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최근에 업계에 이상한 소문이 돌던데 알고 계십니까?”
“식전부터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그러시는 겁니까? 다들 식사 먼저 하시죠.”
병섭은 불편한 대화가 오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나섰다.
“아닙니다. 전 그런 소문 같은 거 모르니까 말씀해 보세요.”
“미꾸라지 한 마리가 물을 흐리고 있다는 말이 돌고 있어서 여쭤보는 겁니다.”
그의 선친은 경욱과 막역한 사이였는데 그 관계가 자식 대까지 이어져 정욱과 종수는 서로를 도우며 친하게 지내고 있었다.
“돌려서 말하지 말고 똑바로 이야기하시죠.”
석호는 정욱의 태도에 기분이 상했지만 애써 표정을 관리하고 있었다.
“크흠, 그러고 싶긴 한데 당사자가 있어서 대놓고 말씀드리기가 조금 어려울 거 같네요.”
정욱은 수혁을 바라보며 헛기침을 했다.
“저한테 용건이라도 있으십니까?”
“역시, 내 예상이 틀리지 않았어. 네가 강수혁이지?”
그는 수혁에게 무례한 언사를 서슴지 않았다.
“맞습니다. 근데 댁은 누구신데 저한테 초면부터 반말입니까?”
“댁? 듣던 대로 막 나가는 녀석이네? 학원이나 운영하던 녀석이 왜 갑자기 이쪽에 와서 일을 시끄럽게 만드는지 쯧쯧.”
“당신처럼 말할 줄 몰라서 점잖게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여기 보면 다들 댁보다 어른들이신데 예의 좀 갖추시죠. 자꾸 이러시면 저도 어쩔 수 없습니다.”
“대표님, 진정하시죠. 김 대표도 그만 하세요.”
석호는 분위기가 험악해지는 것을 감지하고 두 사람을 말리려했다.
“그래요,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식사부터 하시죠.”
대화를 지켜보던 정수는 능청스럽게 상황을 정리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한동안 말없이 식사에만 집중했다.
“회장님, 밥도 어느 정도 먹었으니 저도 물어보겠습니다. 왜 굳이 이 자리에 강 대표를 데려온 겁니까? 협회에 관련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자격도 미달되는 사람 같은데.”
정수는 거침없이 말을 쏟아냈다.
“그건 오해십니다. 대표님은 최근에 물류 사업을 추진 중에 계십니다. 그리고 전 협회장으로서 강수혁 대표님을 게스트로 초청하여 여러분들께 미리 인사를 시켜 드리려고 한 것뿐입니다.”
석호는 자연스럽게 그의 말을 되받아쳤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느 정도 연륜이 있고 모임에 어울리는 사람을 데려오셔야 다른 회장님들도 불편하지 않지요. 참, 아쉽습니다.”
그는 은연 중에 수혁을 본인들과 어울릴 만한 급이 아니라고 무시하고 있었다.
“갑자기 말씀 중에 끼어들어서 죄송한데 그러면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은 누굽니까?”
수혁은 천연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손가락으로 명학을 가리켰다.
“자네랑 같은 학교라고 들었는데 서로 모르는 사이였나? 이 아이는 내 조카야, 그리고 현재는 일송유통의 상무이기도 하고.”
“회장님 말씀대로라면 저 친구는 더욱 자격이 안 되는 것 같은데 왜 이 자리에 데려온 겁니까?”
‘이 새끼가…….’
수혁의 말을 들은 명학의 얼굴은 순식간에 굳어졌다.
“명학이는 내가 보증하는 사람이야. 게다가 내 아버지이자 협회 창립자인 이경욱 회장님의 손자인데 뭘 더 증명해야 하나?”
정수는 일송의 이름을 들먹이며 명학을 보호했다.
“맞습니다. 애당초 협회가 설립될 수 있었던 이유도 이 회장님께서 기업인들을 한데 모아 발족을 해 주신 덕분입니다. 그런 분의 직계 가족이라면 언제든지 환영이지요. 뭣도 모르는 사람이 와서 딴지를 걸 사안이 아니란 말입니다.”
정욱은 수혁을 노려보며 날카롭게 말했다.
“설립자의 손자가 존중받아야 된다면, 왜 협회장이 초대한 손님은 무시 받아야하죠? 회장님께서 말씀하시기로는 협회장이 모임에 손님을 데려온 적이 종종 있었던 모양인데 왜 저에게 이러시는 겁니까?”
“따지려고 들지 말고 잘 생각을 해 봐. 네가 여기 올 만한 급수가 되는 것 같아?”
“왜 자꾸 반말이지? 어른들도 계셔서 웬만하면 곱게 받아 주려고 했는데 왜 자꾸 시비야? 너, 나 본 적 있어? 초면인 걸로 아는데 말 좀 곱게 하지?”
정욱의 비아냥이 계속되자 수혁도 강하게 맞받아쳤다.
“협회장님, 이것 좀 보세요. 검증도 안 된 핏덩이가 혈기만 믿고 까부는데 한 말씀 해 주시죠.”
“제가 볼 땐 김 대표가 먼저 무례를 저지른 거 같은데요? 아무리 나이가 어려도 그렇지 다짜고짜 반말부터 하는 건 너무 나가신 것 같습니다. 사과하세요.”
석호는 평소의 온화한 모습과는 달리 단호한 태도를 보여 줬다.
“……크흠, 기분이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하지만 강 대표에게는 사과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허허. 사과는 저 사람이 해야지, 왜 애꿎은 김 대표에게 뭐라 하십니까? 오랫동안 같이 한 동료보다 신출내기를 챙기다니, 협회장님답지 않습니다.”
정수는 야비한 미소를 지으며 정욱의 편을 들었고, 좌중들은 이들의 대립에 누구 편도 들지 못한 채 눈치만 보고 있었다.
“이것 참, 오늘따라 조금 예민하신 것 같습니다. 자, 다들 한잔하시죠.”
석호는 술잔을 들고 어색한 분위기를 전환하려고 했다.
“강 대표, 물어볼 게 있는데.”
“말씀하시죠.”
정수는 석호의 말을 무시하고 수혁에게 말을 건넸다.
‘회장님이 나서 주니까 그제야 대표라는 호칭을 붙이는군. 나름 성공했다고 생각했는데…… 이 바닥 사람들이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대충은 알겠어.’
수혁은 씁쓸한 마음이 들었으나 금세 털어내고 그의 말을 기다렸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동료 기업인들을 모두 무시하고 본인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행동을 한다면 무슨 생각이 들겠는가?”
“그건 상도덕에 어긋나는 행위로 비판을 받아야 마땅하겠지요.”
그는 질문의 의도를 알아챘으나 짐짓 모른 체하며 태연하게 답변했다.
“방금 말 잘했네. 그런데 왜 자넨 협회장님이랑 결탁해서 업계를 어지럽히는 건지 모르겠군. 영특하고 언변이 좋아 인재라고 생각했는데 실망이야.”
정수는 술을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제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군요. 아까부터 김 대표도 그렇고, 회장님께서 무슨 말씀하는지 알아듣기가 어렵습니다.”
“뭐? 김 대표? 이 자식이 어디서 은근히 말을 내려?”
“당신이 했던 말을 돌아보면 대표라는 호칭을 붙여 주는 것도 감사히 여겨야 할 건데?”
수혁은 정욱을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아니, 이 새끼가!”
“대표님, 잠시만 진정하세요. 그리고 강 대표, 자네가 화내는 것은 이해는 가지만 정도를 벗어난 언행은 삼가 주게.”
‘이 양반이 갑자기 왜 점잖은 척을 하는 거야?’
수혁은 예상치 못한 정수의 발언에 황당한 기분이 들었지만 내색하지 않고 그의 이야기를 들어 보기로 했다.
“말귀를 못 알아듣는 것 같으니 내 솔직히 말하지. 자네 지금 물류 사업을 위해 전국에 유통망을 구축하고 있다면서?”
“그렇습니다.”
“제품들을 마트나 백화점과 같은 유통 업체를 통하지 않고 직거래를 계획하고 있다는데 그게 사실인가?”
“네, 그런데요?”
“너보다 한참 선배고 어른이야. 예의를 갖춰라.”
그동안 가만히 자리를 지키고 있던 명학은 화가 났는지 얼굴이 빨개져 있었다.
“너야말로 대화하는 데 끼어들지 마. 계속 말씀하시죠.”
“흐흠, 온라인으로 거래하는 걸 누군 못해서 안 하는 줄 아는가? 여기 계신 오너들께서는 그동안 시장에 투자한 비용이 적지 않기 때문에 섣불리 안 나서고 있는 거야.”
정수는 백화점과 마트를 운영하는 기업인들이 기반을 다지고 설비를 갖추는 데 들었던 돈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었다.
“그래서 몇몇 분들이 저를 오해하고 계신 거였군요. 이제 이해가 가네요.”
수혁은 뭔가를 깨달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해는 무슨 오해야? 이것 좀 보십쇼. 저렇게 뻔뻔하게 나오지 않습니까?”
정욱은 수혁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며 언성을 높였다.
“당신은 이 사안에 직접적으로 관련 있는 사람도 아닌데 뭘 그리 흥분하는 거지? 해운 사업이면 수출, 수입하는 게 주 업무 아니야? 이정수 회장님에게 무슨 빚이라도 있는 것 같은데, 판단을 하려면 말을 끝까지 듣고 해.”
“어이가 없네. 너 이제 아주 막가는구나?”
“김 대표님. 제가 볼 때도 강 대표님의 답변이 궁금하신 분들이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한번 들어 보도록 하죠.”
석호는 적절한 타이밍에 수혁을 지원해 주었다.
“그래요. 한번 강 대표님의 말씀도 들어보자고요.”
병섭은 주변의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럽게 첨언을 했다.
“우선 이런 분란이 생긴 점에 대해서 여러 회장님들께 죄송하다는 말씀부터 드리겠습니다. 그러면 제가 지금부터 이 사업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수혁의 말이 시작되자 내심 궁금해 하던 사람들은 자세를 고쳐 앉고 경청할 준비를 했다.
“일단 제가 전국에 유통망을 구축하고 소비자들에 직접 판매를 시도하려는 건 맞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행위가 기업 간의 상생을 헤친다는 말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로…….”
“누가 직접 판매를 뭐라고 하나? 옷이나 농산물처럼 현재 업체들이 판매하는 수준이면 모르겠지만 넌 우리가 쓰는 거의 모든 재화들을 온라인 쇼핑몰로 판매하려는 거잖아.”
“명학아, 조용히 해라.”
명학이 건수를 잡은 듯 흥분하며 말하자 정수가 오히려 그를 제지하고 나섰다.
“이명학, 어른들 계시는데 예의를 갖춰라. ……죄송합니다. 계속 말하겠습니다. 전 온라인으로 물품을 판매하면 국민들의 소비 패턴에 영향을 줘 현장 판매의 소비 정도가 줄어들 수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소문이 과장된 면도 있습니다.”
“말장난하는 건가? 유통 업체들에 피해를 주는 것을 시인하는 척하면서 과장이라니?”
“온라인으로 쇼핑을 하는 사람과 오프라인을 선호하는 사람이 어느 정도 구별이 있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명품과 같은 고급 재화는 온라인으로 상품을 판매하여도 제품 보증의 측면에서 오프라인을 따라잡기 힘듭니다.”
“그 정도로는 설명이 부족한데?”
정수는 여유로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백화점을 가는 여성들의 경우, 단순히 물건만 사러 가는 것이 아닙니다. 백화점 내에 있는 편의시설도 이용하고 다양한 제품들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과정을 즐기는 분들도 많다는 거죠. 그리고 한 번 고착화된 소비 패턴은 어지간해선 쉽게 바뀌지 않기 때문에 지오쇼핑이 론칭된다 하더라도 바로 매출 감소로는 이어지지는 않을 겁니다.”
“대표님 말씀은 아무리 좋게 해석해도 단기에는 우리가 피해를 보지 않으나 결국 장기적으로는 도태될 가능성이 있는 것을 시인하는 것 아닙니까?”
유명한 아울렛을 운영하는 장년의 남성이 날카로운 질문을 했다.
“시시때때로 급변하는 시장 환경을 고려해 볼 때 저 하나 막는다고 변화의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습니다. 날이 갈수록 소비자들의 편리함을 추구하는 성향은 강해지고 있는데 전 단지 거기에 편승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우리 회사도 나름대로 상생을 위한 대책이 있습니다.”
수혁은 침착하게 대답했다.
“훗, 그래 봤자 네 회사가 제일 우선이겠지. 네 검은 속셈을 우리가 모를 줄 알아? 여기 계신 분들이 어떤 분들인데 달콤한 말로 현혹하려고 하냐?”
한동안 조용히 있던 정욱이 다시 비아냥대기 시작했다.
- 171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