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화
‘후, 혹시 몰라서 문서를 다운받은 기록을 지웠는데 정말 다행이다.’
이공계 출신은 아니었지만 IT업계에서 일한 짬밥으로 약간의 지식을 갖고 있던 철규는 미리 손을 써 놓았기에 안도하고 있었다.
‘용민이가 나와서 시연을 하는데도 안색이 변하는 놈이 없네? 생각보다 간덩이가 큰 녀석인데?’
수혁은 직원들의 얼굴을 면밀히 살펴보면서 명학과 내통한 자가 있나 체크하고 있었다.
“이럴 게 아니라 최필재 팀장님을 이 자리에 모시면 어떻겠습니까? 김용민 본부장님이 직접 확인 해 보시는 것도 좋지만, 할 일이 많지 않습니까?”
수혁은 범인을 찾기 위해 일종의 승부수를 띄웠다.
‘뭐, 뭐야? 최필재 팀장? 그 사람이 오면 일이 곤란해지는데…….’
철규는 친한 직원들을 통해 필재가 얼마나 출중한 사람인지 익히 들어왔다. 개발팀에서 보여 준 실력도 실력이지만 업계에서 도는 소문에 의하면 한국에서는 유례가 없을 정도로 뛰어난 인재라는 말이 파다할 정도였다.
‘저 새끼 뭔가 수상한데?’
한참 직원들의 속을 떠보고 있던 그때, 수혁은 태연한 얼굴로 앉아 있지만 왠지 모르게 입꼬리가 실룩거리고 있는 사람을 발견했다.
“박철규 과장님, 회사에 계신지는 얼마나 되셨습니까?”
그는 자신의 통찰력과 직감이 맞는지 확인해 보기로 했다.
“네, 대표님. 지오닷컴이 설립되었을 때부터 쭉 있어 왔습니다.”
“원년 멤버이시군요. 그럼 회사에서 내통한 자가 있다면 어떻게 처리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까?”
“……퇴사시키는 건 물론이고 법적인 조치를 취해 본보기를 보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누가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회사에 손해를 입힌 자에게는 그에 맞는 징벌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철규는 마음을 가다듬고 뻔뻔하게 대답했다.
“옳은 말씀입니다. 그렇게 회사를 생각하는 마음이 깊으시니 제 마음이 편해지는군요.”
“아닙니다. 대표님이나 임원분들에 비하면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갑작스러운 칭찬에 염치가 없어진 철규는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하,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토록 애사심이 깊으신데 겸손까지 하시니 더 믿음이 갑니다.”
“과찬이십니다.”
“박 과장님. 작은 부탁이 있는데 들어주시겠습니까?”
“말씀하십쇼.”
철규는 수혁이 계속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자 긴장이 풀리고 있었다.
“아무리 회사 일이라지만 직원들의 컴퓨터를 전수 조사하는 건 많은 시간이 들뿐만 아니라 자칫하면 프라이버시 침해가 될 수도 있습니다.”
“흠…… 직원들이 업무에 쓰이는 컴퓨터를 사적인 용도로 사용했다고 보기는 어렵겠지만 대표님 말씀이 틀린 건 아니지요.”
“그래도 이 일은 그냥 넘어갈 순 없는 노릇 아닙니까?”
“맞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방법을 찾아야 됩니다.”
철규는 등 뒤에 식은땀이 흘렀지만, 수혁의 말에 장단을 맞추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그러면 박 과장님의 컴퓨터를 필두로 전수 조사를 시작하면 어떻겠습니까?”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철규는 청천벽력같은 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언성을 높였다.
“뭘 그렇게 놀랍니까? 박 과장님처럼 애사심이 넘치고 원년 멤버이신 분이 솔선수범해서 조사에 나서면 남은 분들도 납득을 하지 않겠습니까?”
수혁은 뒷짐을 진 채 그를 지그시 쳐다봤다.
“……알겠습니다. 제 컴퓨터를 조사하는 것에 동의하겠습니다.”
철규는 사람들 앞에서 더 이상 당황한 모습을 보여 주기 싫었기 때문에 얼굴에 철판을 깔기로 마음을 먹었다.
‘흠, 뭔가 켕기는 게 있어 보이긴 하는데 결정적인 물증이 없으니 많이 아쉽네.’
눈을 가늘게 뜨며 고민에 잠겨 있던 수혁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조사에 들어가기 전에 잠깐 면담을 하고 싶은데, 잠깐 따라와 주시겠습니까?”
“네, 알겠습니다.”
수혁은 철규를 데리고 회의실 바깥 계단으로 나오자마자 물었다.
“박 과장님.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이명학이랑 연락한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전 대표님을 말씀하시는 거군요. 입사한 이후로 그분이랑 연락한 적은 맹세코 없습니다.”
“지오쇼핑의 내부 문건을 아는 사람은 박유신 사장님과 과장님을 포함한 20명의 임직원들이 전부입니다. 그리고 그중 이명학을 알만한 원년 멤버는 5명도 채 안 되고요.”
수혁은 느긋한 자세를 취하던 조금 전과 달리 철규를 매섭게 노려보며 말했다.
“저, 저는 정말 아닙니다. 왜 이러십니까?”
말을 더듬는 철규의 안면 근육은 어색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지막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일송유통 이명학 상무에게 기밀문서를 유출한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거짓말을 할 때 나오는 전형적인 반응들을 포착한 수혁은 철규가 내통자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전 할 말을 다 했습니다.”
철규는 입을 꽉 다물고 침묵을 지키기로 했다.
“참, 딱하네요. 이명학이 어떤 걸 약속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놈은 과장님을 소모품으로만 여길 뿐이지 사람을 귀하게 쓰는 법을 모르는 녀석입니다. 어차피 최 팀장님에게 컴퓨터를 맡기면 드러나는 건 시간문제입니다. 제가 이 자리를 마련한 건 불필요한 시간 소모를 줄이기 위해서였습니다.”
수혁은 한동안 그를 한심하게 쳐다보다가 말을 이어 갔다.
“일단, 오늘은 집에 들어가시고 내일부터는 나오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리고 조만간 고소가 들어갈 테니 유능한 변호사를 준비해 두시는 편이 좋을 겁니다. 아, 그리고 이명학 그 자식한테 이 이야기를 전하면 과연 과장님을 보호하려고 할까요? 연락이나 두절되지 않으면 다행이겠네요.”
‘……대표님 말씀이 맞아. 만약 SH와 소송에 들어가게 되면 나와의 연결고리를 모두 끊고 버릴 게 분명해.’
철규는 낯빛이 점점 어두워지더니 고개를 푹 숙인 채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지금이라도 솔직히 말씀해 주시면 법적인 조치는 들어가지 않겠습니다.”
“……사, 사실, 대표님이 회사에 오신 후로도 종종 이명학 대표와 대화를 나누곤 했습니다. 협박 아닌 협박을 당해서 마지막으로 연락했던 건데…… 일이 이렇게 커질 줄은 몰랐습니다.”
“과장님 말고도 그놈이랑 연락하는 사람은 더 있습니까?”
수혁은 그가 명학과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도 궁금했지만 또 다른 내통자를 색출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다른 사람들이 내통했는지는 확신할 순 없지만 전 대표님이 지오닷컴 시절에 일했던 사람들을 모아 술을 사신 적이 있습니다.”
“그때 참석했던 사람들 중에 회사에 남아 있는 직원들을 모두 알려 주세요.”
모든 것을 포기한 철규는 자리에 참석했던 사람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호명했다.
‘다행히도 내통한 사람이 많지는 않네.’
이야기를 듣던 수혁은 이 외에도 명학과 주고받은 내용이 무엇인지 모두 알아내었고, 더 큰 문제를 막기 위해 이들을 모두 퇴사시키기로 마음먹었다.
“방금 거론한 사람들한테 연락하셔서 알아서 처신하라고 전해 주세요.”
“…….”
수혁은 회사 측에서 일방적으로 퇴직을 시킬 경우 노동법에 저촉되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이들이 자진 퇴사하기를 바랐다.
“제 행적이나 회사의 매출 상황 정도를 말한 것은 법에 저촉되는 건 아니지만, 기밀 서류를 유출한 것과 프로젝트 진행 상황을 타 업체 직원에게 말한 건 그냥 넘어가기 어려운 사안입니다. 대화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내일부턴 새로운 직장을 알아보세요.”
용건을 마친 수혁은 냉정하게 등을 돌리고 회의실로 돌아갔다.
“본부장님, 이쪽으로 와 보세요.”
“네.”
수혁은 용민에게 명학과 내통한 사람들의 이름을 알려 주고 적절한 조치를 지시했다.
“다들 나가셔도 좋습니다. 방금 제가 말한 건 신경 쓰지 마시고 업무에 집중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는 회의실에 남아 있던 직원들을 모두 제자리로 돌려보냈다.
‘일단, 한시름 덜었어. 이번 기회에 간자들을 색출했으니 소득이 없지는 않아. 자, 이제 어떻게 하면 좋을까?’
수혁은 회의실 테이블에 앉아 다음 스텝을 모색했다.
* * *
시간은 흘러 4월 말이 되었다. 그 사이 수혁은 대학에서 중간고사를 치름과 동시에 지오쇼핑 경영을 병행하느라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회장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회장실에서 한창 업무를 보던 수혁은 노크 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유신의 목소리를 들었다.
“들어오세요.”
그는 하던 일을 멈추고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한정길 사장님과 협업 관련된 논의를 모두 마쳤습니다. 5월 중 지오쇼핑의 서비스가 개시될 때에 맞춰서 SH에듀케이션이 적절한 지원을 해 주기로 약속하였습니다.”
유신은 SH에듀케이션에서 제작하는 교재와 문구류 등을 할인 판매하기 위한 준비 과정이 모두 완료되었음을 보고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업체들과의 업무 협약은 잘 이루어지고 있습니까?”
“후,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겠지만 몇몇 업체들은 아예 우리 측의 전화를 받지도 않습니다.”
그는 답답했는지, 한숨을 크게 쉬며 말했다.
‘예상했던 대로야.’
협회 모임에서 정수와 마찰이 있은 이후로 대부분의 유통 업체들은 SH와 엮이는 것을 꺼려하는 분위기였고 수혁은 돌파구를 찾기 위해 방법을 강구해 보았지만 명쾌한 해결책은 나오지 않는 상황이었다.
“제조업체들 쪽으론 연락해 보셨습니까?”
“유통 업체들과 제조업체들이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걸 생각하면 어렵지 않겠습니까?”
“그들이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건 서로 이득이 돼서이지, 상호 간에 특별한 친밀관계가 형성되어서 그런 게 아닙니다. 제조 업체 입장에선 우리와 협약을 맺으면 제품을 판매할 수 있는 또 다른 판로를 확보하는 건데 거래를 하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수혁은 이익을 추구하는 기업의 생리상 제조업체들이 지오쇼핑을 외면하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다.
“다행히도 엘마트 측에서 우리 회사에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일물류 측에서도 어떤 식으로든 도움을 주겠다고 했으니 희망이 없지는 않습니다.”
“엘마트에서 연락이 왔나요?”
“네, 지오쇼핑에서 진행하려는 사업 기획안이 뭔지 자세히 묻더군요. 그래서 미팅 날짜를 잡고 한번 만나 보기로 했습니다.”
‘이병섭 회장님이 도와주려는 모양이군.’
그는 석호와 두터운 친분이 있는 병섭이 손을 내밀어 준 것에 대해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미팅 날짜를 따로 잡을 필요는 없습니다. 제가 직접 엘마트 회장님을 뵙고 오겠습니다.”
“네? 그쪽 회장님을 잘 아십니까? 아직 제대로 된 논의가 오간 것도 없는데 가능하겠습니까?”
“그 부분은 제가 손 써 보겠습니다. 그보다, 우리 회사 컨셉에 맞는 제조 회사들을 선정해서 연락들을 돌려보세요.”
“알겠습니다. 그럼 나가 보겠습니다.”
“네, 수고하셨습니다.”
유신이 방에서 나간 것을 확인한 수혁은 곧장 석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회장님, 안녕하십니까? 강수혁 대표입니다.”
“네, 대표님. 어쩐 일이십니까?”
“이병섭 회장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시기로 한 것 같습니다.”
“오, 그래요? 참 감사한 일입니다.”
이야기를 들은 석호는 자신의 일처럼 기뻐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제가 감사하다는 연락을 드려야 예의일 것 같아서 회장님께 전화드렸습니다.”
“하하, 왜 전화하셨는지 알겠군요. 알겠습니다. 제가 연락처를 보내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이 회장께도 미리 언급을 해놓겠습니다.”
필요한 것을 얻은 수혁은 석호와 간단한 대화를 더 나누다가 전화를 끊었다.
‘어떤 것부터 말씀을 드리면 좋을까?’
수혁은 연락처가 오는 것을 기다리며 해야 할 말들을 머릿속으로 정리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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