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왔다. 언제 연락을 드리면 좋을까?’
문자로 연락처를 전송받은 수혁은 오후 5시를 가리키고 있는 시계를 보며 생각했다. 아직 한창 일할 시간인지라, 혹시나 실례가 되지 않을까 주저하고 있는 거였다.
‘하, 모르겠다.’
한참을 고민하던 수혁은 핸드폰을 들고 병섭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바빠서 전화가 어려울 거라 예상했던 것과 달리 그는 전화를 곧장 받았다.
“안녕하세요, 일전에 협회 모임에서 인사드렸던 강수혁입니다.”
“네, 대표님. 생각보다 늦게 연락을 주셨군요.”
“제 전화를 기다리시는 줄 알았다면 진작 연락을 드렸을 텐데 죄송합니다.”
“하하, 정 회장님께서 말씀을 해주셔서 전화가 오시겠지 생각하던 참이었습니다.”
석호가 미리 언질을 준 덕분에 대화는 부드럽게 흘러갔다.
“다름이 아니라, 저희 직원의 말로는 엘마트 측에서 우리 회사에 관심을 보였다는 보고를 듣고 회장님과 논의를 하고 싶어서 전화를 드렸습니다.”
“이전 모임 때 다른 회원들이 대표님께 너무 무례하지 않았습니까? 저라도 도와야지요.”
병섭은 수혁을 위하는 것처럼 이야기했지만, 사실은 석호와의 친분 때문에 발 벗고 나선 것이었다.
“가뜩이나 돌파구를 찾지 못해서 답답한 상황이었는데 정말 감사드립니다. 저희와 같이 일을 하게 되면 엘마트 입장에서도 결코 손해는 아닐 겁니다.”
“오호, 좋은 방법이라도 있으십니까?”
병섭은 딱히 이득을 보기 위해 손을 내민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수혁이 어떻게 협업을 통해 수익을 낼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저는 엘마트에서 취급하고 있는 상품들을 온라인으로 판매할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시행 후 당장에는 큰 이익을 기대할 수는 없지만 먼 미래를 바라봤을 때는 분명 크게 도움이 될 겁니다.”
수혁은 스마트 폰이 개발되고 온라인 쇼핑 앱이 활성화되면 백화점이나 대형 마트들이 위축될 거란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대표님, 외람된 이야기이지만 온라인으로 물품을 판매하는 작업은 지오쇼핑이 아니더라도 저희가 직접 할 수 있습니다. 예전에 그런 기획을 들고 온 직원이 있어 사업성을 검토해 봤지만 회의적인 평가를 받은 바가 있습니다.”
“……정확히 어떤 기준으로 온라인 판매를 부정적이라 평가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제 이야기를 더 들어 보시면 생각이 변하실 겁니다.”
병섭의 말을 들은 수혁은 순간적으로 당황했지만 침착하게 말을 이어 갔다.
“그럼, 잠시 만나서 대화를 나누면 어떻겠습니까? 오늘은 저녁에 초청받은 행사가 있어서 힘들 것 같고, 내일 저녁에 뵙는 건 어떻겠습니까?”
“좋습니다. 엘마트 본사가 종로에 있는 것으로 아는데, 제가 근처에 대화할 수 있는 곳을 예약해 두겠습니다.”
수혁으로서는 그의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렇게 해 주시면 저야 감사하지요. 내일 임원들과 저녁 오찬이 있어서 그러는데 8시에 시간 괜찮으십니까?”
“네, 그 시간대에 맞춰서 장소를 예약하고 문자로 알려 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내일 만남을 위한 세부적인 일정들을 조정한 뒤 어떤 사항들을 논의할지 짧게 이야기하다가 전화를 끊었다.
‘온라인으로 생필품을 포함한 다양한 제품들을 구매하는 수요가 확실하지 않은 모양인가 보네. 내가 상황을 너무 낙관적으로 파악한 건가? 사업 계획서를 다시 검토하고 준비를 철저히 해야겠어.’
이날 밤, 수혁은 병섭에게 들어올 예상 질문들을 작성하고 지오쇼핑 기획안을 철저히 검토하며 미팅에 대비했다.
* * *
종로와 광화문 일대는 수많은 회사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고 주변에는 술집을 비롯한 다양한 가게들이 영업을 하고 있었다.
‘생각했던 거보다 훨씬 고급스러운 분위기인데?’
수혁은 약속 시각에 맞춰 ‘모던살롱’이라는 가게에 도착했다. 이곳은 주로 기업 임원들이나 로펌 변호사들과 같이 고소득 직종의 인사들이 비즈니스 미팅을 많이 하는 장소였다.
“안녕하세요. 모던살롱입니다.”
명품 수트를 입은 종업원 한 명이 수혁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네, 어제 급하게 SH그룹 이름으로 예약을 했는데요.”
“아, 네. 안 그래도 룸 세팅이 막 끝나가던 참이었습니다.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남자는 가게 안쪽에 있는 VIP전용 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정치인이랑 기자들도 이런 곳에 오나 보네. 하긴 애당초 일반 사람들은 예약을 받지 않으니 편하게 술 마시기엔 괜찮은 곳이지.’
중앙 홀에는 가볍게 커피나 술을 마실 수 있는 소파와 테이블이 놓여 있었고, 티비에 나오는 유명인사들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회장님께서는 8시 이후에 오실 겁니다.”
“네, 도착하시면 이쪽으로 바로 모시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넵.”
직원이 나간 것을 확인한 수혁은 방 내부를 둘러보며 병섭을 기다렸다.
‘인테리어 하나는 끝내 주게 잘했네. 저 샹들리에도 엄청 비싸겠지?’
그는 유럽에서 수입해 온 명품가구들로 가득 채워진 룸을 살펴보며 감탄하고 있었다.
“회장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들어오세요.”
노크 소리와 함께 들어온 직원은 병섭을 데리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대표님, 반갑습니다.”
병섭과 수혁은 악수를 하며 인사를 건넸다.
“모던살롱은 저도 자주 오는 곳인데, 대표님께서는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냥, 비즈니스 미팅을 위해 적합한 곳을 찾던 중 우연히 알게 됐습니다.”
“VIP룸을 사용하려면 적어도 10일 전에는 예약을 잡아야 하는데 용케도 예약에 성공하셨군요?”
병섭은 술잔에 얼음을 넣으며 천천히 말했다.
“회장님과 미팅을 한다고 하니까 일사천리로 쉽게 예약되던데요?”
원래 가게에서 영업을 할 때 사람을 직업에 따라서 차별을 하는 것은 옳지 못한 행동이었지만, 신분 보장이라는 명목과 소셜 클럽이라는 컨셉을 살리기 위해 능력에 따라 고객들을 다르게 대하고 있었다.
“하하, 이게 비단 저 때문이겠습니까? 하루가 달리 성장하는 SH그룹의 영향도 있겠지요.”
병섭은 수혁의 말에 기분이 나쁘지 않은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두 사람은 진지한 대화에 앞서 술잔을 주고받으며 덕담을 주고 받았다.
“이제 슬슬 일 이야기를 좀 할까요?”
“네, 벌써 1시간이 훌쩍 지났네요.”
병섭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혁이 무슨 이야기를 꺼낼지 기다렸다.
“어제 회장님과 통화를 하고 나서, 엘마트에서 왜 온라인 판매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는지 고민해 보았습니다.”
“그렇습니까? 차라리 제가 먼저 말씀드려도 될까요? 저도 금일 아침에 온라인 사업에 대한 검토보고서를 읽고 왔거든요.”
“네, 먼저 말씀 하시죠.”
수혁은 살짝은 긴장된 얼굴로 그의 말을 경청했다.
“먼저, 마트 내에 취급하고 있는 제품들 중에는 사이트에 개재하기 어려운 것들이 많습니다. 도매로 사들이는 생필품이나 몇 개의 물건들을 제외하면 나머지들은 우리 마트에 입점한 타 업체의 상품들이라는 것을 고려해야 했습니다.”
“흠, 점포 점주들의 경우 마트에 일정 정도의 금전을 지불한 것일 뿐이라서, 판매에 대한 부분을 강제하기가 어렵다는 말씀이시군요.”
마트 내에는 옷가게와 신발가게 등이 있었는데 이들의 제품을 사이트에 일괄적으로 등록하기 힘들다는 이야기였다.
“맞습니다. 게다가 다른 제품들도 재고 파악이 어렵기 때문에 온라인으로 물건을 판매하게 되면 수익보다는 관리 비용이 더 들 거라고 판단했습니다.”
“저도 그런 부분이 온라인 판매에 큰 문제가 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사이트에 게시하게 되면 고객들이 주문을 할 텐데, 현장에서는 실시간으로 물건들이 판매되고 있기 때문에 자칫하면 온라인 고객들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을 테니까요.”
수혁은 시시각각 변하는 재고량으로 인해 수시로 수량 파악을 해야 한다는 점을 인지하고 있었다.
“아시다시피 직원들을 시켜 물품에 대한 재고를 수시로 확인하게 한다면 많은 인건비가 발생하게 될 겁니다. 그리고 자체적으로 조사를 한 결과 인터넷을 활용해서 물건을 사는 고객보단 두 눈으로 물건을 고르는 것을 선호하는 고객이 훨씬 많은 것으로 파악이 됐고요.”
“그것 외에도 물건을 전달하는 들어가는 유통 비용 또한 만만치 않겠지요.”
수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에 동의했다.
“대표님, 지금까지 우리의 대화를 종합해 보면 온라인 쇼핑몰 사업이 수지가 안 맞는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렇지만 방법이 있다고 말씀해 주셨는데, 그게 무엇입니까?”
병섭은 사업 아이템의 결점을 순순히 인정하는 수혁을 의아하게 바라보며 물었다.
“예상되는 문제들이 있다면 그에 대한 해결책도 있는 법이지요. 물론 회장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마트 내에 있는 전 제품을 온라인 판매하는 건 효율적이지도 않고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수혁은 술잔에 남은 술을 들이켜며 말했다.
“제품 가격이 어느 정도 되는 제품들은 온라인보다는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하는 고객들이 많을 겁니다. 하지만 라면, 쌀과 같이 품질의 균일성이 보장되는 제품들의 경우에는 이야기가 달라지겠지요.”
“아, 그러면 제조업보다는 생필품 위주로 물건을 판매하자는 말씀이신 겁니까?”
“꼭 그렇다기보다는 온라인 판매를 위해 필요한 조건에 집중해 보자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조건이요?”
병섭은 호기심이 가득한 얼굴로 반문하였다.
“네, 그렇습니다.”
“뭐가 있을까요?”
“마트 내 상품들 중 온라인 판매에 적합한 제품들의 특성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재고가 많이 확보되어 있어야 하고, 둘째 고객들이 많이 주문해야 하며, 마지막으로는 운반이 용이해야 합니다.”
수혁은 지난밤에 생각했던 아이디어들을 하나둘 꺼내 놓았다.
“앞에 두 개는 이해가 가는데 마지막에 하신 말씀은 어떤 의미입니까?”
“회장님이 걱정하시는 것처럼 당분간은 인터넷 쇼핑몰이 오프라인에서 쇼핑을 하는 수요를 앞지르기 어려울 겁니다. 따라서 물품을 전달할 때 택배 차량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소형차나 오토바이를 활용할 생각입니다.”
“하긴, 주문하는 집마다 주소가 다르고 대량으로 주문한다고 해도 양이 한정적이기 때문에 트럭을 사용하는 건 효율적이지 못하겠군요.”
병섭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회장님께 제안드릴 것이 있습니다.”
“뭡니까?”
“온라인 쇼핑몰에 올릴 제품들을 따로 보관할 장소를 마련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주문을 받고 물건을 가지러 마트를 돌아다니기보다는 바로 물건들을 찾을 수 있게 하는 거죠.”
“흠, 그 부분은 지금 이 자리에서 쉽게 결정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창고를 따로 확보하는 건 운영상의 큰 변화를 초래하고 비용이 많이 드는 작업이라…….”
병섭은 수혁의 말에 난색을 드러냈다.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현재 마트 내에 재고품들을 보관하는 창고 중 일부를 개조하여 사용하면 되니까요.”
“하지만 냉동이나 냉장식품도 있고, 제품들마다 고려해야 할 요소가 적지 않습니다.”
“초반에 드는 불편함을 감수하신다면 나중엔 큰 이득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저도 엘마트 측에서 무리가 가지 않게 여러 방면에서 지원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이들의 논의는 시간이 지날수록 열기를 더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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