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화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2001년이 얼마 안 남은 어느 날, 수혁은 대표실에서 메일을 확인하고 있었다.
‘됐다. 이제 시작만 하면 되겠어.’
수혁은 사업 기획안 작성을 완료하고 석호에게 메일을 보냈었는데 지금 막 그에 대한 회신이 왔던 참이었다.
그는 곧장 인터폰을 들어 사람들을 호출했다.
“박유신 본부장이랑 김용민 팀장 좀 들어오라고 해요.”
얼마 후 노크 소리와 함께 용민과 유신은 방으로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방금 제일물류에서 답신이 왔는데 조만간 관계자를 보내 지오쇼핑 설립과 발전에 정식으로 동참하겠다는 업무협약서를 들고 오겠답니다.”
“아, 다행입니다. 그럼 언제부터 일을 시작하면 될까요?”
“일단, 홈페이지 제작과 물류창고로 쓸 장소를 모색해야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1월 말이나 2월 초에 공사에 들어갔으면 좋겠군요.”
수혁은 유신의 질문에 답변하며 서류를 건네주었다.
“이건……?”
“그 서류에 지오쇼핑에 관한 세부적인 계획들을 모두 정리해 두었습니다. 물류창고들의 역할과 운영 방식을 적어 두었으니 꼼꼼히 확인해 주세요.”
“저 죄송하지만, 창고를 지으려면 건물의 용도가 반영된 도면이 필요합니다. 내용을 분석하고 전문가들이 도면을 그리는 데만 해도 시간이 꽤나 걸리기 때문에 1월 말에 공사를 시작하는 것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유신은 SH커뮤니케이션의 본사 건물을 올리는 데 쌓았던 경험을 떠올리며 말했다.
“도면을 그려야 한다고요?”
“도면 외에도 참고할 수 있는 건축 모형도 필요합니다. 대표님이 생각하는 창고는 단순히 물건을 쌓는 공간이 아니라 공장 설비도 들어가고 많은 인력들이 일하는 장소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용도에 맞게 건물을 설계해야 하는데 그 과정이 꽤나 복잡할 겁니다.”
“그 부분은 제가 해결해 보겠습니다. 일단 전문가들을 빨리 섭외해서 일을 시작하세요.”
“그걸 대표님이 어떻게……? 혹시 아는 분이라도 있으십니까?”
유신은 건축 설계에 대한 경험이 없는 수혁이 호언장담하자 의아해했다.
“제가 며칠 내로 방법을 찾아볼 테니까, 저만 믿으세요.”
“기획안 분석과 부지 선정이 끝나는 대로 사람들을 찾아보겠습니다.”
그는 수혁을 신뢰하고 있기에 더 이상 묻지 않기로 했다.
“좋습니다. 그리고 이걸 받으세요.”
수혁은 석호에게 받은 명함을 유신에게 주었다.
“제일물류 전무이사 이영섭? 이분은 왜……?”
“정석호 회장님의 최측근이신데, 사업을 하다가 막히는 부분이 있으면 편하게 물어보라고 그러더군요.”
“넵. 궁금한 게 있으면 이분께 조언을 구하겠습니다.”
영섭은 제일물류의 초창기 멤버로 회사의 운영 시스템과 성장 과정을 모두 꿰고 있는 사람이었다.
“말만 창고지, 전국 어디든 신속하게 물건을 전달할 수 있는 택배 유통망을 구축하는 건 이 사업의 핵심 사안입니다. 부디 최선을 다해 주세요.”
“명심하겠습니다. 기획안을 비롯한 여러 정보들을 다각도로 검토하여 실수 없이 일을 진행하겠습니다.”
유신은 결의에 찬 모습으로 대답했다.
“팀장님.”
“네, 대표님.”
용민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최근에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들은 최필재 팀장에게 모두 위임하고 이제는 SH커뮤니케이션의 본부장으로서 힘써 주세요.”
“네?…… 그럼 박유신 본부장님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사전에 이야기를 듣지 못한 용민은 깜짝 놀라 물었다.
“박유신 본부장님은 이제 지오쇼핑의 사장이 될 겁니다. 따라서 누군가는 공백을 메워야 했는데…… 저는 팀장님이 적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대표님, 아무래도 사람을 잘못 본 거 같습니다. 저는 연구원이나 개발자가 성향에 맞지, 여러 업무를 총괄하는 건 자신이 없습니다.”
용민은 침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저, 본부장님. 잠시만 자리를 비켜 주시겠습니까?”
“네, 먼저 나가 보겠습니다.”
수혁은 원활한 대화를 위해 유신을 밖으로 내보냈다.
“용민아, 네 마음은 이해가 가는데 이번만은 내 말에 따라 줘라.”
“그러고 싶기는 한데, 내가 프로그램 만드는 걸 얼마나 좋아하는지 너도 알잖아. 네 말이라면 지금까지 다 받아들였지만 이번만큼은 너무 힘들다.”
용민은 보통 때와 달리 수혁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럼 최필재 팀장 밑에선 계속 일할 수 있어? 들어보니까 최 팀장 성격이 완벽주의라 직원들이 아무리 일을 열심히 해도 성에 차지 않는다는데?”
“그래서 말인데 수혁아, 예전처럼 개발팀을 따로 나누면 안 될까? 그 사람 밑에서 일하는 게 너무 힘들다.”
용민은 필재 못지않게 간섭받는 것을 싫어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럼, 지오쇼핑 홈페이지 제작 건은 네가 전담해서 진행해봐.”
“수혁아…….”
그의 어두웠던 낯빛은 언제 그랬냐는 듯 싹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본부장 일을 같이 겸해 줬으면 좋겠어. 난 단순히 능력 좋은 사람이 아니라 믿을 만한 사람을 내 옆에 두고 싶단 말이야.”
“후, 알겠어. 노력해 볼게.”
“개발팀원들을 데려가려면 최 팀장의 허락이 필요할 텐데, 그 부분은 내가 케어 해줄게.”
“고마워 수혁아. 홈페이지 제작에 필요한 견적이 나오면 바로 보고할게.”
“그런 것들은 이제 나에게 일일이 보고 안 해도 돼. 1월부터는 본부장으로서 네가 알아서 판단할 문제들이야.”
수혁은 용민이 회사를 경영할 수 있는 역량을 키우길 바랐다.
“오늘부터 당장 본부장님에게 인수·인계받으면서 최대한 배워 놓을게. 그건 그렇고, 최 팀장이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네 말이라면 깍듯하던데 어떻게 된 거야?”
“예전에 콧대를 한번 눌러 줬더니 그 뒤로 말을 잘 듣더라고.”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 사람이 언젠가 팀원들을 앞에 두고, 네가 엄청난 사람이라며 극찬을 하더라고.”
용민은 호기심이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훗, 그런 게 있어. 아무튼 앞으로 잘해 보자고. 다음 달부터는 무척 바빠질 테니까.”
“쳇, 나한테도 말할 수 없는 거야?”
“하하, 궁금하면 최 팀장에게 직접 물어보든지.”
수혁은 일 이야기를 뒤로한 채 용민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
* * *
‘하, 뭘 알아야 말이지. 건축에 대해서 아는 게 없는데 뭐부터 해야 되나?’
밤 11시가 다 돼가는 늦은 밤, 수혁은 사무용품점에서 커다란 종이를 하나 산 다음 대표실에 들어와 고민에 빠져있었다.
‘일단 큰소리는 뻥뻥 쳤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시간을 넉넉히 주고 진행하라고 할 걸 그랬나?’
그는 건축 지식 하나 없이 방법을 찾겠다고 나선 것을 은근히 후회하고 있었다.
‘그냥 그리는 거면 자신이 있는데 규격에 맞춰서 도면을 그리자니 너무 귀찮잖아. 가만, 만약에 창고의 외형과 내부를 상세히 그려 놓으면 건물 짓는데 어떻게든 도움이 되지 않을까?’
수혁은 좋은 생각이 떠오르자 바로 연필을 잡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분명 이쪽에는 품질 관리 요원들이 있었고, 이쪽은 하차장이었던 거 같아. 그래야 택배 차량이 쉽게 오가지.’
수혁은 회귀하기 전에 국내 제일의 전자상거래 회사인 스팅에서 알바로 일한 적이 있었다. 스팅은 한 남자가 한국계 일본인 재벌에게 거액의 투자금을 받아 설립한 기업으로, 단시간에 엄청난 성장을 해 유통업계를 주름잡는 회사가 되었다.
‘스팅의 물류창고를 참고하면 그리는 데 어렵지 않겠어.’
수혁은 과거 일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정신없이 그림을 그렸다.
‘다 됐다.’
커다란 전지 안에는 물류창고의 내부와 외형이 상세히 묘사되어 있었다. 그는 도구 이용 프로그램의 도움으로 지난 밤 동안 그림을 완성할 수 있었다.
‘벌써 7시잖아? 직원들 출근하려면 시간이 좀 남았는데 잠시 눈 좀 붙일까?’
그는 대표실에 마련된 간이침대에 눕더니 잠에 빠져들었다.
* * *
‘뭐야? 왜 이렇게 시끄러워?’
끊임없이 울리는 전화기 소리에 수혁은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네, 전화 받았습니다.”
“대표님, 20분 후에 회의 시작인데, 방에 계신 것 같아서 연락드렸습니다.”
“그렇군요. 바로 나가겠습니다.”
‘젠장, 몇 시까지 잔 거야?’
창밖을 보니 해는 중천에 떠 있었고, 시간은 점심을 훌쩍 지나 있었다.
수혁은 서둘러 준비를 마치고 회의장으로 향했다.
“올 한 해를 마무리하는 결산 회의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각 계열사 임직원들은 모두 착석해 주시기 바랍니다.”
찬명은 마이크를 잡고 사회를 봤다. 이날은 SH커뮤니케이션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SH에듀케이션 임원들까지 모두 참석하는 그룹 총 회의가 있는 날이었다.
“대표님,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한 사장님, 잘 오셨습니다. 이곳은 처음이시죠?”
급하게 준비하고 나온 수혁은 정길을 발견하자 반가운 기색을 보였다.
“예전부터 부사장님과 한 번쯤 가 보자는 이야기는 나눴지만 직접 오는 건 처음입니다.”
정길과 찬명은 공동 부대표라는 명칭 대신 각각 사장과 부사장의 직함을 달고 있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도록 하죠. 다들 기다리고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수혁은 정길을 데리고 회의장 안으로 들어갔다.
“대표님 들어오십니다.”
찬명이 말하자 임원들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들 앉으세요, 일단 늦어서 죄송합니다. 저는 SH그룹의 강수혁 대표입니다. 컨퍼런스 시작에 앞서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 일하고 있는 임원 여러분들에게 먼저 감사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우리 SH그룹은…….”
임원들이 자리에 앉은 걸 확인한 수혁은 예정된 순서에 따라 개회사를 했다.
“다음으로 각 계열사 임원들의 소개 시간이 있겠습니다.”
“안녕하십니까, SH에듀케이션을 맡고 있는 한정길 사장입니다. 저는…….”
통상적으로 회의라 하면 임원 간의 자기소개는 하지 않기 마련이지만, 이날은 처음으로 그룹 회의가 있는 날이었기 때문에 서로 통성명을 했다.
“우리 그룹은 특성상 회사들 간의 협력을 요하는 프로젝트들이 적지 않게 있습니다. 다들, 이번 기회를 통해 서로에 대해 잘 알고 지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럼, 먼저 SH에듀케이션에 속한 각 계열사 책임자들의 업무 보고가 있겠습니다.”
찬명의 진행에 따라 임원들은 한 해를 마무리하는 결산 보고를 했고. 수혁은 차분하게 그들의 발표를 듣고 있었다.
“한 사장님, 일전에 제가 말씀드렸던 건 잘 진행되고 있습니까?”
수혁은 예전에 일식집에서 정길과 찬명에게 지시했던 사안들을 점검하려고 했다.
“그게, 나름대로 자료들을 준비해서 최 팀장님에게 전해 드렸지만, 아직 답신을 못 받은 상황입니다. 죄송합니다.”
정길은 일에 대한 진척이 없던 터라 난감해했다.
“대표님, 그 부분에 대해 설명드리겠습니다. 현재 SH에듀케이션에 소속된 자회사들이 제공하는 강의 서비스들에 대한 작업은 소프트웨어가 있어야 진행될 수 있습니다.”
“흠, 거기까지만 하시죠. 무슨 말인지 알겠군요.”
필재는 스마트 폰에 들어갈 운영체계와 플랫폼이 완성되어야 동영상 강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어플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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