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성질은 지랄 같아도 다루기는 쉽겠어. 서울로 돌아가기 전까지 잘 구슬려봐야지.’
명규는 기뻐 날뛰는 명학을 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것들은 어떻게 하지?”
명학은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 외투를 걸치다가 책상에 놓인 서류 더미로 눈길이 쏠렸다.
“걱정하지 마십쇼. 다른 직원이 인계받도록 조치해 놓겠습니다. 가시죠, 일송백화점 책임자에게 전무님이 간다고 미리 말해 놓았습니다.”
일송유통은 택배업 외에도 마트, 백화점 등 다양한 분야에 진출한 상태였다.
“좋아, 이런 식으로만 하라고. 내가 서울로 돌아가면 확실히 챙겨 줄게!”
명학은 남자의 어깨를 거칠게 두드렸다.
‘개 같은 새끼, 아파 죽겠잖아.’
그는 강한 두드림 탓에 짜증이 치밀어 올랐지만, 표정관리를 하며 명학의 비위를 맞추는데 집중했다.
“자, 가자고.”
“넵.”
기분이 좋아진 명학은 휘파람을 불며 회사를 빠져나갔다.
* * *
‘케이턴 대학교 비즈니스 프로그램? 뭐야, 이런 것도 있었어?’
개학을 앞둔 수혁은 조기 졸업 요건을 확인하기 위해 학교 홈페이지에 들어갔다가 뜻밖의 발견을 했다. 케이턴은 세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명문 대학으로, 경영학 분야에서는 최고로 인정받는 학교였다.
‘한 학기 과정이라 부담도 없네. 마지막 학기는 미국에서 마무리해야겠다. 내가 알기론 미국에서도 내로라하는 집안 자제들이 비즈니스 프로그램을 듣는다는데, 이 기회를 잘 살려야겠어.’
수혁은 SH가 세계적인 기업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미국 시장을 공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지 사정을 잘 아는 조력자가 필요했는데, 케이턴이라면 연줄을 만들기에 훌륭한 곳이라고 판단했다.
‘휴, 올해 학교를 마치려고 했는데 사업을 하다 보니 결국 한 학기가 밀리게 되었네…….’
수혁은 졸업 요건을 확인하다가 한숨을 쉬었다. 원래는 2002년까지 학기를 마무리하려고 했으나 바쁜 일정 탓에 결국 4학년 1학기까지 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게다가 한국대를 졸업하기 위해서는 학교에서 지정한 의무 봉사 시간을 모두 채워야했기 때문에 예상보다 졸업이 늦어질 확률이 높았다.
‘다음 달부터는 봉사활동도 시작해야겠어. 하여튼 은근히 시키는 것도 많다니까?’
그는 잠시 투덜대다가 대학과 연계된 자원봉사단체들을 검색하며 남은 시간을 보냈다.
* * *
2월 중순의 어느 날, 명학은 명규를 데리고 대전에 위치한 일송백화점을 둘러보고 있었다.
“7층에 VVIP룸이 있는데 괜찮으시면 그곳에서 대화를 나누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지점장은 새파랗게 어린 명학을 깍듯이 대하고 있었다.
“그렇게 하시죠. 그건 그렇고 서울에만 있어서 몰랐는데, 대전에도 제법 쓸 만한 지점이 있었군요. 열심히 관리한 티가 납니다.”
명학은 고개를 끄덕이며 거만하게 말했다.
“하하,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임원들이 타는 엘리베이터는 따로 있습니다.”
일송은 위계서열이 엄격한 집단으로, 임원과 일반 직원을 대우하는 방식에 있어서 격차가 큰 회사였다.
“오호, 그래요? 이봐 오 부장.”
“네, 전무님.”
“미안하지만 다른 엘리베이터를 타 줘야겠어. 지점장님이 임원들만 탈 수 있다고 하잖아.”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순간적으로 당황한 명규는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이며 물었다.
“이 사람 이거, 말귀가 밝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영 아니네?”
“저…… 이 엘리베이터가 임원 전용이긴 하지만, 전무님과 같이 온 일행은 얼마든지 탈 수 있습니다.”
지점장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렇게 할 수는 없죠. 사람은 자신의 분수를 알아야 하는 법입니다. 자, 가시죠.”
명학은 명규를 쳐다보지도 않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예의가 없는 사람이군. 본인보다 적어도 20살 이상 많은 사람한테 말하는 꼬락서니하고는.’
함께 타고 가는 지점장조차 속으로 욕을 하며 억지웃음을 지었고 명규는 한동안 멍하니 서 있다가 다른 엘리베이터 쪽으로 이동했다.
각자 다른 엘리베이터를 타고 도착한 백화점 7층 VVIP실. 이곳은 한 해 동안 일정기준 이상의 돈을 지출하는 고객들과 회사 귀빈들이 쉬어가는 장소로 넓고 쾌적한 환경을 자랑하고 있었다.
“경치가 볼 만하군요.”
“그렇습니다. 다행히도 백화점 인근에 시야를 가릴 만한 고층 건물이 없어서 경치를 구경하기엔 그만입니다.”
지점장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방도 조용해서 풍경을 즐기기에 딱인 것 같습니다.”
불쾌한 일을 당했던 명규는 언제 그랬냐는 듯 비위를 맞추고 있었다.
“다른 고객들은 이 방을 못 쓰는 겁니까?”
VVIP 라운지에는 고급 소파와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음료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리고 한쪽 구석에는 특실까지 마련되어 있었는데, 그곳은 주로 본사에서 파견 온 임원을 대접할 때 쓰곤 했다.
“뭐, 쓰려면 쓸 수야 있겠지만 오늘은 전무님이 계셔서 힘들지 않겠습니까?”
“푸핫, 이거 백화점 운영만 잘하실 줄 알았는데 농담도 잘하시는군요?”
명학은 지점장의 아부가 마냥 싫지는 않았다.
“농담이 아니라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는 거지요. 그나저나 요즘 들어 고민이 하나 있습니다.”
“뭡니까?”
“서울에 가족들이 있는데 부인이 자식 교육 때문에 걱정이 많은가 봅니다. 작은아들이 조금씩 엇나가고 있는데 제 도움이 필요하다며 힘들어하더군요…….”
“저런, 아들 교육은 아무래도 어머니보다 아버지가 해야 효과가 더 큰 법이지요. 서울에서 근무하셨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텐데 안타깝네요.”
명학은 겉으로나마 그를 위로해 주는 척했다.
“회장님께서 전무님을 각별히 신경 쓴다고 들었습니다. 나중에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부탁이라면……?”
명학은 부탁의 내용이 대충 짐작이 갔지만 짐짓 모른 척했다.
“말씀드리기 전에 드릴 게 있는데 이것부터 좀 받으시죠.”
지점장은 품속에서 봉투를 하나 꺼냈다.
“호…….”
“그냥 성의 표시를 하는 거라 얼마 되지는 않습니다.”
봉투를 슬쩍 열어 보니 대략 3,000만 원 상당의 백화점 상품권이 들어 있었다.
“삼촌께 물어봐서 서울로 올 수 있는지 한번 알아보죠.”
“이 지점뿐만 일송백화점이면 어디에서든 사용할 수 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일이 잘 처리되면 더 챙겨 드리겠습니다.”
“크흠, 그런 부분은 지점장님께서 알아서 해 주세요.”
“후후, 걱정하지 마십쇼. 제가 속 시원하게 알아서 잘해 드리겠습니다.”
지점장은 간사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저 능구렁이 같은 놈. 점잖은 척은 다 하더니 기회만 엿보고 있었잖아?’
명규는 관심을 빼앗겼다는 생각이 들자 기분이 언짢아졌다.
“지점장님 말고도 대전에 전무님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오늘은 이쯤 하시고 내일 차차 더 둘러보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저 새끼가?’
능청을 떨며 은근슬쩍 자신을 견제하는 명규에게 화가 난 지점장이 한마디 하려는 순간, 명학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음? 저쪽에 큰 공사가 벌어지고 있는 모양입니다.”
“아, 맞습니다. 며칠 전에 시공한 이후 하루도 쉬지 않고 공사를 하고 있습니다.”
명학은 창밖에 보이는 커다란 공터에서 각종 건설기계가 쉬지 않고 움직이는 것을 발견했다.
“저 정도 규모면 상당히 큰 공사인데 뭘 짓고 있는 겁니까?”
“그게, 우리 회사와 연관이 전혀 없지는 않습니다.”
“그래요?”
그는 지점장의 말을 듣자 호기심이 들었다.
“제가 알아본 바에 따르면 물류센터를 짓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물류센터요? 그럼 유통회사라는 말인데…… 도대체 어딥니까?”
이야기를 듣던 명규는 깜짝 놀라 물었다.
“틀림없이 제일물류나 거산통운, 둘 중 하나겠지요.”
“하지만 그 둘은 이미 대전에 물류창고를 가지고 있는데 구태여 또 지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아이 씨, 그냥 해 본 말인데 뭘 그렇게 꼬투리를 잡아?”
명규의 의견을 들은 명학은 괜히 짜증을 냈다.
“죄송합니다…….”
“허허, 이번만큼은 오 부장님이 틀린 것 같진 않습니다.”
‘재수 없는 새끼. 하여간 나이 많은 것들은 능구렁이들이 많다니까.’
은근하게 비꼬는 말에 명규는 빈정이 상했지만 꾹 참았다.
“그럼 다른 회사라는 말씀이십니까?”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지오쇼핑이라는 곳에서 짓는다고 합니다. 유통 쪽에서 근무한 지 꽤 오래됐지만 못 들어 본 걸 보면 신생회사인 것 같습니다.”
“뭐, 뭐라고요? 지오쇼핑이요?”
명학의 얼굴이 갑자기 새하얘지기 시작했다.
“포털 회사 중에 지오닷컴이라고 있는데 혹시 그 회사와 연관이 있는 거 아닐까요?”
“닥쳐 이 새끼야!”
“저, 전무님,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대화에 참여해 볼 생각으로 말을 꺼낸 명규는 영문 모를 상황에 황당해했다.
“헉, 헉…… 그것까진 알 필요 없고. 그냥 앞으로 그 이야기는 내 앞에서 꺼내지 마.”
“전무님, 진정하시죠. 이러다가 몸이 상하시겠습니다.”
지점장은 화를 이기지 못해 숨을 헐떡거리는 명학을 달랬다.
“지오쇼핑이 지오닷컴과 연관된 게 맞습니까?”
“정확한 건 모르겠지만, 오 부장이 말한 걸 들어 보면 관련이 있을 것도 같습니다. 제가 한번 알아볼까요?”
“아니에요. 이 일은 제가 직접 알아보고 처리하겠습니다.”
명학은 들끓는 감정을 다스리며 차분하게 말하려고 노력했다.
‘포털 사업으로도 모자라서 물류 사업까지 진출하려고 해? 개 같은 새끼, 분수도 모르고 어디서 함부로 나대는 거야?’
그는 하는 일마다 성공을 거두는 수혁에게 큰 열등감을 느끼고 있었다.
‘공사 규모를 보니, 내가 모르는 사이에 돈을 많이 번 것 같은데……. 아니야, 우선 진정하고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먼저 알아봐야겠어.’
명학은 이번만큼은 수혁을 골탕 먹이기로 마음을 먹었다. 따라서 이전처럼 무턱대고 달려들기보다는 전략적으로 접근해서 지오쇼핑을 무너뜨리기로 작심했다.
“전무님,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십니까?”
“오 부장, 아까는 내가 말이 좀 심했지? 이해하라고. 오늘은 좀 예민해서 말이야.”
“괜찮습니다. 오히려 제가 사려 깊지 못한 언행을 한 것 같아서 죄송합니다.”
심한 말을 들어 얼굴이 굳어 있던 명규는 금세 표정을 풀었다.
“무슨 일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별거 아닙니다. 그냥 옛 생각이 나서 잠시 흥분했습니다.”
명학은 굳이 사람들에게 지오닷컴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기분도 잡쳤는데 그만 가자. 지점장님, 죄송하지만 먼저 가 보겠습니다. 나중에 또 보죠.”
“제가 배웅해 드리겠습니다.”
“아닙니다. 그냥 제가 알아서 가겠습니다. 오 부장, 가자고.”
명학은 지점장의 제안을 가볍게 거절했다.
“네, 조심히 가십쇼.”
“그래요, 잘 지내고 계세요. 아, 그리고 말은 한번 해 보는데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니까 너무 기대하진 마세요.”
“…….”
명학은 무책임한 말을 남기고 백화점을 빠져나갔다.
‘후…… 왠지 믿음이 안 가. 돈만 받아 처먹는 건 아닌지 모르겠어.’
속이 답답해진 지점장은 고개를 절래절래 저으며 담배를 입에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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