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현명길 회장님에 대한 각별한 존중심을 가진 저로서는 묵과하고 넘기기 힘든 발언들이 있어서 제가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부디 너그럽게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수혁은 거짓으로나마 반성하는 자세를 보이며 말을 이어 나갔다.
“하…….”
“그 사건에 대해서 다들 알고 계신 것 같으니 더 이상 말은 않겠습니다. 그리고 저도 언행을 과하게 한 점에 대해선 이정수 회장님께 사과드리겠습니다.”
재계에서 이경욱 다음으로 큰 영향력을 가진 명길은 평소 고상한 인품으로 많은 기업인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정수를 비롯한 좌중들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다음에는 저 친구를 안 봤으면 좋겠군요. 정말 유감입니다.”
“마음 푸시고 조심히 들어가세요.”
더 이야기해 봤자 큰 소득은 없을 거라는 판단이 들은 정수는 석호에게 퉁명스럽게 말한 뒤 자리를 떠났다.
“회장님, 고생하셨습니다.”
협회 사람들이 떠난 것을 확인한 수혁은 석호에게 다가가 말을 건넸다.
“화가 많이 나셨을 텐데 잘 참으셨습니다.”
“아닙니다. 오히려 이참에 일송이 얼마나 졸렬한 놈들인지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습니다.”
“최고의 자리에 오래 있다 보니 그런 게지요.”
석호는 진땀을 뺐는지 손수건으로 이마를 닦으며 말했다.
“회장님께서 중간에 잘 말씀해 주셔서 위기를 잘 넘길 수 있었습니다.”
“하하, 제가 없는 말을 한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대표님께서 실제로 생각하신 아이디어가 있으셨으니까 그런 말씀을 했을 뿐이지요.”
수혁은 대화 중간에 자신을 도와준 석호에게 고마운 마음을 표현했다.
“아, 참. 대표님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네, 회장님.”
“마지막에 같이 일하고 싶으면 연락 주라고 하셨는데…… 큰 기대는 안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아무래도 쉽지 않겠지요?”
협회 사람들은 대부분 일송의 눈치를 보고 있었기 때문에 지오쇼핑과 협업을 하지 않을 거라는 이야기였다.
“그래도 엘마트의 이병섭 회장님은 제가 말씀드리면 대표님께 손을 내밀어 줄 사람입니다.”
“그분이라면 충분합니다. 두고 보십쇼. 언젠간 다른 회사들도 앞다퉈서 저희와 사업을 하려고 할 겁니다.”
수혁은 석호의 걱정이 무색할 정도로 자신감이 충만해 있었다.
“자, 그럼 오늘은 이만 돌아가시죠.”
“네, 저는 여기서 택시 타고 들어가겠습니다. 오늘 감사했습니다.”
수혁은 작별인사를 건넨 뒤 택시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아주 뱀 같은 놈들이었어. 절대 방심하면 안 되겠어.’
그는 당분간 지오쇼핑을 철저히 관리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 * *
4월 첫째 주 주말, 수혁은 유리와 함께 마지막 봉사활동을 하러 마을에 와 있었다.
“들어 보니 수혁 씨가 SH스터디를 설립하신 분이라면서요?”
3주 동안 같이 일하면서 많은 대화를 나눈 봉사자들은 수혁이 어떤 사람이 자연스럽게 안 상태였다.
“네, 그렇습니다.”
“역시 성공하신 분들은 뭘 해도 다 잘하시는 것 같아요. 수혁 씨 덕분에 마을 보수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팀장은 활동 기간 내내 헌신적으로 작업에 임한 수혁에게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아닙니다. 팀장님께서 잘 챙겨 주신 덕택에 힘든 것도 모르고 일했습니다. 그리고 이성우 실장님께서 잘 지도해 주셔서 보수 작업을 훨씬 수월하게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하하, 대표님께서 겸손이 과하시네요. 저는 몇 마디 말만 했을 뿐 도와드린 부분은 많지 않습니다.”
성우는 수혁이 무엇을 하는지 알게 된 후 반말 대신 존대를 하고 있었다. 그린해비타트는 보수 공사가 생각보다 만만치 않다고 여겨지자 실장이라는 임시 직책을 그에게 부여한 뒤 봉사자들을 지휘 감독하는 역할을 맡게 했다.
“예전처럼 편하게 말씀하세요. 실장님이 저보다 한참 어른이신데 존대를 받는 게 영 부담스럽습니다.”
수혁은 권위를 내세우는 것을 싫어했다.
“단순히 큰 기업을 운영하셔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봉사활동 내내 보여 주신 열정과 능력을 봤을 때 이런 존중을 받는 것은 당연한 겁니다.”
“안 그러셔도 되는데 참…….”
성우는 봉사활동 내내 수혁을 지켜봤고 쉼 없이 작업을 하고 앞장서서 모든 일을 해결하는 그의 모습에 감동을 받았다.
“팀장님, 괜찮으시다면 대표님에게는 별도로 감사장을 드리면 어떻겠습니까?”
“안 그래도 본사에 연락을 해서 표창장 수여를 건의했어요. 아마 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 우리 측에서 곧 한국대학교에 상장을 전달할 거예요.”
“전 괜찮습니다. 상장을 받으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수혁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유리 씨도 표창장을 받을 수 있도록 조치를 취했는데 그냥 받아 주시면 안 될까요? 만약 거부하신다면 본사에 추천서를 다시 보내야 해서요.”
“아, 유리도 같이 받는 건가요? 그럼 그냥 받겠습니다.”
유리는 봉사 기간 내내, 밤늦게까지 집수리를 하느라 고생하는 봉사자들에게 음식과 음료를 제공하는 등 몸을 아끼지 않았고, 팀장은 그 점을 높게 사 추천서를 쓴 상황이었다.
“사실, 우리 측에서 발급하는 표창장이 있으면 나중에 그린해비타트에 취직을 하는 데 큰 도움이 되지만 한국대학에 다니는 인재들께서 관심이 있을지는 모르겠네요.”
“저희를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따로 문의를 드리겠습니다.”
수혁은 그녀의 마음이 상하지 않게 취직할 생각이 없음을 대놓고 표현하진 않았다.
“수혁아, 준비 다 했어? 이만 가자.”
“응, 차에 먼저 가 있어. 나도 금방 갈게. 여기서 인사드리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대표님, 고생하셨습니다.”
수혁은 성우와 팀장에게 인사를 한 뒤, 차를 몰고 서울로 돌아왔다.
* * *
‘봉사활동도 마무리되었으니, 이제 회사 내부 정리를 좀 해 볼까?’
서초동 아파트에 도착한 수혁은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누워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그런데 그때, 그의 눈앞에 화면이 떴다.
<퀘스트가 완료되었습니다. 보상으로 사용자의 운이 5 향상되었습니다.>
‘깜빡 잊고 있었네. 생각해보니 퀘스트 때문에 열심히 한 거였잖아.’
수혁은 봉사활동을 하는 동안 마을 사람들이 기뻐하는 모습에 큰 보람을 느꼈고 그들이 삶에 대한 희망을 찾아가는 것을 보면서 힘든 줄 모르고 일에 매진했었다.
‘비록 퀘스트 수행의 수단으로 시작한 거였지만 배운 게 적지 않은 것 같아. 응, 그런데 이 녀석이 또 할 말이 있나 보네?’
그는 퀘스트 창이 도움말로 전환된 것을 알아챘다.
<이번 스텟 상승을 통해 사용자의 운은 30을 초과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본 프로그램은 추가적인 기능을 소개하려고 하는데 들어 보시겠습니까?>
‘통찰력이랑 매력 때도 스텟이 일정 수치를 넘기게 되면 혜택이 주어졌는데 운에서도 이러네?’
<맞습니다. 스텟마다 보상이 주어지는 기준이 다르긴 하지만 일정 수치를 초과하게 될 때는 사용자께 도움이 되는 기능을 제공하는 설정이 마련되어있습니다.>
‘내용을 확인해 볼게.’
<현재 사용자의 운은 31로, 앞으로 사업을 하거나 특정 계획을 실천할 때마다 이전보다 더 잘 풀리게 되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겁니다. 예를 들면 사업 성공에 필요한 귀인을 수월하게 만날 수 있게 되는 것이 있겠지요.>
‘에이…… 그런 운이라면 지금도 충분히 잘 따라 줬는데. 보상이 너무 작은 거 아니야? 그리고 그런 게 무슨 추가 기능이야? 그냥 스텟이 강화돼서 생기는 자연스러운 현상이잖아.’
설명을 들은 수혁의 얼굴에는 실망감이 가득해 보였다.
<사용자가 원하는 성취의 수준이 높아질수록 운이 미치는 영향은 점점 더 커집니다. 현재 갖고 계신 인맥이나 운의 수치로는 세계 최고의 기업을 만든다는 염원을 이루기는 쉽지 않습니다.>
‘흠, 대충 무슨 말인지 알겠어. 현재 난 정석호 회장님, 현명길 회장님 등 다양한 조력자들이 주변에 있지만 이들의 힘만으로는 세계에서 제일가는 기업을 만들기는 어렵다는 소리네.’
<단순히 조력자를 얻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사용자께서 노력하신 만큼 성과가 잘 나오기 위해서는 거기에 상응하는 적절한 운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 기능은 단순히 스텟 향상에 따른 운의 강화와는 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사용자께 큰 이득이 될 겁니다.>
‘맞아, 운칠기삼이라는 말이 그냥 나온 게 아니야. 오죽하면 재물운, 관운이라는 말이 다 있겠어?’
내용을 완전히 이해한 수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진 기본 옵션에 대한 설명이었고, 이젠 추가적인 기능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래, 이 정도로 끝나기에는 너무 거창하게 설명했어.’
<사용자께서 지혜와 통찰을 총동원했음에도 불구하고 판단이 서지 않는 상황이 발생했을 때 최상의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돕겠습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알 수 없는 말에, 수혁은 화면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언젠가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어떤 길을 선택해야 되는지 저희가 대신 알려 드리겠다는 말씀입니다.>
‘와, 진짜? 최고의 기능이잖아? 이렇게 되면 어떤 사업적 결정을 내릴 때마다 너에게 물으면 되겠네?’
<하지만 이 기능에도 제약이 있습니다.>
‘역시, 그냥 줄 리가 없지.’
환희에 젖어 있던 수혁은 금세 풀이 죽었다.
<만약 사용자의 모든 선택에 우리가 개입하게 되면 세상의 법칙을 어그러트리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에, 선택 기능은 1년에 한 번만 사용할 수 있도록 설정되었습니다.>
‘혹시 방향을 제시해 주면서 그 이유도 이야기해 주나? 난 내가 납득이 되지 않으면 되게 찜찜해하는 성격이라서.’
<아닙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운의 영역이기 때문에 논리와 이성이 끼어들 공간은 없습니다.>
‘알았어. 프로그램 다운로드해 주고 이만 들어가 봐.’
기능에 대한 전반적인 사항을 모두 파악한 수혁은 어플을 종료했다.
‘다운받아서 손해 볼 건 없을 거야. 도움말이 추천하는 거라면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될 테니까. 그건 그렇고,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지오쇼핑 경영에 나서야 되는데 일정을 어떻게 짜면 좋을까?’
그는 하루 중 적지 않은 시간을 소프트웨어 코드를 뽑아내는 데 쓰고 있었기 때문에 적절한 계획을 세울 필요가 있었다.
‘음…… 아무래도 여유 있게 하는 건 무리겠지? 그냥 밤잠을 줄이고 무리해서라도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아 보는 거야. 일단 지금 해야 하는 것부터 차근차근 처리해야겠다.’
대략적인 플랜을 세운 수혁은 가장 먼저 용민에게 연락을 하였다.
“어, 수혁아.”
“쉬고 있을 텐데 미안하다. 내일부터 당분간 지오쇼핑 경영에 전념하려고 하는데 그 전에 너한테 부탁할 게 있어서.”
“딱 보니까 중요한 일 같은데?”
“응, 엄청.”
“잠시만 적을 것 좀 가져올게.”
용민은 중요한 이야기가 오갈 것을 직감하고 지시사항을 적기 위해 메모장을 가지러 갔다.
“말해, 수혁아.”
“내일 지오쇼핑 사무실에 갈 건데…….”
두 사람은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한참 동안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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