대한 수요가 많지 않기 때문에 지금 당장 수익성을 증명하는 게 쉽지만은 않을 겁니다. 제 생각에는 아이템이 갖고 있는 미래지향적 성격과 잠재력을 강조하는 편이 공모전에 유리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조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표님께서 주신 의견, 직원들에게 잘 전달하겠습니다.”
명길은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저, 스마트 폰 제작은 잘 진행되고 있습니까?”
수혁은 WG의 진척 상황이 궁금했다.
“네, 대표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여러 회사들과 긴밀하게 협의해서 생산에 필요한 부품들을 공급받으려 하고 있습니다. 다행히도 우리 회사를 좋게 봐주는 기업들이 많아서 조만간 대부분의 부품들을 조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스마트 폰에 필요한 부품 사양에 대한 분석이 벌써 끝났습니까?”
“네, 아무래도 우리 기업이 핸드폰 생산을 해 봤던 터라 경험이 많은 직원이 적지 않았고 이들 덕분에 분석을 빠르게 마칠 수 있었습니다.”
‘확실히 대기업이라 그런지, 다르긴 다르구나.’
WG와 계약을 맺은 지 두 달이 지났지만 소프트웨어 개발에 본격적으로 들어가지 못한 수혁과 달리 명길은 차근차근 일을 진행하고 있었다.
“회장님이 알아서 잘하시겠지만 우리가 하는 일은 보안이 철저해야 합니다.”
“그 부분은 걱정 마세요. 제가 인복은 있는 편이라 주변에 믿을 만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넵,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이번에 도와주신 건 잊지 않겠습니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이만 들어가겠습니다.”
용건을 마친 수혁은 전화를 끊었다.
‘후, 지금 남 신경 쓸 처지는 아닌데……’
필재가 회사에 들어온 후부터 소프트웨어 개발 프로젝트는 모두 정지된 상태였다. 그는 수혁이 준 도안을 검토하여 SH커뮤니케이션이 갖고 있는 역량만으로 개발이 가능한지 분석하고 있는 중이었다.
‘퀘스트 내용을 보면 최필재 씨가 긍정적인 답변을 들고 올 거 같지는 않은데…… 하, 사업을 하면서 일이 내 뜻대로 안 될 거 같은 느낌은 처음이네.’
대표실에서 업무를 처리하고 있던 수혁은 가슴 한편에 불길한 예감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 어플을 통해 부여된 퀘스트는 최필재를 영입하는 것뿐만 아니라 소프트웨어 개발 중 발생할 수 있는 어려움을 극복하라는 미션도 함께였기 때문에 그가 불안해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냥 내 일이나 열심히 하자, 어떻게든 되겠지.’
수혁은 머리를 흔들며 잡념을 떨쳐낸 뒤 책상 위에 가득 쌓인 결재 서류들을 빠르게 처리해 나갔다.
- 152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