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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 없는 회귀-169화 (169/316)

169화

“예전에 말씀을 드려서 아시겠지만 제 사업의 핵심은 업체들과의 제휴를 통한 상품 다양성 확보와 고객들에게 제품을 빨리 전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들어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이도 여의치가 않아 보입니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겁니까?”

석호는 수혁의 목소리가 가라앉은 것을 느끼고 있었다.

“제가 만든 사업 계획안은 지오쇼핑뿐만 아니라 유통, 제조 업체들도 같이 이득을 볼 수 있는 상생적인 성향을 띄고 있는데 기업들이 이유 없이 제안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흠, 그거 참 이상하군요. 분명 많은 회사들이 호응하고 협조해 줄 거라 예상했는데…….”

일전에 수혁에게 사업 아이템에 관한 내용을 자세히 들은 석호는 한두 회사도 아니고 여러 기업들이 지오쇼핑을 거부하고 있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회장님이 볼 때도 이상하게 느껴지십니까?”

“당연하죠. 대표님의 아이디어는 보통의 기업인이라면 쉽게 거절하지 못할 정도로 매력적이었으니까요.”

“혹시 회장님께선 짚이시는 것이 없으십니까? 저는 이쪽 업계는 처음이라 판이 돌아가는 걸 잘 몰라서요.”

“잠시만 기다려 보세요. 알아보고 바로 연락드리죠.”

석호는 자신이 잘 알고 지내는 지인들에게 전화를 걸어 사태를 파악하기 시작했다.

‘후, 믿고 기다려 봐야지.’

수혁은 초조한 기분을 달래기 위해 선반에서 위스키를 꺼내 한 잔 따라 마셨다. 그리고 1시간쯤 지났을까, 석호에게서 연락이 왔다.

“네, 회장님.”

“대표님, 여러 사람들에게 전화로 물어봤는데 지오쇼핑에 대한 부정적 여론이 업계 오너들 사이에서 형성된 것 같습니다.”

“부정적인 평가를 받을 만한 행동을 한 적이 없는데…… 혹시 뭣 때문에 그런지 알 수 있겠습니까?”

“안 그래도 거듭 물어봤는데 자세한 이야기는 자꾸 피해서 저도 뭐라 말씀드리기가 힘드네요. 이런 경우가 없었는데 도대체 무슨 일인지 참.”

명학과 은밀한 대화를 나눈 정수는 일송그룹의 명성을 이용해서 유통 업계에 영향력을 행사해놓은 상태였다. 게다가 석호가 수혁과 친하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오너들에게 입단속도 시켜 놓아 자세한 진상을 파악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일단,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싶은데 무슨 방법이 없을까요? 회장님들께서 뭔가 오해를 하시는 것 같습니다.”

수혁은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직접 나서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번 주 금요일 날 마침 대한유통협회 모임이 있는데, 저랑 같이 참석하시겠습니까? 제가 다행히도 협회장이라 게스트를 초청할 수 있는 권한이 있습니다.”

“그렇게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리고 괜찮다면 단상에서 이야기할 기회도 주실 수 있으십니까? 사업을 진행하려면 아이디어 공유가 어느 정도 이루어져야 할 것 같아서요.”

“음…… 쉽진 않겠지만 한번 노력해 보겠습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회장님이 여러모로 신경 써 주신 것 잊지 않겠습니다.”

“도와드릴 부분이 있으면 당연히 힘을 써야지요. 안 그래도 사무총장이랑 모임 식순에 관해서 논의를 할 참이었는데 대표님이 간단하게 인사라도 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저도 기업 관계자분들에게 제공할 자료를 좀 만들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수혁은 대화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전화를 끊었다.

‘후, 이게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뭔가 찜찜한데?’

그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답답한 상황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 * *

시간이 흘러 금요일이 되었다. 수혁은 석호를 만나 대한유통협회 행사가 열리는 삼청동의 한 고급 한정식집으로 가고 있었다.

“컨벤션센터 같은 곳에서 열릴 줄 알았는데 의외네요?”

“이 모임은 명목적으로는 업계 사람들끼리 국가의 경제를 의논하고 서로 상생할 수 있는 방안을 찾는 곳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식사를 하며 우의를 다지는 친목 모임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러면 저는 언제 발언하면 될까요?”

수혁은 준비해 온 말이 적지 않았기 때문에 궁금하여 물었다.

“그래서 일부러 자리를 이런 곳에 마련한 것도 있습니다. 사실, 격식이 있는 곳이면 업계 초입인 대표님께 발언 기회를 따로 드리기 어렵지만 사석과 같은 분위기 속이라면 자연스럽게 말씀하시기 좋지 않겠습니까?”

“과연 그렇군요.”

석호의 설명에 수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거의 다 도착했군요. 이제 슬슬 내릴 준비를 해야겠습니다.”

차는 어느새 도착하여 운전기사는 주차를 하고 있었고, 석호와 수혁은 먼저 내려 사람들을 기다렸다.

“회장님,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여인이 석호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사장님, 오랜만입니다. 급하게 모임을 잡았는데 편의를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서로 알고 지낸 지가 얼마나 되는데 그런 말씀 안 하셔도 됩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알겠습니다.”

수혁과 석호는 사장의 인도에 따라 방으로 안내됐다.

“회장님 안녕하십니까.”

“허허, 바쁘셔서 못 오실 줄 알았는데 이렇게 뵙게 돼서 좋습니다.”

석호와 대화를 나누는 사람은 엘마트를 운영하고 있는 이병섭이었다. 엘마트는 비록 케이마트에 비해서는 약간 떨어지는 편이었지만 마트 업계에서는 2위를 자랑하고 있는 거대 회사였다.

“원래는 일정이 있어 이번 모임에 참석을 안 하려고 했지만 석연치 않은 점이 있어서 오게 됐습니다.”

“그건 또 무슨 말씀입니까?”

병섭의 말을 들은 석호는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옆에 계시는 청년은 누굽니까? 좀 조용한 데서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은데…….”

“회장님, 전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이분은 SH그룹을 설립하신 강수혁 대표입니다. 저랑은 이 회장님 못지않게 가까운 사이니 편하게 말씀하셔도 됩니다.”

석호는 눈치를 채고 자리를 비켜 주려는 수혁을 만류하며 말했다.

“아, 어쩐지 낯이 익다 생각했는데 그 이유를 이제 알겠군요. 반갑습니다. 엘마트의 이병섭입니다.”

“강수혁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수혁은 예를 갖추며 인사를 했다.

“마침 잘 됐습니다. 제가 지금부터 하려는 이야기는 강 대표님과 무관하지 않거든요.”

“오, 그렇습니까?”

석호는 의외라는 듯 놀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며칠 전부터 물류 업계 쪽에서 소문이 돌더군요. 전국에 유통망을 구축하는 신생회사가 있는데 이 회사가 다른 회사들은 안중에는 없고 자기 이익만 생각한다고 말이죠.”

“그 회사가 바로 지오쇼핑이군요.”

수혁은 대번에 그의 말을 알아들었다.

“맞습니다. 저도 직원에게 처음 이 소문을 보고받았을 때 적지 않게 놀랐습니다. 강수혁 대표님께서 기존의 쇼핑몰들과 달리 햇반이나 라면 같은 간단한 제품부터 명품과 같은 고가의 제품까지 직접 거래를 계획하셨다는데 사실입니까?”

“그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기획안에 포함되어 있는 내용이긴 하지만 외부에는 아직 공표하지 않은 것들인데…….”

수혁은 당황스러운 감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 소문이 어떻게 퍼졌는지는 저도 잘 모릅니다. 제가 아는 건 많은 유통 관계자들이 대표님의 계획이 기존의 유통 업체들의 생태를 파괴할 위험한 생각이라고 여긴다는 점입니다.”

“회장님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석호는 병섭에게 물었다.

“전 개인적으로 굉장히 훌륭한 아이디어라고 생각했습니다. 업계 안에 도덕률이라는 것이 존재하긴 하지만 강 대표님이 그 선을 넘을 정도로 무리했다고 여기진 않았거든요. 근데 몇몇 회장들이 여론을 선동하니 다른 사람들도 그냥 따라가는 분위기가 없지 않아 있습니다.”

“누군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수혁은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음…… 일송유통의 이정수 회장이 중심에 서서 여론을 조성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흠, 일송유통에서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짐작이 되는군요.”

석호는 일전에 수혁이 일송그룹 회장 이경욱과 신경전이 있었던 것을 떠올렸다.

“그리고 은연중에 대표님뿐만 아니라 회장님에 대한 안 좋은 이야기도 하고 다니는 듯합니다. 거액의 자금을 지오쇼핑에 제공해서 업계에 혼란을 가중시켰다는 소문도 오너들 사이에서 퍼지고 있는 중입니다.”

“대표님, 직원 단속을 잘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들어 보니 회사 안에 첩자가 있군요.”

석호는 수혁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도 인지하고 있습니다. 다음 주 월요일 날 출근해서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일단 들어가시죠.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습니다.”

“알겠습니다. 가시죠.”

대화를 한창 나누다 보니 약속 시각을 약간 지나 있었다. 그들은 예약을 잡아 놓은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협회장님 오셨습니까?”

“네, 잠깐 대화를 나누느라 조금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다들 막 도착해서 크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협회 사무총장은 석호가 방에 들어오자 인사를 건넸다.

“거, 모임을 주재하신 분께서 좀 일찍 일찍 다니셔야 회원들에게 보기 좋지 않겠습니까?”

“허허, 이 회장님. 잘 지내셨습니까?”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리에 일어나서 석호를 맞이했지만 정수만 의자에 앉아 거만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뭐야? 저 새끼가 왜 저기에 있어?’

수혁은 정수 옆자리에 앉은 명학을 발견했다.

“회장님께서 오셨으니 식사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음식들 가져오세요.”

“넵. 바로 가져다드리겠습니다.”

방에서 대기하고 있던 직원은 사무총장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음식을 가지러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잠시 후 테이블 위는 한눈에 보아도 호화스러운 메뉴들로 가득 채워졌다.

“식사에 앞서 협회장님 말씀이 있겠습니다.”

방은 20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컸는데 안에는 간단한 행사를 진행할 수 있게 음향 기기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우리 대한유통협회는 현재 일송그룹 전체를 총괄하시는 이경욱 회장님께서 만든 모임으로 다른 협회들에 비해 긴 역사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송은 초반에 유통 사업으로 회사의 토대를 다져 국내 최고의 기업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그리고 80년대 말까지만 해도 일송유통은 업계에서 최고라는 명성을 유지해 왔지만, 제일물류가 90년대 들어 약진을 거듭하면서 선두자리를 빼앗긴 상황이었다.

‘저 파렴치한 놈이 점잔빼며 이야기하는 것도 듣기 힘들군.’

정수는 자신이 회사를 맡은 후 제일물류를 넘어선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석호에게 강한 경쟁심을 느꼈다.

“자, 이제 다들 식사하시죠.”

식전 발언을 마친 석호는 주변 사람들에게 밥 먹을 것을 권했다.

“그전에 회장님, 질문이 하나 있는데요.”

“말씀하시죠.”

한신해운의 김정욱 대표가 다소 날카로운 투로 입을 열었다. 그는 재벌 2세로 40대 초반의 나이였지만 한신그룹의 핵심 사업을 물려받아 유통 업계에서는 떠오르는 기린아로 평가받고 있었다.

‘왜 저렇게 짜증을 내면서 말하지?’

수혁은 퉁명스럽게 말하는 정욱이 마음에 들지 않아 그를 노려봤다.

- 170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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