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서울 압구정동에는 새로 리모델링하여 화려한 자태를 자랑하는 백화점이 있었다. 수혁은 전생에서도 그곳에 가 본 적은 없었지만 부모님에게 좋은 옷을 사드리기 위해 처음으로 방문했다.
“1층에는 주로 명품들을 판매하는데 한번 쭉 둘러보세요.”
“명품이면 비싼 거 아니냐?”
선웅은 매사 검소하게 생활했었기 때문에 명품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돈은 신경 쓰지 마시고 사고 싶은 거 마음껏 고르세요. 엄마, 여기 온 김에 마음에 드는 가방이나 신발이 있는지 살펴보세요.”
수혁은 SH커뮤니케이션과 SH에듀케이션에서 다달이 고액의 월급이 나왔기 때문에 돈은 충분히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게, 보니까 예쁜 것들 천지네.”
혜정은 한눈에 봐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명품들에 마음을 빼앗긴 듯했다.
“엄마, 저 잠시만 전화 좀 받고 올게요.”
부모님과 대화를 나누던 중, 수혁은 회사에서 연락이 오자 잠시 자리를 떠났다.
“여보, 우리 저쪽으로 가 볼까?”
혜정은 프랑스제 명품들이 진열된 브랜드샵으로 향했다.
“하, 나도 모르겠다.”
선웅은 그녀의 뒤를 따라 매장 안으로 들어갔다.
“손님, 너무 잘 어울리세요. 지금 들고 계신 가방은 2001년 신상품인데 다른 백화점 매장에서도 쉽게 찾을 수 없을 거예요.”
직원은 부유한 인상의 손님에게 영업을 하고 있었다.
“쓸만해 보이긴 한데 다른 데도 좀 둘러봐야겠네요.”
“아, 네. 그럼 천천히 보고 오세요.”
직원은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나가는 손님에게 깍듯이 인사했다.
‘하, 진짜 더러워서 못 해 먹겠네. 툭하면 나중에 오겠다, 비싸다....... 오늘 왜 이렇게 운이 없지? 오는 손님마다 이런 식이니 일할 맛이 안 나네.’
깔끔한 정장을 입은 남자는 물건을 사는 고객이 없어 잔뜩 예민해진 상태였다. 그의 이름은 박진우로 백화점에서 일한 지 얼마 안 된 초보 직원이었다.
“어서 오세요.”
진우는 매장 안으로 들어오는 혜정과 선웅을 발견했다.
“네, 저희가 처음이라서 잘 모르는데 괜찮은 옷이 있나 해서요.”
“이쪽으로 오세요.”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아무나 막 들어오는 거야? 젠장, 오늘 정말 왜 이러지?’
그는 평범한 브랜드의 옷을 입은 혜정과 선웅을 보자 짜증이 몰려왔다.
“당신, 이 옷 오래도 입었다. 수혁이가 오늘 사준다고 하니까 새 옷 좀 사자.”
혜정은 선웅이 입은 낡은 옷을 보며 말했다.
“뭐야? 긴 팔 셔츠가 무슨 50만 원이나 해? 난 못 사. 아무리 좋은 제품이라도 그렇지 이걸 어떻게 사달라고 해.”
선웅은 가격표를 보고 질색을 했다.
‘휴, 똥 밟았네. 어디 돈도 없는 거지같은 것들이 여길 오는 거야?’
진우는 이들을 지켜보다가 한숨을 푹푹 쉬었다.
“저기요. 매장을 잘못 찾아오신 거 같은데, 옷을 보시려면 3층으로 가 보세요.”
백화점 3층은 1층과 달리 중저가 브랜드의 옷들을 팔고 있었다. 진우는 혜정과 선웅이 매장 제품들을 살 여유가 없다고 판단했다.
“네? 이 옷들은 파는 게 아닌가요?”
갑작스러운 말에 의아해진 혜정이 물었다.
“음…… 그게 아니라, 다른 손님들도 계시는데 구경을 오래하고 계시면 영업에 방해가 되거든요.”
원래라면 손님에게 이런 식의 언사는 곧장 재재를 받을 수 있는 사안이었으나 순박해 보이는 선웅네 부부를 만만히 본 진우는 거침없이 말을 쏟아냈다.
“무슨 소릴 하는 겁니까?”
선웅은 그의 말에 어폐가 있다고 생각했다.
“저는 단지 손님의 사정을 고려해서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이곳 말고도 3층에 저렴하고 질 좋은 옷들이 많으니 그쪽으로 가 보시죠.”
“허허, 나 참 살다 보니 이런 일이 다 있네? 그러니까, 한마디로 살 형편이 안 돼 보이니까 나가라는 말 아닙니까?”
직원의 속내를 눈치챈 선웅은 기가 막혀 헛웃음이 나왔다.
“하, 적당히 보셨으면 나가시라고요. 우리도 장사해야 할 거 아닙니까? 왜 이렇게 말귀를 못 알아들으시지?”
진우는 매일 일정량의 매출을 올려야 인센티브를 받을 수 있는데 허탕을 쳐 예민해져 있는 상태였다. 그는 매니저에게 고객을 대하는 법에 대해 교육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봐요. 손님한테 왜 이렇게 예의가 없어요? 매니저 있나요? 그분하고 이야기를 해야겠어요.”
“매니저님은 오늘 안 오셨습니다. 그리고 손님께서 먼저 영업을 방해하셨잖아요.”
“우리가 언제 방해를 했다고 그래요?”
말도 안 되는 궤변에 혜정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명품 매장은 처음이시니 잘 모르시겠지만, 이곳에 여러분들이 있으면 싫어하는 고객들도 계신단 말입니다. 깔끔하고 조용한 환경에서 물건들을 보려고 하는데 시장 구경하듯이 떠드는 사람이 있으면 기분이 좋겠습니까?”
‘어차피 촌사람들 같아 보이는데 뭘 알겠어?’
진우의 발언은 매장을 관리하는 회사의 규정에 어긋나고 백화점 입장에서도 그냥 넘어갈 사안이 아니었지만 그는 태연하게 수혁의 부모를 모욕하고 있었다.
“뭐라고요?”
“그리고 이 옷들은 전부 비싼 겁니다. 손님께서 살 수 있는 물건이 아니라 이 말입니다.”
그는 오늘 하루 쌓인 스트레스를 혜정에게 쏟아내고 있었다.
“지금 말 다 했어요?”
무례한 언사를 연달아 이어지자 혜정은 본인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졌다.
“엄마,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어요?”
회사 일 때문에 급하게 전화를 하고 온 수혁은 난데없이 들려온 혜정의 목소리에 놀라 매장으로 달려왔다.
‘보아하니 아들인 거 같은데 왜 이렇게 부모랑 딴판이지?’
진우는 명품 정장에 값비싼 구두로 치장한 수혁을 보며 생각했다.
“아니, 매장에서 물건들을 보고 있는데 글쎄 이 사람이 영업에 방해된다고 나가 달라는 거 있지?”
“아니다 수혁아. 괜히 신경 쓸 필요 없다. 당신, 이만 나가지. 다른 데로 가자고.”
수혁에게 하소연하는 혜정과 달리 선웅은 아들에게 스트레스를 주고 싶지 않은 마음에 가족들을 데리고 딴 곳으로 가려고 했다.
“아버지, 잠시 만요. 엄마, 계속 말씀하세요.”
“저기요, 잡담하시려면 나가서 해 주시면 안 될까요?”
“매장에서 대화하지 말라는 법이라도 있습니까?”
수혁은 진우를 노려보며 말했다.
“영업을 방해하니까 하는 말 아닙니까?”
“물건 하나 살 테니까 그 입 좀 다물어 주시죠! 보아하니 손님도 없는 거 같은데 왜 괜히 시비입니까?”
“……그럼 짧게만 하세요.”
수혁의 기에 눌린 진우는 기세등등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는 내키지 않았지만 잠시 시간을 주기로 했다.
“우리가 들어올 때부터 저런 식으로 사람을 계속 건들더라고. 그리고 조금 전에는 우리를 무슨 진상 손님 취급하면서 나가라고 하는데 얼마나 황당하던지......”
“말씀 안 하셔도 어떤 상황인지 대충 짐작이 가네요.”
수혁은 눈앞의 직원이 옷차림만 보고 부모님을 함부로 대했을 거라고 추측했다.
“이봐요. 여기 매니저는 그쪽에게 고객을 무시하라고 가르쳤습니까?”
“무시라니요? 그런 적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 입장에서는 물건을 사는 고객을 우선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한마디로 손님도 다 같은 손님이 아니라는 말이네요?”
“뭐, 그렇죠?”
‘이 자식 봐라? 완전히 개념 없는 새끼잖아?’
수혁은 진우의 뻔뻔한 태도에 혀를 내둘렀다.
“아버지, 엄마랑 잠깐 나가 있으실래요? 직원이랑 잠깐 이야기 좀 하고 갈게요.”
“말도 안 통하는 사람이랑 무슨 대화를 하려고.”
선웅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니에요. 서로 얼굴 붉혀서 뭐하겠어요, 좋게 해야죠. 조금 이따 앞에서 봐요.”
“알았다. 빨리 와라.”
‘이대로 넘어갈 순 없지.’
아버지께 말한 것과 달리 수혁은 무례한 직원에게 본때를 보여 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카운터에서 딴청을 피우고 있는 진우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손님들이라고 다 같은 게 아니라는 그쪽의 논리라면 이 매장에서 비싼 물건을 산 사람이 귀한 손님이 되겠네요?”
“아, 뭐. 예.”
진우는 딱히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얼버무렸다.
“됐고요. 제가 쓸 만한 시계를 보려고 하는데 볼 수 있을까요?”
“좀 전의 일은 사과드리겠습니다. 어떤 스타일을 찾으십니까?”
건방을 떨던 진우는 수혁이 물건을 구매할 것처럼 말하자 대번에 태도를 바꿨다.
“음, 저 시계가 좋겠군요?”
수혁은 유리함에 들어있는 시계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탁월한 선택입니다. 이 시계는 본사에서 특별히 스위스 장인을 고용해서 만든 시계입니다. 디자인부터 기능까지 부족한 것이 없어 부유층들 사이에서 호평 받고 있는 제품입니다.”
“음, 생각한 것보다 싸군요.”
수혁은 1,200만 원이라고 쓰여 있는 가격표를 보며 말했다.
“네? 하하하 더 좋은 것도 있는데 보여 드릴까요?”
진우는 실적을 올릴 수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져 싱글벙글 웃었다.
“귀한 손님이 돼서 그런가, 확실히 대하는 게 다르긴 하네.”
“물론이죠. 이 걸 한 번 보시겠습니까? 이 제품은 매장에도 하나밖에 없는 시계인데 장인들이 정성스럽게 세공한 다이아몬드들이 박혀 있어 럭셔리한 느낌을 줍니다.”
그는 수혁의 비아냥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물건을 보여 주었다.
“뭐 나쁘지 않네. 이걸로 하지.”
‘뭐야, 아까부터 왜 계속 반말이야? 그런데 나한테 사기 치는 건 아니겠지?’
진우는 기분이 상했지만 3,000만 원에 달하는 시계를 팔아야 했기 때문에 꾹 참았다.
“저, 죄송한데 돈이 있으신 건 맞죠?”
“훗, 이거면 되나?”
수혁은 천만 원 수표 3장을 지갑에서 꺼내 눈앞에서 흔들었다.
“……제가 모르고 실언을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돈이 있다는 것을 확인한 진우는 크게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 했다.
“됐고, 가서 포장이나 해 와.”
“네, 알겠습니다.”
이 매장은 판매한 물건의 가격에 따라 인센티브를 다르게 적용했는데 수혁이 고른 시계는 초고가의 제품이었기 때문에 진우는 기분이 나빠도 비위를 맞추는 수밖에 없었다.
“돈이 좋긴 좋나 봐? 아까랑 완전히 다르네?”
수혁은 시계를 포장하는 진우를 보며 말했다.
“시계 케이스도 여러 종류가 있는데 어떤 거로 하시겠습니까?”
그는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꾹 참고 영업에만 집중했다.
“그냥 가장 비싼 거로 줘. 안 그랬다가는 또 사람을 개 무시할 거 아니야?”
“저, 손님.”
“왜? 할 말이라도 있어?”
굴욕적인 상황을 견디며 물건을 판매하기 위해 애를 쓰던 진우는 더 이상 참기 어려웠는지 항의하기 시작했다.
“자꾸 그렇게 곤란하게 구시면 저도 좋게 대하기 어렵습니다.”
“와, 시계 좀 사러 왔는데 왜 그러는 거지?”
수혁은 부들거리는 진우를 보며 능청을 떨었다.
“아무리 소중한 고객님이라고 해도 자꾸 이러시면 서비스를 제공하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크흠, 아무래도 내가 그쪽을 힘들게 한 거 같네. 미안해.”
“힘든 것까지는 아니지만 서로 기분 좋은 방향으로 가면 어떨까 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진우는 감정을 다스리며 침착하게 말했다.
“에이 씨, 그러면 내가 잘못했으니까 그냥 안 살게. 아무래도 제가 실례를 저지른 것 같군요. 수고하세요.”
수혁은 대번에 말투를 바꾸더니 들고 있던 수표를 지갑에 넣었다.
“야, 나이도 어려 보이는데 뭐 하는 짓이야!”
수혁의 행동에 이성을 잃은 진우는 눈을 부릅뜨고 말했다.
“죄송합니다. 좀 전에 나이도 어린놈이 어른들께 함부로 대하는 걸 보고 한 번 따라 해봤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거기 안 서?”
그는 등을 돌리고 매장을 나가려는 수혁을 잡으려 했다. 그러던 그때,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 수군대기 시작했다.
“직원인 거 같은데? 왜 저러지?”
“나도 모르겠어, 무슨 일이 있었나 봐. 보니까 손님이랑 싸우는 것 같은데?”
‘이런 젠장, 그만두자. 에이, 오늘은 일진이 왜 이렇게 사납냐?’
진우는 일이 커지는 것을 염려하여 쫓는 것을 그만두었다.
‘쥐새끼 같은 놈. 내가 가만두지 않겠어.’
수혁은 씩씩대며 들어가는 직원의 뒷모습을 노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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