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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 없는 회귀-165화 (165/316)

165화

‘지오쇼핑이면 온라인 쇼핑몰을 할 생각인 건가? 그런데 왜 물류창고를 짓는 거지? 이해되지 않는 게 한두 개가 아니야.’

백화점을 빠져나온 명학은 살고 있는 오피스텔로 돌아왔다. 그는 수혁을 쓰러뜨리기 위한 방법을 끊임없이 생각했지만 마땅한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안 되겠어, 직접 알아봐야겠다.’

그는 묘안이 떠오르지 않자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전화 받았습니다.”

“나야. 바빠?”

“앗, 대표님 오랜만입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젊은 남자의 목소리가 핸드폰 사이로 새어 나왔다.

“김 대리, 회사 생활은 잘하고 있어?”

“그냥 똑같죠 뭐…….”

남자는 SH커뮤니케이션 직원으로, 과거 명학이 대표로 있던 시절에 근무했던 사람이었다.

“괜히 눈치 볼 것 없어, 잘 지내면 좋은 거 아니야?”

“아닙니다. 회사에 이런 저런 일이 많아서 좋은지도 모르고 다니고 있습니다.”

명학의 속이 좁다는 것을 아는 직원은 한마디 한마디 조심스럽게 하고 있었다.

“최근에 강수혁이 유통 쪽을 기웃거리면서 설치고 다니는 것 같은데 아는 거 없어?”

“아, 지오쇼핑 말씀이시군요. 안 그래도 포털 부서에서 근무하던 직원들 중 상당수가 그쪽으로 넘어가 일을 도와주고 있습니다.”

“넌?”

“저도 인사이동 명령을 받아 지오쇼핑 설립에 힘을 보태고 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십니까?”

남자는 자꾸 질문이 들어오자 괜히 불안해했다.

“빌어먹을 새끼, 지오닷컴은 내가 만든 건데 뻔뻔하게 지오쇼핑이라는 이름으로 론칭을 해? 배알도 없는 새끼.”

“…….”

“야, 왜 말이 없어?”

“강 대표님께서 배려심이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남자는 마지못해 수혁을 비판했다.

“그래, 너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줄 알았어. 그래서 말인데 날 좀 도와줄 수 있어?”

“……죄송합니다. 전 이제 SH의 직원이지 대표님의 사람이 아닙니다. 부디 제 상황을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뭐? 개자식이 이제 와서 충신인 척하네? 네가 지금까지 했던 행동들은 잊었어?”

명학은 좋게 말해서 통할 거 같지 않자 거칠게 그를 밀어붙였다.

“제가 뭘 어쨌다고 그러십니까?”

“너, 여태까지 나한테 보낸 SH 내부 서류들 기억하지?”

“어차피 기밀서류가 아니기 때문에 편하게 드렸던 겁니다. 강 대표님이 처음 취임하셨을 때 만든 회사 현황분석보고서랑 매출표 따위가 다인데 뭘 어쩌시려고 그러십니까?”

“흐흐, 어찌 됐든 유출한 거 자체가 잘못된 거 아닌가? 그리고 내가 사준 술들도 잘 받아 처먹었고. 이 사실을 강수혁이 알게 되면 어떻게 될까?”

명학은 비열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냥 딱 한 번만 도와줘, 그러면 앞으로 다시는 연락을 안 하지.”

“못 믿겠습니다. 차라리 대표님께 솔직하게 말씀드리고 당신과는 인연을 끊겠습니다.”

어처구니없는 협박에 화가 난 남자는 더 이상 휘둘리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다.

“너 영업비밀침해죄라고 들어 봤어? 내가 법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재수 없으면 형사처분을 당할 수도 있다는데 그래도 괜찮단 말이지?”

“형사처분이요?”

남자는 예상 밖의 말을 듣자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래 새끼야, 그리고 이번 한 번만 부탁 들어주면 더 이상 안 괴롭힌다는데 뭘 그렇게 고민하고 있어?”

“그게 음…….”

“아이 씨, 또 시간 끄네? 끊어 새끼야, 너 말고 할 사람들은 널렸어.”

“자, 자, 잠시만요. 저, 그럼 이번 한 번만 도와드리면 정말 끝인 거죠?”

“하, 몇 번을 말해?”

승기를 잡았다고 확신한 명학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뭘 해 드리면 되나요?”

“지오쇼핑 전략기획서.”

“네? 그건, 팀장급 이상에서만 공유되는 거라 힘듭니다. 박유신 사장이 보안을 철저히 하고 있다고요.”

“병신새끼가 진짜 말 많네, 그래서 어쩌라고? 내가 방법까지 일일이 알려줘야 돼? 이런 무능한 새끼를 봤나.”

남자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명학은 강압적인 태도로 계속 밀고 나갔다.

“전략기획서 정도는 아니지만…… 제가 관리하고 있는 세부 문건은 드릴 수 있습니다.”

“가지고 있는 것 다 나한테 보내. 내 메일은 알지?”

“네, 알고 있습니다. 오늘 밤 중으로 보내겠습니다.”

“자료가 마음에 안 들면 추가 지시를 내릴 수 있으니까 대기해.”

“네……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명학의 협박을 들은 후부터 저항할 힘을 잃은 남자는 힘없이 대답한 뒤 전화를 끊었다.

‘이래서 멍청한 놈들은 다루기가 쉬워.’

영업비밀침해죄는 독립적인 경제적 가치를 지니거나 공시되지 않은 정보여야 성립이 되는데, 여태까지 남자가 보내온 정보들은 죄의 구성 요건에 부합하기 어려웠다. 명학은 단지 남자를 조종하기 위해 잘못된 지식을 그럴듯한 말로 포장한 것뿐이었다.

‘큭큭, 세상사는 게 참 재미있다니까? 그 자식은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그게 덫인지도 모를 거야.’

명학은 두고두고 남자를 이용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 * *

2월이 지나고 3월이 되었다. 2002년 새 학기를 맞은 학교는 신입생으로 붐비고 있었다. 수혁은 천천히 캠퍼스를 걸으며 여유를 만끽하고 있었다.

‘조금 이따 어디로 봉사를 갈지 결정해야 되는데 어디가 좋을까?’

정정 기간이라 수업이 일찍 끝난 수혁은 경영대 근처에 있는 호숫가를 돌며 고민을 하고 있었다. 오늘까지 봉사단체를 결정하기로 했는데 아직 마음 가는 곳이 없기 때문이었다.

“유리야!”

“어? 수혁아, 정말 오랜만이다.”

한참을 고민하던 중, 수업이 끝나 집으로 향하는 유리를 발견한 수혁은 큰 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학교에서도 잘 못 본 거 같은데 어떻게 지냈어?”

“알잖아. 난 공부만 하고 지내는 거. 애들 말 들어 보니까 완전 잘 나간다며?”

“아니야, 내가 목표한 곳에 다다르려면 갈 길이 많이 남았어.”

수혁의 눈은 야심에 차 보였다.

“많이 변했네? 옛날에는 맨날 운이 좋아서라든가 누가 도와줘서 그랬다고 대답했잖아.”

“하하, 내가 좀 건방지게 말했나?”

유리의 말에 수혁은 괜히 무안해졌다.

“아니야, 그 모습이 훨씬 보기 좋아. 옛날에 널 보면 일이 잘 풀리고 있는데도 불안해 보일 때가 많았는데, 이제는 목표에 온전히 집중하는 것 같아서 안심이 된다.”

“고마워, 최근에 초심을 잃은 것 같아서 걱정이었는데 네 말 들으니까 마음이 편해진다.”

“그래, 그렇게 항상 자신감 있게 살아 수혁아. 내가 아는 너는 성공한다고 해서 자만하고 남들을 무시할 애는 아니니까.”

유리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믿어 줘서 고마워.”

“들어 보니까 개강총회가 있는 것 같던데?”

“응, 들었어. 안 그래도 찬명이가 같이 가자고 했는데 해야 할 일이 많아서 거절했어.”

“너, 이명학 때문에 안 가는 거 아니야? 개강 총회 할 때마다 맨날 싸우잖아.”

그녀는 장난기 어린 얼굴로 짓궂은 질문했다.

“하하, 애당초 그 녀석이랑 무슨 싸움을 하겠어? 난 내 일에만 집중할 뿐이야.”

“내가 볼 땐 만날 때마다 너한테 약이 잔뜩 오른 것 같던데? 그리고 언제부턴가 명학이가 과 모임에 참석하지 않고 있어.”

“그 녀석이?”

수혁은 나대기 좋아하는 명학이 모임에 불참한다는 말에 의아해졌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너 때문이라고 그러던데? 사이도 안 좋은데 네가 계속 잘되고 있으니까 자리를 피한다는 이야기가 있어.”

“훗, 알아서 피해 주면 나야 고맙지.”

“반응 보니까 너도 은근히 의식했나 보네?”

“하도 귀찮게 구니까 신경은 좀 쓰이더라고.”

그는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런데 유리야,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뭔데?”

“혹시 봉사활동 다녀왔어? 학교에서 리스트를 줘서 결정을 해야 되는데 정보가 없으니까 잘 모르겠네.”

수혁은 그녀가 이런 쪽에 관심이 많다는 것을 알고 물었다.

“아 진짜? 그럼 이번에 나랑 같이할래?”

“나야 좋지.”

“리스트에 있는 활동들을 쭉 살펴봤는데 대부분이 현장 업무보다는 사무 보조나 행사 지원 위주더라고. 그런데 내가 지원한 곳은 빈곤 계층의 시민들에게 직접 다가가서 봉사를 하는 일이야.”

“단체 이름 좀 알려 줄래? 바로 신청해야겠다.”

이야기를 들은 수혁은 금방 결정을 내버렸다.

“괜히 나 때문에 무리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 나야 평소에도 봉사를 많이 다녀서 익숙하다지만 넌 사업하느라 경험해 볼 시간이 없었잖아.”

그녀는 많은 사람들이 막상 현장에 나가면 힘들어한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말했다.

“이왕 하게 된 거 제대로 해야지. 난 뭐든 어중간한 건 싫어하거든.”

“좋았어. 말 나온 김에 나랑 같이 행정실에 가서 신청하고 오자.”

“귀찮게 뭐 하러 그래, 그냥 인터넷으로 할게.”

“같은 봉사단체여도 다른 데 배치될 수도 있단 말이야. 마침 실장님하고 친하게 지내는데 한번 이야기해 보려고.”

유리는 수혁과 같이 봉사하고 싶은 속내를 드러냈다.

“알겠어, 같이 가 보자.”

수혁 또한 같이하고 싶었기에 바로 수긍했다. 둘은 곧장 행정실로 향했고, 유리는 행정실장과 대화를 나누러 갔다.

“생각보다 얼마 안 걸렸네?”

“직접 가서 신청하면 선생님들이 그 자리에서 봉사단체랑 바로 연결해 주시거든. 그리고 실장님께 말씀드렸더니 우리 둘이 같이 봉사할 수 있게 알아봐 주신대.”

용건을 마친 수혁과 유리는 행정실을 나와 캠퍼스를 걷고 있었다.

“고마워. 나는 슬슬 회사에 가야 될 것 같은데 넌 어디로 가? 집으로 가는 거면 데려다줄게.”

“괜찮아, 난 도서관 가서 공부 좀 더 하려고. 수혁아 즐거웠어, 또 보자.”

“응, 오늘 고마웠어.”

수혁은 한동안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차를 타러 주차장으로 갔다.

* * *

한남동에 위치한 명학의 자택.

‘쥐새끼 같은 새끼가 이런 걸 꾸미고 있었네?’

직원으로부터 내부 문건을 입수한 명학은 파일을 면밀히 살펴보고 있었다. 그는 기밀문서를 확보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회사 영업에 관한 중요 정보들 중 하나를 얻는 데 성공했다.

‘자식, 제법 머리를 쓰긴 했는데 뜻대로 되긴 힘들겠는데?’

명학은 대기업을 비롯한 여러 업체들과 연계하여 다양한 상품 라인을 구축하려는 지오쇼핑의 계획을 알게 되었다.

그는 일송유통의 회장을 맡고 있는 이정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저 명학인데요. 잠깐 뵙고 싶은데 시간 좀 내줄 수 있으세요?”

“무슨 일인데?”

“부탁드릴 게 있어서 있어서요. 자세한 이야기는 뵙고 말씀드릴게요.”

“부탁? 내가 왜 네 부탁을 들어줘야 하지? 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널 데리고 있기는 하지만 네 말을 들어줄 정도로 한가하지진 않아. 그만 끊자.”

정수는 기본적으로 명학에 대한 신뢰가 없었기 때문에 회사와 관련된 일 외에는 엮이고 싶지 않아 했다.

“잠시만요. 들어 보면 흥미가 갈 수도 있을 텐데 그냥 끊으시게요?”

“흥미?”

대답을 하는 정수의 말투는 심드렁했다.

“네, 강수혁 대표 아시죠? 그놈이랑 관련된 일인데 들어보시겠어요?”

“강수혁? 그 SH그룹을 운영한다는 풋내기 말하는 거냐?”

수혁의 이름을 듣자 냉랭했던 그의 태도에 변화가 생겼다.

- 166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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